마포 커피공화국, WBC이야기

2011.11.07 11:13

beirut 조회 수:3927


아직 우리나라에선, 맛있는 커피(혹은 더 맛있는 커피)를 찾는 애호가층이 상당히 얇다는 생각입니다. 뉴욕에서 이런 장면을 본 적이 있습니다. 사람들이 줄이라도 선 듯이 컵케익 유명한 카페에서 컵케익만 사다가, 정작 커피는 그 옆 김미커피라는 카페로 건너와서 주문한 뒤 컵케익과 함께 올려놓고 냠냠하던 모습이죠. 그게 인상적이어서 저도 한 잔 시켜봤습니다. 역시 남다른 맛이더군요. 맛있는 건 다들 알아보나봐요. 한 골목만 들어가면 정말 잘 하는 카페가 있는데, 그 앞 대로의 프랜차이즈만 사람들로 드글거리던 한국의 모습이 떠올랐습니다. 뭐 우리나라 분위기도 조금씩 달라질 거라고 생각합니다. :) 

주변을 돌아보면, 다른 나라들에 비해 많이 늦기는 했지만, 좋은 커피에 대한 수요나 공급 양면이 크게 늘고 있다는 느낌입니다. 전에 어떤 듀게인게서도 제게 책임을 요구하며(;;) 항의하셨습니다만, 황홀한(신기한?) 커피 한 잔을 마셔본 사람은 이전의 무색무취한 커피를 마실 때마다 불만족할 수밖에 없죠. 그래서 더 까다로운 기준을 카페들에 요구하게 되고, 그럼 카페들은 또 힘내서 커피 본연에 힘쓰는 카페를 꾸리고, 점차 자기 샾의 개성이 살아있는 멋진 커피를 내놓는 개인 로스터 겸 바리스타 분들이 많아지는 선순환이 이루어진다면 좋을 겁니다.  

이런 기대감에 발맞춰, 요즘 우리나라 젊은 바리스타들의 기세도 무섭습니다. 손꼽는 커피 명인들이 계시긴 하지만, 국제적인 공인과는 한참 엇나간 길을 걸으셨죠. 차세대(?) 바리스타들은 겁없는 열정과 도전정신으로 세계 무대에서 이름을 알리고 있습니다. WBC라고 들어보셨나요? 라떼아트 분야에서부터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한 한국의 바리스타들은 불과 몇년만에 WBC (World Barista Championship) 메인 경기에서도 당당히 순위권에 오를만큼 세계적인 실력을 자랑합니다. (원래 우리나라가 등수 매기는 시험들엔 참 강하잖아요.) 2009년 WBC에서는 이종훈 바리스타가 최종라운드까지 올라 5위를 차지했고, 콜롬비아 보고타에서 열린 2011년 대회에서는 5 Extracts의 최현선 바리스타가 세미파이널에 진출하여 7위에 올랐죠.


WBC의 메인 경기는 각국의 대표로 선발된 바리스타가 에스프레소, 카푸치노, 창작메뉴를 각 4잔 총 12잔을 15분 동안에 추출하는 경연입니다. 심사 포인트는 다양한데요, 원두의 로스팅(혹은 선택)부터 그라인더 선택, 추출, 서비스, 커피의 맛, 창작메뉴의 창의성 그리고 뒷정리까지(심사에는 포함되지 않는걸로 알고있습니다만, 경연동안 나오는 음악도 바리스타가 선택한다고 합니다). 바리스타의 기본적인 자질부터 커피에 대한 태도까지 평가하는 까다로운 경연이죠. 15분간 진행되는 이 경기를 보고 있으면 스릴이 넘칩니다. 각국의 이름을 걸고 경연에 임하기 때문에 월드컵을 볼 때처럼 조마조마 응원하는 맘이 생기죠. 


오늘 제가 방문한 카페는 리퍼블릭 오브 커피입니다. 커피 공화국. 각오가 느껴지는 이름 아닙니까? 앞서 WBC수상자로 소개한 이종훈 바리스타가 이곳에 있습니다. 세계적으로 인정받은 실력을 가진 분이 오롯이 자기만의 가게를 가지고 연구를 계속하며 커피를 대접하는 공간이라니, 존재만으로도 일단 감격스럽습니다. 이런 곳들이 더 있어야 해요. 





마포역 4번출구를 나와 조금만 걷다보면 금방 저 소박한 간판을 찾을 수 있습니다. 




샵에 들어서자마다 눈에 들어오는 건, 셀 수도 없는 상장과 인증서 그리고 트로피들입니다.

 


그 중에서도 눈에 띄는 것은 바로 이 것. 2009년 아틀란타에서 열린 월드바리스타챔피언쉽 트로피입니다. 
WBC는 에스프레소 기반이기 때문에, 여기서 좋은 성적을 냈다고 해서 모든 커피를 훌륭하게 낼 것이라고 확신할 순 없습니다. 하지만 이 대회에서 좋은 성적을 내기 위해선 좋은 원두를 선택할 수 있는 감각이 필요합니다. 원두에 있어서 타협을 하지 않을 거라는 점은 믿을 수 있겠죠. 더불어, 커피 맛 뿐만 아니라 서비스의 전체적인 면을 평가하는 대회에서 좋은 성적을 얻었다는 것은 분명 기대할 만한 요소입니다.




다음으로 눈이 가는 건 주방. 빨간 빛을 내고 있는 저 화려한 머신은 1959 페마(FEAMA) 프레지던트 레버 머신입니다. 오래된 기종이죠. 자동으로 압이 걸리는 머신들과는 달리 레버를 내려서 에스프레소를 추출하는 머신입니다. 빨간색의 화려한 조명이 자극적이네요. *-_-* 
안쪽으론 시모넬리 아우렐리아가 자리잡고 있군요. 시모넬리 아우렐리아는 2009년 WBC공식 머신으로 지정됐던 모델이기도 합니다. WBC에서는 대회에서 지정한 머신만을 사용해야 해요. 아우렐리아가 있는 이유는 바로 이 때문인 듯 합니다. 그라인더는 여러 개가 있는데 잘 안보이는 곳에 놓여있어서 확인이 안됐습니다. 그나마 측면에 놓여있는 디팅 그라인더가 눈에 들어오네요. 
어떤 머신을 주로 사용하는지 물어봤습니다. 아우렐리아를 많이 사용한다고 하시더군요. 원한다면 페마로도 내려주지만 레버머신 특성상 압력이 덜 걸리기 때문에 그 점을 감안해야 한다고 말씀해주셨습니다. 이 날 블렌딩에도 페마보다는 아우렐리아가 적합하다고 하셔서 아쉽게도 레버머신이 작동하는 모습은 보지 못했습니다.







메뉴판입니다. COE급 생두를 쓰는 것에 비해 가격이 비싸지는 않네요. 기본적인 에스프레소 메뉴와 더불어 다양한 베리에이션 메뉴가 있습니다. 메뉴 뒷편엔 에스프레소 메뉴의 레시피가 적혀있어요. '뭐 거 이름만 복잡하고 뭐가 뭔지 하나도 모르겠는 것들!' 하시는 분은 참고하시면 좋을 듯 하네요.
드립커피 대신 클레버와 에어로프레스로 싱글오리진 커피를 내려줍니다. 베이커리 메뉴와 세트 메뉴도 있어요.






친구와 함께 갔기 때문에 평소보다 다양한 종류를 맛볼 수 있었습니다. 카푸치노와 에스프레소, 클레버와 에어로프레스로 내린 케냐를 주문했습니다. 리필로는 클레버로 내린 에티오피아를 마셨구요. 둘이 마시긴 했지만 총 6잔을 마셨네요. 이렇게 마시고 홍대에 있는 단골샵에 또 들렸다는; 위장이 뚫리는 경험을 한 하루였습니다 ㅠㅠ
카푸치노의 거품은 최근 들른 샵중에서 가장 맘에 듭니다. 두껍고 밀도있는 거품층. 제가 좋아하는 카푸치노 스타일입니다. 착착 감기네요. 오밀조밀하고 달달하며 고소한 맛이 일품이고요. 하지만 짧은 애프터 테이스트가 단점으로 느껴졌습니다. 바리스타분께 여쭤보니, 이날 블렌딩은 에티오피아와 브라질만 섞은 것이고, 평소 구성과 조금 다른 상태라고 하시네요. 애프터 테이스트가 짧은건 달라진 그 때문일거라고 얘기해주셨어요. 
에스프레소는 좋았습니다. 신맛이 그리 강하지 않으면서도 달콤하고 부드러웠습니다. 에스프레소의 신맛은 우유와 결합했을 때 달콤함을 만들어내는 역할을 합니다. 그리고 에스프레소가 우유의 맛에 밀리지 않도록 도와주는 역할을 하죠. 그런데 에스프레소가 이렇게 신맛이 절제돼 있으면서도 우유를 만났을 때도 조화가 잘 되다니. 신기하네요.
같이 마신 케냐도 역시 맛있었습니다. 첫모금부터 좋은 생두라는게 단번에 느껴지더군요. 친구와 저는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하지만 클레버 특유의 밍밍함은 뭔가 부족함을 느끼게 만들었습니다. 에어로프레스로 내린 게 더 맛있더군요. 둘다 조금 식었을 때 더 맛있었다는 점이 특이했습니다. 보통은 커피가 식으면 신맛이 부각돼서 마시기 거북해질 때가 많거든요.

 




원두들. 황금빛을 띈 갈색입니다. 약배전임을 알 수 있죠. COE급임에도 불구하고 고맙도록 저렴한 가격에 원두판매를 하고 있습니다.




곳곳에 COE를 인증하는 서류들이 있네요. 이날 마신 블렌딩은 아니지만, 블렌드에 COE급 생두가 2개나 들어간 걸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그만큼 투자를 아끼지 않는단 얘기겠죠. 정확한 로스팅 날짜와 블렌딩 비율을 공개한 부분이 인상적입니다. 보통은 이런 걸 영업 비밀이라며 숨기게 마련인데요.

 



클레버와 에어로프레스. 이제 에어로프레스는 대세군요. 없는 샵이 없습니다. 하하. 제 홈카페에선 작년 8월에 이미 에어로프레스를 도입했습니다. 제가 그만큼 트렌디 하단 얘기죠. 하하!;;;;;

 


아담하지만 있을건 다 있는 내부 모습입니다.



2층은 로스팅 및 커피 교육장으로 쓰인다더군요. 




혹시 궁금하신 분들을 위해, WBC영상 일부를 가져와봅니다. 이건 아마도 2010년 오스트레일리아 대회에서 우승을 했던 Scottie Callaghan의 국내 대회 영상인 것 같네요.
Scottie Callaghan은 2010년 WBC 런던 대회 파이널에 진출하여 3위에 올랐었죠 

 

 

+ 수정

댓글의 도움을 받아 다시 링크 거니 되는 것 같네요. 이종훈 바리스타의 WBC대회 영상입니다.

Lee, Jong Hoon, Korea - 2009 WBC Finals from nick cho on Vime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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