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실을 택해야 하는 이유

2011.01.06 01:51

차가운 달 조회 수:4172

 

 

 

 

저는 길을 잘 잃는 사람이 아니에요.

그런데 언젠가 차를 몰고 어딘가로 가다가

완전히 길을 잃고 헤맨 적이 있어요.

약속 시간은 정해져 있었죠.

외곽순환도로를 벗어난 경기도 북부 어딘가였어요.

한적한 시골길이었죠.

오전부터 뜨거운 햇볕이 내리쬐고 있었죠.

이대로는 못 찾을 것 같아서 어느 공터에 차를 세우고 약속한 사람에게 전화를 했어요.

계속 전화를 하는데도 전화를 안 받더군요.

나중에는 전원이 꺼져 있다는 안내가 나왔어요.

중요한 약속이었죠.

돈이 걸려 있는 약속은 언제나 중요해요.

핸드폰과 핸드폰을 발명한 인간을 원망하며 차에서 내렸어요.

 

공터에서 바라본 길 너머에는 연둣빛 논이 펼쳐져 있더군요.

주위에는 그늘도 없고 저는 햇볕을 고스란히 받으며 담배를 한 대 피웠어요.

담배를 피우며 천천히 주위를 둘러보았어요.

정말 개미새끼 한 마리 지나가지 않는 조용한 시골의 오전이었어요.

자기도 모르게 눈을 찡그리게 만드는 환한 빛만이 쏟아지고 있었죠.

 

저는 제가 지나온 길을 바라보았어요.

콘크리트로 포장된, 크게 굽이치는 길을 따라 몇 채의 집들이 있었죠.

그 길을 계속 따라가면 도로가 나오고, 신호등이 나타나고, 톨게이트를 통과한 뒤에는 도시가 나타나는 거죠.

 

왼쪽으로 고개를 돌리면, 아직 제가 가지 못한 길이 나타났어요.

살짝 오르막이었죠.

오르막의 끝에는 크고 무성한 나무들이 있었어요.

묵묵히 그 길을 지키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나무들이었어요.

길은 그 오르막에서 끝나고 그 너머는 보이지 않았죠.

 

보이지 않지만 물론 길은 이어져 있겠죠.

왠지 그곳을 물끄러미 바라보게 되더군요.

궁금했어요, 유치한 비유지만 무지개의 끝을 궁금해하는 아이처럼, 문득 그 너머가 궁금했어요.

그리고 그런 상상을 했어요.

그 길 너머에 조용한 길이 계속해서 뻗어있고, 또 그 길을 따라갔을 때 어떤 조용한 마을이 나타난다면,

상점도 없고 관청도 없고 학교도 없고 버스도 없고 그저 사람이 사는 집들만 있는 마을이 나타난다면.

 

정말 그런 마을이 있다면 그곳에서 살고 싶었어요.

약속도 도시도 가족도 친구도 모두 버리고 그냥 조용히 살고 싶었어요.

무엇을 위해 사는지 묻는 일도 없이 그냥 조용히 살고 싶었어요.

 

그럴 수 있을 것 같았어요.

그냥 한번 해보는 생각이 아니었어요.

그대로 오르막을 넘어서면 정말 그럴 수 있을 것 같았어요.

 

한참 동안 그 오르막과 오르막을 지키고 있는 나무들을 바라보았어요.

왠지 꿈을 꾸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들더군요.

우리가 만약 어떤 한 가지 꿈을 선택해 눈을 감고 그대로 그 꿈속에서 살 수만 있다면.

 

핸드폰이 울리기 시작했죠.

잠을 깨우는 알람처럼 말이에요.

전화를 받았어요.

그 뒤로는 더 이상 할 얘기가 없네요.

길을 묻고, 차를 타고, 사람을 만나고,

지금 여기 이렇게 듀게에 글을 올리고 있죠.

 

 

 

 

그런데 말이에요,

제가 그 길에 서서 오르막을 보고 있을 때

누군가가 나타났다면...

그러니까, 누구라도 상관은 없어요.

초록색 고깔모자를 쓰고 지팡이를 짚은 아주 작은 노인이건

힙합모자를 삐딱하게 쓰고 선글라스를 낀 젊은 남자건

몸에 붙는 원피스에 빨간 하이힐을 신은 젊은 여자건

누구라도 상관없이 제 앞에 나타나 이렇게 말했다면...

 

그런 마을이 있어,

그런 마을이 있고 내가 널 거기로 데려다주지.

 

물론 저는 그 말을 믿어요.

그럼 그렇게 해달라고 말해요.

초록색 고깔모자를 쓴 노인이라고 하죠.

노인은 제가 정말 거기서 살 수 있겠느냐고 물어요.

저는 고개를 끄덕이죠.

노인은 저를 물끄러미 바라봐요.

 

그런 마을이 있어,

하지만 그건 꿈속에 있지.

일단 그 마을로 가면 다시는 현실로 돌아가지 못할 거야.

너는 단지 네가 선택한 그 꿈속에서 영영 깨어나지 않고 살아가는 것뿐이야.

 

그렇게 말했다면 말이에요...

어떻게 하시겠어요?

그러니까 내게는 가족이 있고 친구가 있고 직장이 있고, 그런 것들은 잠시 잊기로 하고 말이에요.

우리가 이 현실에 남아야 할 이유가 있나요?

저는 그게 궁금했어요.

 

 

 

 

한참 쓰다 보니 문득 저의 이 의문이 어쩌면 인셉션을 보면서 생긴 것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는 왜 꿈속에서 살지 않은 거지?

사랑하는 부인과 꿈속에서 얼마든지 행복하게 살 수 있었는데 왜 굳이 그녀를 꿈속에서 꺼냈을까?

그 꿈속에서는 꿈과 현실의 차이를 구분하지 못한다면 말이죠.

림보인지 뭔지 그 속에서는 시간이 무한대로 늘어나고 그 무한대 속에서 그토록 사랑했던 자신의 부인과 함께 있을 수만 있다면.

왜 마지막까지 꿈속에서 사는 걸 선택하지 않았을까요.

저는 그게 궁금했어요.


나라면 그러지 않았을 거야, 아니 나라도 그랬을까...

영화를 보고 나서도 그 물음은 떠나지 않았어요.

 

꼭 인셉션 얘기를 하자는 건 아니에요.

그게 정말 궁금해요.

우리가 만약 그런 상황에 놓였다면 어떻게 하시겠어요?

아니, 제가 묻고 싶은 건

우리가 현실을 택해야 하는 이유가 뭘까요?

거기 무슨 의미가 있는 거죠?

피와 살로 이뤄진 실체가 여기 있으니까? 

무슨 말이라도 좋아요.

 

그런 상황에서는 우리가 현실을 택하는 것이 정답처럼 느껴지는 이유는 뭘까요?

그게 제 질문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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