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좋아했던 그녀에 대한 이야기

2011.05.24 01:02

산체 조회 수:3737

*바로 오늘 운명을 달리하신 송지선 아나운서에 대한 글입니다. 이 글에서는 그녀의 자살, 혹은 죽음보다는 저에게 기억되던 스포츠 아나운서로서, 전문직 여성으로서 그리고 야구인으로서 그녀에 대해 써보고자 합니다.



*저는 야구를 좋아합니다. 특히 우리나라 프로야구, KBO를요. 야구를 좋아하게 되면 처음에는 자기가 응원하는 팀 선수들 혹은 코칭스테프들을 좋아하게 되다가 이효봉같은 해설자, 한명제같은 캐스터, 턱돌이나 사순이 같은 각 팀의 마스코트 그리고 치어리더... 등등 야구와 관련된 많은 사람을 좋아하게 됩니다. 송지선 아나운서도 그러한, 제가 좋아한 야구인 중 하나였습니다. 그리고 저는 송지선 아나운서를 특히 더 좋아했습니다. 제가 그녀를 좋아한 이유 중 일부가, 그녀가 여성이라서, 그리고 아름다운 외모를 가지고 있어서라는걸 부정하지는 않겠습니다. 하지만 저는 요새 야구장을 누비는 그 어떤 다른 아름다운 여성 아나운서, 리포터보다 송지선씨를 더 좋아했습니다. 제가 그녀를 좋아한건 단지 그녀의 미모 때문만이 아니었어요. 그녀의 당당하고 여유있는 태도 때문이기도 했고, 야구를 사랑한 그녀의 열정 때문이기도 했습니다.


제가 알기로는 이지윤 아나운서도 송지선씨와 함께 kbs 스포츠에서 최초로 시도한 여성 리포터였습니다. 요새는 야구 하일라이트 프로그램을 여성 아나운서들이 진행을 하니 그들의 보직이 아나운서임이 틀림없죠. 하지만 얼마전까지 야구판에서 여성 방송인들의 역할은 아나운서라기보단 리포터였습니다. 그날 경기를 요약하고 그날 승리팀의 감독과 좋은 활약을 보여준 선수의 인터뷰를 따는 것이 여성 방송인들이 야구판에서 맡은 첫번째 임무였습니다. 이때부터 저는 송지선 아니운서에게 마음을 빼앗길 수 밖에 없었는데, 그 이유는 그날 승리팀 감독이나 야구 선수들 인터뷰를 할 때 문제가 되는 상황이나 관련된 이슈들을 그녀가 정확하게 숙지하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뉴스 앵커나 아나운서들이 뉴스 진행을 할 때 기본적인 큐시트나 자료는 보도국을 통해 입수하지만 구체적인 멘트나 상황을 전달하는 방식등은 앵커들에게 전적으로 달려있는 것과 비슷합니다. 리포터들이 인터뷰를 할 때 해설위원이나 캐스터가 도와주는게 아니에요. 리포터가 알아서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부분을 질문하는 겁니다. 이러한 리포터의 역할을 송지선씨가 아주 잘 수행했다는거죠. 그리고 현장의 분위기를 시청자들에게 잘 전달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습니다. 나 혼자 할일 다하고 끝내는게 아니라, 현장과, 팬들과 같이 호흡하려는 의지가 화면으로 보였습니다. 마치 '난 야구가 너무 좋아. 너희들도 그렇지 않니? 내가 대신 너희들이 알고 싶어하는 것들을 다 알려줄께'라고 이야기하는거 같았어요.


뭐 이런 식으로 비교를 하는 것은 공정하지 않다는 생각도 하지만 날이 날이니 만큼 그냥 과감하게 제 생각을 표현하죠. 모든 스포츠와 관계된 일을 하는 방송인들이 그 스포츠를 좋아해서 그 일을 시작하는건 아닙니다. 예전 인터뷰를 보니 지금 MBC 스포츠의 야구 중계팀 팀장을 하는 PD(그러니까 CP겠죠)도 그랬다고 하더군요. 자기 밥벌이가 아니었으면 이렇게 야구에 매진하거나 좋아하진 않았을꺼라고. 스포츠 중계를 하는 여성 아나운서 혹은 리포터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스포츠 자체를 좋아해서 그 길로 들어서게 된 경우도 있겠지만 대부분 구직활동을 하다보니 이 일로 접어드는 경우가 많죠죠. 지금도 가끔 회자가 되는 김석류 아나운서의 경우가 그랬습니다. 운이 좋게 이 길에 접어들긴 했는데 원래는 스포츠에 대한 지식이나 열정이 부족한 상태였죠. 김석류씨 또한 일을 계속해 나가면서 야구 자체와 선수들에 대한 애정이 커져가는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저는 그녀가 입사한지 얼마 되지 않아 했던 모 인터뷰에서, 야구와 배구 중 어느 종목이 더 끌리냐는 질문을 받았을 때, 그 당시에 배구가 조금 더 좋다고 했던 말을 기억하고 있어요. 네. 저 쪼잔합니다. 그런데 송지선 아나운서는 일편단심 야구였습니다. 비시즌 중에는 농구 중계에서 활약하기도 했지만 하여튼 그녀는 어느 상황에서도 야구가 좋다고 말했습니다. 야구 때문에 이 일을 시작한거라고요. 제가 모르긴 몰라도, 저도 야구를 참 많이 좋아하긴 하지만, 저같은건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송지선씨는 야구를 사랑했을 겁니다. 



*사실 여성 리포터라는게 그렇습니다. 제가 알기로는 여성 리포터는 사적으로 야구 선수들과 관계를 이어가기 최고의 직업입니다. 해설자들이 게임이나 경기력과 관련된 내용만을 시청자들에게 전달한다면, 리포터들은 야구선수들이 사적인 이슈들이나 신변 잡기에 관한 내용들도 폭넓게 취재하는 것이 이 판이 돌아가는 상황입니다. 아무래도 그런 아이템을 다룰 때 선후배 입장인 해설자들에게 맡기기 보다는 살가운 여성 리포터들이 접근하도록 하는 것이 야구 선수들의 진솔한 이야기를 듣는데 더 도움이 된다고 판단한 모양입니다. 그리고 어여쁜 전문직 여성들을 직장(?)에서 자꾸 만나게 되다보니 그 여성들에게 관심을 가지는 것도 야구선수들에겐 자연스러운 일이겠죠. 김석류씨도 결혼할 때 온당하지 못한 비난을 엄청나게 들었고, 송지선씨의 경우도 이렇게 안타깝게 가시고 말았지만 이후에도 야구판에 이런 일은 계속될거 같습니다. 그리고 이 판이 은근히 좁고 소문이 빨라서 이 정도로 인지도 높은 유명인들이 관련된 일은 그냥 묻히지 않고 대중에게 폭로될 가능성이 높을 겁니다. 


송지선 아나운서도 사적으로 어떤 일이 있었는지는 잘 몰랐지만, 솔직히 관심도 없지만, 그런 사적인 일이 뭐가 되었건 당당하고 자신감 있게 대처할걸로 믿고 있었습니다. 그녀는 그 악성 댓글들을 상대할 때에도 항상 의연했어요. 그리고 방송에서 보여지는 그녀의 모습도 항상 여유로웠습니다. 자신의 컨디션이나 기분에 관계없이 방송인으로서 자기 할일을 하는 사람이었죠. 그런 모습을 보고 저는 멋대로 생각했습니다. 내가 아는 것보다 그녀는 더 강인하고 슬기로운 사람일거라고. 하지만 이제는 알게 되었죠. 그녀도 그 수많은 대중들의 조롱 앞에서 마냥 무신경할 수는 없었던 우리 모두들 처럼 쉽게 상처받는 인간이었다는걸요.



*제가 읽은 그녀의 인터뷰에서 가장 인상깊었던 부분은 그녀의 꿈에 관련한 내용이었습니다. 그녀의 꿈은 야구 캐스터가 되는 거라고 했습니다. 이정민 아나운서는 캐스터로서 MBC스포츠에서 수년간 농구 중계를 담당해 왔습니다. 제가 알기로는 이정민 아나운서가 주요 구기 종목에서 유일한 여성 캐스터입니다. 캐스터라는 것이 그냥 그 상황만 전달해주고 가끔 이상한 상황나오면 해설자한테 뭐하는건지 묻는거라고 보일 수도 있는데, 사실 해당 종목에 대한 깊은 이해가 없으면 좋은 방송을 만들 수 없는 매우 중요한 보직입니다. 특히 마니아(오타쿠)들이 많이 보는 야구의 경우 더 그렇습니다. 경기를 이해해야 할 뿐만 아니라 보는 이들에 흥미를 자극하기 위해 흐름에 따라 흥분할 줄도 알고 화낼 줄도 알아야 하는게 야구 캐스터입니다. 지금 당장은 아직 야구와 경기의 흐름을 읽는 능력이 부족해서 캐스터로서 적합하지 않지만 언젠가는 여러 훌륭한 선배 캐스터들처럼 좋은 야구 캐스터가 되는 것이 송지선씨의 꿈이라고 했습니다. 최초의 그리고 최고의 여성 캐스터가 되고 싶다고 했습니다. 어찌보면 너무 소박하고 어찌보면 너무 상투적인 꿈이었지만 그 인터뷰에서 저는 야구를 향한, 스피드건에도 찍히지 않는다는 그녀의 열정을 어렴풋이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녀는 이렇게 갔습니다. 그녀의 갑작스럽고 허무한 죽음 자체도 너무나 안타깝고 원통하지만, 한편으로는 여성 캐스터를 볼 수 있다는 제 희망 또한 날아간거 같아 그 부분 또한 아쉽습니다. 지금도 방송 잘하는 여성 아나운서들 많죠. 그녀들도 열심히 공부하고 이해해서 시청자들이 조금 더 재미있게 야구라는 스포츠를 즐길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고 있을겁니다. 글쎄요, 미안하지만 그래도 제 눈에는 야구 캐스터를 할 수 있을 정도의 열정이나 도전정신을 보이는 여성 방송인은 아직 없는거 같습니다. 최희 아나운서, 배지현 아나운서 등 예쁘고 능력 있는 아나운서는 많지만 그들이 기존 질서에 부딪히고 깨어지며 남들이 이루지 못한걸 해낼지는 모르겠습니다. 그걸 안해도 훌륭한 방송인은 방송인이죠. 하지만 송지선씨는 그런 열정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야구를 좋아해서'라는게 그러한 도전 정신의 이유가 될 수 있었던 사람이었습니다.




팬으로서 저는 그녀를 좋아했습니다. 아무리 대세가 김석류에서 최희로 바뀌었어도, 새얼굴 배지현이 예뻐보였어도 언제나 저에게 야구장하면 생각나는 그녀는, 야구장에서 가장 믿을 수 있는 그녀는 바로 송지선씨였습니다. 나와 같은 대상을 순수하게 좋아하고 있다는 동질감이 제가 그녀를 특별하게 여겼던 이유일 겁니다. 비록 야구선수는 아니었지만 저는, 그리고 그녀는 야구를 사랑했습니다. 야구 중계를 볼 때마다 생각날겁니다. 승리팀 감독을 인터뷰하는 여성 리포터가 버벅댈때마다 떠올리겠죠. 당당했던 그녀, 어떤 의미에서는 나에게 첫사랑이었던 그 사람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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