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하루 얘기를 한다면...

2010.12.24 00:06

차가운 달 조회 수:1759

 

 

 

아침에 눈을 뜨고 머리맡의 핸드폰을 보니 좀 늦었더라구요.

바로 일어나려고 했는데 뭔가 좀 이상한 기분이 들었어요. 그대로 잠깐 더 누워서 눈을 감고 있었죠.

어떤 꿈을 꿨다는 사실을 알았어요. 곧 그 꿈의 마지막 부분이 생생하게 떠올랐죠.

이불을 걷고 일어났어요.

샤워를 하고 밥을 먹고 양치질을 하고 옷을 입고 집을 나서는데 정말 뭐라 설명할 수 없는 기분이 들더라구요.

대학 시절에 알던 여자 후배 두 명이 나오는 꿈이었거든요. 

그들은 같이 어울려 다니는 그룹 내에서도 무척이나 친한 사이였죠.

저는 그 둘 중의 한 명을 좋아했어요. 아니, 둘 다 좋아했다고 해야 하나요. 

 

지하철에서 어떤 젊은 여자가 자리를 못 잡고 우왕좌왕하는 모습을 봤어요.

빨간 모직 코트에 청바지를 입고 키가 큰 여자였는데 손에는 메트로 같은 지하철 무가지를 들고 여기저기 기웃거리는 거예요.

다들 어깨를 맞대고 비좁게 서 있는 출근길 전동차에서 마치 어딘가에 숨어 있는 넓은 공간을 발견하고야 말겠다는 듯이 말이에요.

자리에 앉아 있던 누군가가 일어서고, 그 앞에 서 있던 누군가가 그 자리에 앉으면서 공간이 생겼죠.

저랑 여자가 동시에 움직이다 멈칫했어요.

물론 눈이 잠시 마주쳤는데 '왜, 이 자리를 차지하려고?' 소심한 눈빛으로 그렇게 말하는 것 같았어요.

저는 그냥 제자리에 가만히 서 있었어요. 여자는 그곳으로 쏙 들어갔죠.

 

얀 코스틴 바그너의 '어둠에 갇힌 날'을 손에 쥐고 계속 읽었어요.

끝까지 읽어도 별로 재미는 없을 것처럼 보였지만 아무 생각없이 읽기에는 편했기 때문에 그냥 읽었어요.

제가 내릴 무렵에는 전동차 내의 사람들이 꽤 줄어 있었죠.

차창 밖으로 승강장이 매트릭스의 한 장면처럼 나타나고 문이 열리기 전에 슬쩍 뒤를 돌아보니 빨간 모직 코트를 입은 여자는 어느새 자리에 앉아 있더군요.

 

 

컴퓨터를 켜고 자리에 앉으면서 오늘은 왠지 기분이 좋지 않다고 스스로의 상태를 점검하듯 생각했어요.

막연히 기분이 좋지 않다는 것과는 미묘하게 다른 기분이었지만 딱 꼬집어 말할 수가 없었어요.

일단 일을 시작하면 그냥 일만 하는 거죠. 다른 생각을 할 수가 없어요.

그래서 사무실에 있는 동안에 대해서는 별로 할 얘기가 없어요. 가끔 허리가 아프다는 생각은 하죠. 이거 정말 뭐하고 있는 거야. 뭐 그런 생각은 하죠.

 

 

여자 직원이랑 둘이서 늘 가는 백반집에서 점심을 먹었어요.

점심 시간이면 아주머니들은 정신이 없어요. 항상 바쁘죠.

우리보다 늦게 들어온 옆 테이블에 반찬을 먼저 갖다 주더군요.

왜, 기본으로 깔려 있는 반찬 말고 그날그날 바뀌는 맛있는 반찬 말이에요.

언제나 별로 말이 없는 여자 직원은 역시나 조용히 밥만 먹더군요.

저도 그냥 밥만 먹었어요. 밥을 절반 넘게 먹었을 때 아주머니가 반찬을 가지고 왔어요.

자신의 실수를 알고 미안해하는 눈빛으로 조심스럽게 접시를 테이블에 내려놓을 뿐 뭐라고 말은 하지 않더군요.

평소에는 한 공기를 먹고 밥을 조금 더 달라고 해서 먹곤 했는데 오늘은 그냥 한 공기만 먹고 말았어요.

뭔가 즐거운 기분이 들지 않았다고나 할까요.

 

 

기억하는 꿈은 아주 짧았는데 저는 대학시절로 돌아가 있었어요.

그 둘은 저와 아주 친했어요. 그 둘 중의 한 명이랑은 나중에 좀 더 친한 사이로까지 발전했죠.

아, 그러니까 꿈에서 그랬다는 게 아니라 실제로 그랬다는 말이에요. 꿈 얘기가 아니에요.

 

꿈 얘기라고 뭐 특별히 할 것도 없어요. 우리는 그저 강의실에 함께 앉아 있었을 뿐이니까요.

그 둘은 같은 책상에 나란히 앉아 있었어요. 마치 초등학생이 쓰는 책상처럼 기다란 나무책상 말이에요.

요즘도 그런 책상을 쓰나요? 그건 잘 모르겠네요.

제가 어릴 땐 그런 책상을 썼죠. 바니시가 칠해진 나무로 되어 있고, 군데군데 파인 자국이 있고, 두 사람이 같이 쓰는 책상.

 

두 사람은 그 책상에 머리를 대고 조용히 엎드려 있었어요.

잠을 자는 건 아니었고 그냥 그렇게 있는 것뿐이었죠. 눈은 뜨고 있었어요.

길게 뻗은 선로에 귀를 대고 기차가 오는 소리를 듣는 아이들처럼 말이에요.

꿈속인데도 창으로 햇볕이 따뜻하게 들어오고 있었어요.

그건 참 이상하죠. 그런 꿈은 드물죠.

꿈속의 햇볕이라니.

 

저는 그 두 사람 앞에 의자를 놓고 앉아 바라보았어요. 뭐라고 말을 했어요.

'이제 얼마 남지 않았네' 라고 했는지 '그래서 이제 어떻게 할 거야' 라고 했는지 잘 기억이 나지 않아요.

우리 셋을 그 강의실에 머물게 하는 뭔가가 끝을 맞이하고 있었죠.

뭐라고 할까요,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세계가 저 멀리서부터 천천히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고나 할까요.

그게 뭔지 모르겠어요. 분명 우리 셋을 강하게 결속시키고 있는 뭔가가 있었는데 말이죠.

하지만 기분은 괜찮았어요.

뭔가 따뜻한 기운이 넘치고 있었죠. 그러니 좋은 기분이라고 해야겠죠.

둘 중의 한 명이 뭐라고 대답했어요.

꿈속에서 그애의 입술이 천천히 움직이는 모습을 보았을 때 저는 그 말을 분명히 알아들었어요. 그리고 기억했죠.

샤워를 하고 아침을 먹을 때까지만 해도 기억하고 있었는데...

 

 

개기월식이 있으니 동쪽 하늘을 보라고 하더군요.

아, 꿈 얘기는 끝났어요. 퇴근 전에 옥상에 올라간 일을 얘기하고 있어요.

옥상에 올라가 빌딩들 위로 구름이 가득한 하늘을 한참 바라보았죠.

달은 보이지 않고 구름 위로 가볍게 보라색 물감을 흩뿌린 듯한 노을만 보다가 내려왔어요.

달은 보이지 않더라고 듀게에 댓글을 달았어요.

 

 

퇴근길 지하철 안에서 소설을 다 읽었어요.

결말이 그렇게 마음에 들지는 않았어요. 좋은 소설은 아니라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머릿속에 남아 '그래서 그게 뭐 어쨌다고' 얼굴을 찌푸리고 중얼거리게 만들기는 했죠.

남자는 파란 소형 버스를 타고 친구들과 함께 바다로 여행을 떠났어요.

밤이 찾아온 바닷가에서 남자는 한 여자와 포도주를 마시고, 폭풍이 불어 오기를 기다리고, 또 빗속에서 춤을 추었죠.

세월이 지난 뒤에도 남아 있는 젊은 날의 기억이었어요.

'그래서 그게 뭐 어쨌다고.'

 

 

집으로 돌아와 저녁을 먹고 곧장 자리에 누웠어요.

누워서 음악을 듣고 싶었거든요.

음악을 듣다가 문득 개기월식 생각이 났어요.

옥상은 어두운 밤이었죠. 구름은 사라지고 달이 환하게 빛나고 있었어요.

한참을 바라보았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고, 달은 그저 물로 씻은 듯이 깨끗하고 크고 환하게 빛나기만 했죠.

 

다시 불을 끄고 누워서 음악을 들었어요.

아침에 꿨던 꿈을 밤에 다시 떠올려 보는 건 흔한 일이죠.

더 자세하게 기억나지는 않았어요.

그 둘은 책상에 머리를 대고 가만히 엎드려 있었어요.

마치 선로에 귀를 대고 기차가 오는 소리를 듣는 아이들처럼 말이에요.

저는 그 둘 중의 한 명을 좋아했어요.

꿈 얘기가 아니에요. 제 대학 시절에 그랬다는 말이죠. 

우리 셋은 친하게 지냈어요. 제 생각에는 그래요.

 

같이 점심을 먹고 학교로 돌아가는 길에 비행기가 남긴 하얀 구름을 본 적도 있어요.

아주 높은 하늘에, 그곳은 무척 차가울 것처럼 보였죠, 밝게 빛나는 하얀 구름.

천천히 걸으며 그 구름을 지켜보았어요.

버스가 회차하는 넓은 광장 같은 거리의 카페에서 함께 차를 마시기도 했죠.

건물 이층 어두운 술집에서 맥주를 마시기도 했어요. 수업이 끝난 이른 저녁이었는데 사람은 아무도 없었어요.

모두 망친 건 저였죠. 그 얘기는 자세하게 할 수가 없어요. 너무 복잡하거든요.

처음에 저는 그 둘 중의 한 명을 좋아했는데, 나중에는 그 둘을 모두 좋아했죠. 그건 좀 이상한 얘기죠.

뭐 별 얘기는 아니에요, 그냥 한 번도 연애를 해본 적이 없어서 사람을 좋아하고 사람을 사귄다는 게 어떤 건지 전혀 몰랐던 어리석은 시절의 얘기죠.

제가 처음에 좋아했던 그 둘 중의 한 명과는 아무 사이도 아닌 채 끝이 났고, 다른 한 명은 저와 좀 더 친한 사이로 지내기도 했어요. 아주 잠깐 동안이었어요.

어쨌거나 그 애와도 12월 31일 신천의 어느 포장마차에서 마지막으로 소주를 마시고 헤어졌죠. 그러니까 이맘때네요.

아니, 종로에서 차를 마시고 나와 거리의 사람들과 뒤섞여 사라지는 그 애의 모습을 지켜보았을 때...

별로 중요한 얘기는 아니죠.

 

방학이 끝나고 다시 만나 서먹서먹해진 초등학생들처럼 그해 겨울이 끝나고 우리는 서로 말을 하지 않았어요.

물론 그 둘은 여전히 사이 좋은 친구로 지냈죠. 저는 아니었어요. 정말 한마디도 하지 않았어요.

지금은 다 지나가고 아무 것도 아닌 얘기로 남았죠.

꿈속에 나올 줄은 몰랐어요. 그 둘이 그렇게 책상에 머리를 대고 엎드린 모습으로 나올 줄은 몰랐어요.

 

'이제 얼마 남지 않았네' 라고 했는지 '그래서 이제 어떻게 할 거야' 라고 했는지 잘 기억이 나지 않지만 제가 그렇게 말했을 때 둘 중의 한 명이 뭐라고 대답을 했단 말이죠.

꿈에서 깬 아침에는 기억을 했는데 지금은 까맣게 잊었어요.

정말 모르겠어요, 어쩌면 이렇게 말했을까요?

'쉿, 좀 조용히 해봐요'

그게 기억이 나지 않는단 말이죠. 뭐라고 말했는지 기억은 나지 않고, 그 애가 입술을 천천히 움직이는 장면만 떠올라요. 영상은 언어보다 강한 걸까요.

아무래도 상관없어요. 이제는 아무 것도 아닌 얘기고.

그 둘은 단지 꿈속에 남아 있을 뿐이죠.

따뜻한 햇볕이 드는 책상에 엎드린 채 멀리서 뭔가가 끝나가는 소리를 듣고 있었어요. 그것뿐이에요.

 

 

이틀 전의 얘긴데 그날은 쓰다 잠들어서 오늘 올리네요.

물론 다시 꿈을 꾸지는 않았어요. 계속 이어지는 꿈이 어디 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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