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19일, 퇴근하고 건대에서 가볍게 한 잔 걸치고 돌아오는 길에 오토바이 사고를 당했어요.

사고 당시와 사고 후 약 2주 정도는 기억에 없습니다. 중환자실 및 일반병실에서 블라블라 말도 안되는 얘기들을 사람 안가리고 잔뜩 늘어놨대요.

머리를 다쳐 왼눈은 다 안 감기고 입은 오른쪽으로 삐뚤어진 채로 말은 아무거나 잘도 해댔던 모양이니 꽤 참담했으리라 짐작은 갑니다. 지금은 눈도 감기고

입도 돌아왔어요.

2번과 5번 경추에 금이 가고 골반과 왼다리가 분쇄 골절. 전치 12주가 나왔죠. 늘 최악의 상황만 읊는 의사양반들 말과는 달리 전 바보가 되지 않았고

앞뒤로 절개해야 할지도 모른다던 경추 부상은 8주간의 지겨운 목마스크 착용으로 자연치유 성공. 다리수술은 지금까지 3번 받았고, 한두 번 더 남았습니다.

늘 필요 이상으로 건강해서 병약한 친구들 사이에 추앙의 대상이었던 제가 상체 하나 일으켜세우지 못하고 주구장창 일자로 누워만 있자니 죽을맛이더군요.

섭식을 제대로 못하고 수액으로만 버텨버릇했더니 체중이 5KG는 빠진 듯해요. 2.8KG로 태어난 신생아시절 말곤 이렇게 말라본 적이 없어요!!! 3년간 거의 매일

운동하며 가꿔온 내 근육들ㅜㅜ 복근ㅠㅠ 타고난 꿀벅지(뭐?)..잃는건 순간이더이다. 한달 누워만 있으니 흔적도 안 남더군요. 지금은 갈비뼈랑 스, 슴가가

비슷한 높이일 지경이에요 엉엉엉ㅇ엉ㅇㅇㅇ유ㅠㅠㅠㅠㅠㅠ 내평생 왜케 마르셨냐고 놀라하며 묻는 말을 듣는 날이 오다니. 아무튼 덕분에 그닥 원치 않던

가족상봉-_...도 하고, 실로 오랜만에 돈 안 벌고 놀고 있으니 이 사고를 뭔가 전환점으로 삼아야 하나, 라는 생각도 드는군요.

 

아무튼 어제는 생일이었고, 병원에서 보냈습니다. 전 8월까진 병원에 있어야 하거든요. 생일선물로는 책을 세 권. 그외에 먹을거리. 갈비만두 먹고싶다고 졸라서

배달오셨고, 강화도에서 밭매는 여인에게 초코무스나 초코시폰 먹고 싶다 그랬다가 그녀와 동승한 입맛 고상하신 만두셔틀한테 요즘 누가 그런거 먹냐고, 취향 촌스럽다고

다굴당했어요. 물건너온 파티쉐가 만들었다는, 개당 초코파이 한통 값이라는 초코마카롱을 냠냠 씹었습니다. 호사하였어요. 그외에도 본인은 알바하시느라

애인님을 대신 보낸( ..) 아가씨도 있었고. 일에 쩔어있었지만 부러 읽고싶다던 책을 사들고 방문해 간병인의 도를 잊고 아빠가 한잔 하러 나간 동안 놀아주고 가신 분.

갖고 놀 랩탑에 영화랑 미드랑 만화책 꽉꽉 채워 배달오면서 먹고싶다고 노래부르던 피자 대신 피자빵 사다주고 간 동네 오빠.

그리고 뭐든 사오고 싶고 뭐든 사줄 기세였으나 최근 며칠간 들은 '먹고싶은거 있어?' 질문에 대답하기 지친 나머지 그냥 책이나 한 권 사갖고 오라 했더니 몹시

투덜투덜하면서, 다음주부터는 한가해지니 밑반찬을 쟁여다 나르겠다던 애인님. 뭐 보통 때보다 챙김받은 기분이 드는 것도 같은 생일이었어요. 음 입원하고 새삼 느낀거지만

난 참 어리광도 많고 참을성도 없고, 아직 많이 어린애구나. 사람들이 하나같이 너같은 제천대성 천둥벌거숭이가 어쩌다 그리 격하게 몸부숴먹고 여기 갇혀있니...하는 표정이에요.

어 뭐 물론.....그릏긴 한데. 챙김받는 입장인건 싫지 않으네요.

오늘은 여섯 시쯤 일어나서 토요일에 선배 언니가 선물한 일명 '애란이 엉니' 김애란의 첫 장편 '두근두근 내 인생'을 엉엉 울면서 다 읽었어요. 병원에 있는 애한테

아픈 주인공 나오는 소설이라니, 이 언니 센스봐ㅠㅠㅠㅠㅠㅠㅠㅠ 두달간 하루도 쉬지 않고 매일매일 아파서, 엉덩이 한쪽당 백번도 넘게 진통제를 맞고 하루 두 번

삼십분씩만 면회가 허락되는, 핸드폰도 시계도 티브이도 없는 중환자실에 갇혀 천장만 보고 지내보니 몸이라는 것에 대한 생각이 달라지게 되더군요.

고통은-특히나 몸의 고통은 더더욱 외로운 것이에요 지극히. 온전하고 오롯한 자신만의 것이어서, 버텨내든 그렇지 못하든 자신이 책임져야 합니다. 아픈 순간은

철저하게 혼자가 되죠. 외로운 싸움이에요. 그게 이해가 되는 입장이어서, 그 다음 죽음이라는 건 과연 얼마나 외롭고 막막한 것일지에 생각이 미쳐서, 조로증 소년 이야기를 읽으며

답지 않게 촉촉해져서 엉엉 울었어요.

 

아, 이 길고 어이없는 병상생활에 듀게인들이 든든한 응원군이 되어주고 계세요. 졸지에 주인없는 신세가 된 우리 루이죠지를 고양이 한번 만져보신 적 없으면서 기꺼이 맡아 주시거나

매니큐어를 갖고 와서 네일아트 놀이를 해주신다거나, 좋은 재료 넣고 미역국을 푹푹 고아서 끓여다 주신다거나 말이죠. 이분들 외에도 방문자의 반은 듀게인인 듯하네요.

원체 애가 수다스러운데 그간 체력이 달려 말도 길게 못하고 대접도 제대로 못해드리다 세번째 수술 이후 수다체력을 9할 회복, 이제 언제 오셔도 수다만은 평소만큼 떨 수

있스빈다. 시끄럽다고 일찍 가시는 분들도 있지만요( '')

 

아무튼, 생존신고였어요. 죽을 뻔했지만 겨우겨우 살아는 있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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