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 탈주

2024.07.21 12:06

Sonny 조회 수: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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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는 한밤중 내무실에 누워있는 조규남의 얼굴을 정면으로 비춰주며 시작한다. 그는 눈을 뜨고 바로 창문을 빠져나와 조리실에서 도구를 챙기고 철조망 아래의 개구멍으로 도주한다. 그의 행동은 신중하면서도 머뭇거림이 없다. 그렇게 그대로 빠져나가나 했던 그는 이내 지도에 지뢰 자리를 표시하고 다시 재빠르게 부대로 돌아간다.

신속하고 군더더기 없는 도입부다. 그 어떤 대사가 없이도 관객은 주인공이 어떤 사람이고 무엇을 계획하는지는 바로 이해할 수 있다. 규남은 이 부대에서 탈주할 것이다. 영화의 날렵한 편집은 규남의 행동력에 더 기대감을 키운다.

이후 이어지는 전개도 재빠르다. 비가 오면 그동안 세웠던 계획이 물거품이 된다. 동혁운 규남의 탈주계획을 눈치채고 자신도 끼워주라고 애원한다. 자이언티의 양화대교가 나오는 부분에서 영화는 잠깐 질척이지만 이후 다음 단계를 밟아나간다. 이후 동혁은 무리하게 탈주를 시도하고 규남은 그를 붙잡아야하는지 함께 탈출해야하는지 고민한다. 규남은 결국 같은 부대원들에게 붙잡히지만 보위군 리상혁이 그를 영웅으로 포장하면서 일단 위기를 벗어난다. 규남의 탈주, 어그러지는 계획, 실패와 위기의 극복까지 영화는 한달음에 치닫는다. 규남의 결백과 무관하게, 리현상과 국 전체의 안위를 위한 규남의 영웅화 전개도 꼬투리 잡을 곳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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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주]는 20대 북한군 남성이 자유를 꿈꾸며 탈출을 하려는 이야기다. 그럼에도 이 영화는 관객인 대한민국의 사람들을 더 타겟팅한 것처럼 보인다. 영화는 사회적 배경이 되는 북한에 대한 어떤 설명도 생략한 채 시작한다. 내무실에서 곧바로 눈을 뜨며 시작하는 규남의 얼굴은 대한민국의 징병제 아래에서 고통스러워하는 20대 남성들에 대한 은유처럼 느껴진다. 한밤 중 내무실에서 문득 눈을 떴을 때, 여기서 벗어날 수 있는지 상상해보지 않은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이 곳을 벗어나기만 한다면'이라는 가정법으로 미래에 대한 희망을 꿈꾸는 것도 징병제 군생활을 하는 대한민국 군인들의 특징이다. 규남의 탈주는 대한민국에서 군생활을 하는 이들의 가장 불온하고도 보편적인 '탈영'에 대한 욕망을 은근히 건드리기도 한다.

여기서부터 [탈주]의 텍스트는 질문의 꼬리표가 달라붙는다. 이 영화가 북한군 병사만이 아니라 대한민국 청년을 포함한다면, 그 때 영화는 어떤 답을 줄 수 있을 것인가. 영화는 주인공이 머무르는 곳을 폐쇄적 공간으로 놓고 그보다는 자유로운 다른 이상의 세계를 가리킨다. 북한군 청년에게 그 도피처가 남한이라면, 남한의 청년에게 도피처는 어디인가? 혹은 남한의 청년은 도피를 꿈꾸고 실행할 수 있어야하는가? 최선을 다하라는 그 열정적 메시지가 '탈출'이라는 수단과 결합하는 것은 현재의 우리에게 어떤 메시지가 되는가. 오래전 유행했던 "탈조선"의 메시지로 치환되려는 함정을 영화는 빠져나갈 수 있는가.

우리가 도피라는 수단을 의심해야하는 것은 그것이 비겁하다거나 옳지 않다는 것이 아니다. 누군가의 도피처는 그곳에 거주하는 누군가의 현실이자 지옥이며, 그곳에서도 이미 누군가는 다른 곳으로 도피를 꿈꾼다. 즉 도피는 불완전한 희망이자 실패하는 도전이라서 질문해야한다. 그러니까 [탈주]의 규남은 대한민국 청년에 대한 은유로서 다른 질문을 다시 던진다. 북한 청년이 남한으로 탈주한다면, 남한 청년은 이 남한이라는 지옥에서 어디로 탈주할 수 있을까. 혹은 탈주가 과연 최선의 방법인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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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현상이 등장하면서 이 영화는 계급적 문제를 본격적으로 건드린다. 규남의 부자유는 군대라는 체제만의 문제가 아니라 계급적이기도 한 것이다. 현상은 규남을 구해준 뒤 그를 멋대로 다른 고위직의 보좌병사로 정한다. 규남은 이에 억울해하지만 현상은 이를 한마디로 일축한다. "네 앞길을 네가 정하니?" 이대로라면 규남은 영영 이곳에서 다시 병사로서 몇년을 살아야한다. 이 때 구교환의 연기는 꽤나 인상적이다. 보통 상류계급의 폭압적인 면을 묘사할 때 상대를 깔아보거나 조롱하면서 필요 이상으로 비열함을 섞어놓는데, 구교환의 리현상은 규남을 억누르는 게 자연스럽다. 현상은 내가 너를 구해줬으니 내가 너를 챙겨주기도 할 것이라는, 지배계급으로서 선의와 지시에 한 치의 의심도 없다.

여기서 [탈주]는 다시 한번 질문을 던진다. 북한에서 지배계급의 지시를 따르지 않는 것은 굉장한 반항이다. 이것은 명령과 복종이라는 사회 체계가 잡혀있기 때문에 성립하는 저항이다. 그렇다면, 불복종이 커다란 저항이 될 수 없는 대한민국 사회에서는 이것을 어떻게 이해해야할까. 물론 대한민국은 경직된 수직적 사회의 면면이 아직도 강하지만, 그렇다고 지시불이행이 반역죄 정도로 취급받는 이데올로기가 자리잡진 않았다. 규남이 다시 한번 탈주를 시도하는 것이 부자유에 대한 저항이라면 그보다 모든 것을 개인의 책임으로 미루는 대한민국에서의 저항은 어떤 수단이 있을까. 영화는 종종 정치적 질문을 던지면서도 북한의 사회적 배경에서만 성립하는 답변을 던지곤 한다.


그렇기 때문에 그 목적이 한없이 단순한 규남보다, 일정한 자유와 권력을 갖고 있는 현상의 고뇌가 더 와닿을 때가 있다. 이 영화를 보는 상당수의 관객은 일자리나 최소한의 민주적 권리가 보장되어있을 것이다. 그런 상태에서도 제한된 자유만을 누릴 뿐 근본적으로 억눌린다는 느낌은 누구나 갖고 있다. 적당한 권리와 부자유를 누릴 때, 가진 것 없는 자의 도피보다 더 복잡해지는 자유투쟁은 어떤 식으로 이뤄질 것인가. 그런 면에서 현상의 체제순응적인 면모는 더 사실적이다.

이 지점을 가장 잘 설명하는 것은 현상의 성정체성일 것이다. 동성애가 아예 불가한 사회에서 그걸 계속 억누르며 사는 현상의 면모는 대한민국에서도 거의 동일한 부자유를 전달한다. 어쩌면 영원히 모든 사람을 속이며 살아가야하는 그 굴레는 또 다른 고통일지도 모른다. 영화에서 다소 BL스럽게 표현된 것이 아쉬우나 이 설정은 현상이란 인물을 보다 입체적으로 보여준다. 그 역시도 그가 속한 사회를 미치도록 벗어나고 싶은, 오히려 그 자유를 타국에서 맛보았기에 더 지독한 체념을 품고 살아가는 것은 아닌지 궁금하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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액션 장르로서 [탈주]는 작위적으로 어떤 상황들을 뭉개고 간다. 그래서 규남이 위기를 벗어나는 장면들은 이따금씩 의아하다. 규남과 동혁이 하필 유랑민 부대를 만나는 우연부터, '특급 살수'로 그려지는 보위부 병사들이 왜 총소리 한번에 규남 일행을 포위하던 것을 멈추고 일제히 이동하는지, 그 직전까지 머물렀던 부대에 어떤 변장도 없이 그저 방탄모만 썼다고 잠입해서 같은 부대원들의 추적을 피할 수 있는지, 영화에서 내적으로 설명되지 않는다. 이런 부분은 이 영화를 어떤 장르에 더 중점을 뒀는지에 따라 감상일 달라질 수도 있을 것이다. 나같은 사람들은 구교환의 리현상에 취해 이 영화의 어떤 구멍들은 크게 신경쓰이지 않았으니까. (그런 면에서 영화가 현상이란 캐릭터를 세워두고 리얼리티로부터 탈주를 잘 한다는 인상도 받는다)


그런 구멍속에서도 현상의 캐릭터는 대단히 매력적이다. 단순히 성격 나쁜 도련님에서 멈추지 않고 리현상은 그만의 관찰력이나 분석력으로 규남을 몰아붙인다. 이 부분에서 구교환의 연기는 단순히 '똑똑함'을 벗어나 엘리트 계급 캐릭터로서 영민함과 오만함, 그리고 배우 자신에게서 흘러나오는 섬뜩함이 합쳐진 연기로 긴장을 불어넣는다. 규남이 조명 옆의 현상을 노려볼 때 언더독으로서의 의지를 내비춘다면, 현상은 순진한 반항아를 용서하지 않겠다는 그런 의지를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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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찌저찌 규남은 지뢰밭을 건너 남쪽으로 가는데 거의 성공한다. 현상은 규남을 추격하려 하지만 바로 옆에 있던 부하가 지뢰를 밟고 다리가 날아가면서 잠시 추격을 멈춘다. 이제 영화는 치밀한 액션보다는 드라마에 더 몰두한다. 규남의 무모한 의지 앞에서 어떤 현실적 조건들은 그래도 애쓰면 극복이 되는 그런 무엇이 된다. 이것을 영화의 드라마적 타협이라 볼 수도 있을 것이고 혹은 처음부터 하고 있는 이야기를 이제 더 감정에 집중해서 하고 있는 것이라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이후 기어이 뒤쫓아온 현상의 캐릭터가 이 드라마에 대한 냉소를 걷어낸다.

규남은 현상과 싸우지만 경계선 터널에서 남한에 도달하기 직전에 총을 맞고 쓰러진다. 그는 계속해서 기어가지만 현상은 그런 규남의 머리 위로 총구를 겨누고 있다. 현상은 끝내 총을 쏘지 못하고 규남이 남쪽으로 넘어가도록 내버려둔다. 현상이 왜 규남을 죽이지 않았는지, 그 기어가는 모습에서 무엇을 봤는지는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단순한 동정이 아니라 현상 자신도 늘 갈망해왔던 자유에 대해, 혹은 그 자유를 찾기 위한 투쟁 자체에 이미 마음이 동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이것은 단순한 휴머니즘이 아니라 현상이 규남을 통해 겹쳐보는 자신의 모습이다. 나도 원하는 것을 얻고자 하면 결국 해낼 수 있지 않을까. 혹은 거의 쟁취한 나의 무언가를 내가 끊어버려도 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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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을 규남 개인의 투쟁기로 본다면 에필로그까지 어느 정도 납득할 수 있다. 그러나 북한사람의 캐릭터가 남한에 가서 행복해진다는 이 이야기를 남한 시민으로서 온전히 납득하기는 쉽지 않다. 오히려 이것은 북한 사람인 너희는 그래도 남한에서 사는 게 감지덕지해야할 일이라는, 남한의 자아도취적인 태도가 아닐까? 의도한바는 아니겠으나 영화는 에필로그에서 '북한보다는 살기 좋은 남한'이라는 극우보수적 프레임에 빠지고 만다. 영화는 질주하는데는 성공했으나 탈출이라는 수단에 대한 대답은 하지 못한채 happily ever after의 문구로 끝이 뭉개졌다. 북한 청년이 남한으로 탈주할 수 있으면, 남한 청년은?

[탈주]의 텍스트는 미완으로 끝났다. 그럼에도 리현상이란 캐릭터에 대한 질문이 계속 맴돈다. 그의 과거는 어떠했으며 미래는 어떠할까. 규남과 얽히지 않은 개인으로서의 그는 어떤 욕망과 원칙으로 자신을 움직이는 것일까. [말죽거리 잔혹사] 이후 한 캐릭터의 최면적 매력에 이렇게 홀리게 될 줄 몰랐다. 리현상을 주인공으론 놓고 볼 때 [탈주]는 훨씬 더 흥미로워진다. 독립영화의 신성으로 늘 가능성이 점쳐지던 구교환이 이렇게 상업적 성취를 이뤄낼 줄은 몰랐다. 이 영화를 기억하는 방식은 제각각 다르겠지만 나는 구교환의 얼굴로 기억한다. 어떤 영화는 완성도보다도 매력이 더 치고 나가며 마음에 박히는 경우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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