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안해

2011.10.03 19:13

유니스 조회 수:1767

1 화장실 문을 열었어요

 

일을 본 뒤 엉거주춤한 자세로 휴지를 사용하고 있는 작은 여자아이.

"미안해.있는지 몰랐어."

하고 문을 닫았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그렇듯, 내가 더 당황해서 서둘러 나와버렸어요.

 

며칠이 지난 후 아이가 내내 마음에 남아요 보통의 경우라면, 이십대 여자라면

순간 소리를 지를 거에요. 준비되지 않은 소리니까 의성어로 표현하기 어려울 정도의 단말마.

 

그런데 아이는 아무런 소리도 내지 않았어요.

자극에 대한 반응이 -어린 시절의 나처럼- 남보다 십분에서 길게는 하루 정도 느린 아이였을 수 있고.

'아아, 나 그 때 놀랐지. 되게 창피했었지'

 

아니면 말을 할 수 없는 아이였을 수도 있어요

이런 이상한 생각이 들어버릴 만큼 유난히 낯선 순간이었어요. 아이는 길게 내린 앞머리 틈으로 느릿느릿 쳐다 보았고 그 표정은 독해가 불가능했어요.

 

 

2 어린 아이들은 자신이 살아온 시간의 경험과 감각으로 감당하기 어려운 거대한 충격과 고통 앞에서 종종 아무런 소리를 내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사실상, 어떤 말을 해야하는지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하는지를 인간은 학습으로 반응할 때가 많으니까.

'나 괴로워'라고 말할 수 있는 건 어른들이죠. 아이들은 울거나 영원히 입을 다물어버려요. 어린 저도 그랬었기 때문에 잘 알고 있어요. 괴로움 앞에서도 착한 아이답게 '엄마, 전 괜찮아요' 라고 말해 버릇했고, 겨울이면 혼을 나 가면서도 입술은 붉게 터오르도록 침을 발라댔어요. 때로는 손톱을 물어뜯었고요. 멈출 수가 없었어요.

 

 

3 영화 <도가니>를 예매하고 취소하기를 한 번,

원작 소설을 집었다 놓기를 두번,

트위터와 게시판에서 리뷰들을 샅샅이 훑어봐서 대부분의 내용을 예상 혹은 짐작하는 데에도

커다란 화면에서 생생한 질감으로 선명한 명암으로 처리될 그 장면을 마주하기를 두려워하고 있어요

아마도 겁박당한 느낌일 것 같아서. 목이 졸리는 느낌일 것 같아서요.

 

다시 아이를 떠올려요. 작은 터미널이었어요. 서울의 큰 터미널 같지 않게 초라한데다 남녀공용인 화장실도 영 깨끗하지 않아 되도록 이용하지 않도록 주의하게 되는. 아이는 어디를 가는 길이었을까요,고작해야 2학년 정도로 보이는 아이에게는 함께 온 엄마가 있었을까요. 아이는 문을 열고 엄마에게 와락 안기며 "문이 열렸었어"하고 말했을까요. 제발, 그러했기를. 머리에 꿀밤을 먹인 엄마가 "앞으로 문 잘 잠궈. 얼마나 무서운 세상인데, 얘가" 하고 핀잔을 주었기를. 제발 그러했기를.

 

생각은 꼬리를 물고, 여러 갈래의 좋지 않은 상상으로 이어지며 길을 떠돌다 밤이면 역사에서 작은 몸을 웅크리며 추위를 견디는 아이가 아니었을까 하고 문득 불길해지기까지 합니다.

 

이 곳은 아이들에게 잔혹한 도시. 아이가 여자아이라면 지옥이 될 수도 있는 곳이니까.

서로에게 민망한 모습으로 아주 잠깐 인사한 아이가 나의 상상과 달리 그저 행복한 아이이기를 대책없이 바래보는 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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