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9.04 22:40
히가시야마 아키라의 [류]를 읽고 잡담입니다. 작가는 대만에서 나서 9세부터 일본에서 산다고 합니다.
읽을 때는 재미있었어요. 읽기를 마치고 나서는 좋기만 하진 않았고요.
예치우성이라는 열일곱 살 소년의 성장 소설이자 시대물입니다. 공간은 대만, 화자인 치우성을 따라가며 전개되는 이야기의 시간은 1970년대 중반에서 80대 중반 십 년 정도가 되겠네요. 하지만 이 작품을 추리물로 분류하게 하는 중심 사건이 품고 있는 시간은 역사적 굴곡을 지닌 긴 시간입니다. 국민당 소속으로 중국에서 건너 온 주인공 할아버지와 친구들이(의형제들!) 살아온 시간은 중일전쟁, 내전, 대만으로 와서 정착하기까지 이어지고 이 할아버지 세대의 시간은 주인공의 성장 과정에 그대로 영향을 줄 뿐 아니라 대를 이어 전해지는 핏줄의 유산을 계승하게 합니다.
매우 활기차고 박력 있고 에너지가 충만한 소설입니다. 이웃이나 가족 사이의 대화인지 다툼인지의 연속, 흔한 웃옷을 벗어젖히고 배를 내놓은 아저씨들과 날라리 친구 땜에 쫓고 쫓기는 사건들과 번화가 노점상 거리에서 첫사랑과의 데이트, 사람을 피해 날아다니는 닭과 출몰하는 바퀴벌레 등등이 글로 읽는데도 뭔가 와글와글시끌벅적합니다. 지금 나열한 이런 장면들에서 활력이 느껴지게 되는 으뜸 이유는 이런 장면들 속에 잔잔히 녹아 있는 폭력성 때문이 아닌가 생각되네요. 이런 장면들의 기저에 다 폭력이 깔려 있거나 대놓고 폭력이 오가고 있거든요. 그냥 일상에서도 부모나 선생은 아파야 배운다며 매질을 하고요, 학교에서도 맞짱뜨기 해야 하고, 군대 가서도 맞고요, 소설의 하이라이트 부분에선 '우리는 피를 흘리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피를 흘리지 않고 도대체 무엇을 증명할 수 있단 말인가?' 라는 매우 중요한 각오를 하기도 합니다. 죽고자(죽이고자) 했더니 제3의 손에 의해 살아났다는 식으로 당사자 둘은 서로에게 직접 피를 내지 않는 식으로 이야기는 마무리가 되긴 하는데, 이 소설 전반에서 폭력의 사용은 당연하고 자연스럽습니다.
위에 쓴 내용들 때문에 현재 나오는 소설과는 다른, 수십 년 전의 소설 같은 분위기가 느껴졌습니다. 이 소설은 일본에서 2015년에 나왔다고 합니다만. 개인이 세대로 이어지는 원한을 품고 복수를 한다는 정서도 그렇지만 소설 전반에 과잉된 가족 중심 서사는 요즘 소설이 중요하게 여기고 다루는 내용과는 거리가 있다고 생각했어요. 그리고 대만은 80년대 중반까지 긴 계엄령의 시대여서 그 즈음엔 생활 깊이 폭력성이 일상화 되었지 않나 생각하기도 했습니다. 70년대 대만이 배경이라 가능했을 혈연 강조와 폭력적 문제해결이라는 배포 있어 보이고 거침없는 요소들이 이 소설을 오히려 신선하게 느낀다거나 요즘 보기 드문 소설적 재미가 있다는 평을 얻을 수 있게 한 큰 이유인 것 같았습니다.
소설은 균형을 잘 잡고 중, 대만, 일본 어느 한쪽에 치우치지 않은 듯 전개합니다. 중국 내전은 먹을 거 주는 쪽에 붙어서 목숨을 이었다는 것이 알만한 이야기이지만 일본 침략기에 일본에 협조한 쪽도 같은 무게로 취급하는 것은 문제를 제기할 수도 있을 듯해요. 원인을 지우고 모두 모두 개인사로 해결하겠다는 것인가라는 생각이 들지요. 마지막에 모 인물의 앞뒤 설명을 들으면 오히려 정당성을 주는 느낌도 들더군요. 안 읽으신 분들에겐 종잡을 수 없는 소리라 이만 줄이겠습니다. 읽는 동안은 재미있었지만 다 읽고 생각해 보니 찜찜함이 없지 않다는 소감이었습니다.
2024.09.05 10:11
2024.09.05 10:50
작가의 현 국적이라든가 상세한 개인이력은 책에 소개된 정도 이외엔 모릅니다만 소설을 다 읽고 나니 한국인이라 어쩔 수 없이 눈에 띄는 부분이 있네요. 나오키 상 심사를 했던 일본의 대표적인 장르 소설가들은 매우 칭찬이 대부분이고 한둘이 앞으로 지켜 보겠음, 정도였어요. 일본 추리소설이 좀 음산, 우울한 분위기인데 반해 이 소설이 가진 활기와 속도감은 좋게 볼 지점이었고 그 안에 역사적 아픔을 담으니 무게감도 있다고 봤겠지요. 그런데 저는 이 소설에서 일본의 시각이 느껴졌습니다.
2024.09.05 10:57
전혀 다른 얘기지만 전에 '고질라 -1'을 보면서 들었던 느낌 때문에 왠지 알 것 같은 기분이 들기도 하구요. 나름 열심히 균형 잡고 일본에게 피해 입은 국가 사람들 거슬릴만한 내용은 다 없애거나 피해가는 이야기였음에도 '결국엔 (타국가에 대한) 지들 악행은 반성 안 하는구나'라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이 소설가의 경우엔 (물론 전 전혀 모릅니다만 ㅋㅋ) 본인이 대만에서 태어나고 자랐다는 점 때문에 본인이 잘 알고 균형 잘 잡을 수 있다고 착각에 가까운 판단을 내리기 쉽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2024.09.05 14:27
네, 작가의 아버지를 통해 여러 가지를 보고 전해 듣고 그랬다는 것 같았는데 가까이 있는 만큼 잘 안 보일 수도 있는 거 같고, 현재 시점에서 균형을 잡는 게 뭐 가장 중요한가라는 생각도 듭니다.
다 미국 탓입니다. 그냥 싸워서 이기지 왜 원자탄을 보내갖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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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만에서 태어나 아주 어린 시절만 보내고 일본으로 건너가 자라서 살고 있지만 여전히 대만 국적을 유지하는 일본인... 이라는 오묘한 정체성이 반영된 이야기일까요. 근데 어쨌거나 일본 이름을 쓰는 사람이 '어느 한 쪽에 치우치지 않은' 포지션을 잡는다면 보면서 불편한 느낌이 안 들기도 어려울 것 같습니다. 그냥 확실한 가해 국가였으니까요. ㅋㅋ 기계적 중립이라는 게 이런 이슈에서는 그렇게 좋아 보이진 않더라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