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펜하이머 Oppenheimer

 


미국-영국, 2023.           ☆☆☆       


A Syncopy/Atlas Entertainment/Gadget Films Co-Production. Distributed by Universal Pictures. 3시간, 화면비 1.43: 1 (IMAX 70mm), 1.90:1 (IMAX Xenon), 2.20:1 (70mm Digital), 2.35:1 (35mm, 65mm). 


Director & screenplay: Christopher Nolan. Based on the book by Kai Bird & Martin J. Sherwin, “The American Prometheus.” 

Cinematography: Hoyte van Hoytema.  Producer: Emma Thomas, Christopher Nolan, Charles Roven. 

Editor: Jennifer Lame.  Music: Ludwig Göranson. Production Design: Ruth De Jong. 

Costume Design: Ellen Mirojnick. Special Effects: Andrew Jackson, Scott Fischer, Mick Chambers. 


CAST: Cilian Murphy (로버트 오펜하이머), Robert Downey Jr. (루이스 스트로스 제독), Emily Blunt (키티 오펜하이머), Matt Damon (그로브스 장군), Tom Conti (알버트 아인슈타인), David Krumholtz (이시도어 라비), Florence Pugh (진 태틀록), Gary Oldman (트루만 대통령), Kenneth Branagh (닐스 보어), Benny Safdie (에드워드 텔러), James Remar (스팀슨 국무장관), Jason Clarke (로저 롭), Casey Affleck (패쉬 대령), Macon Blair (로이드 개리슨 변호인), Alden Ehrenreich (스트로스의 보좌관), Matthew Modine (배너바 부시), James D’Arcy (플러켓), Maté Haumann (질라드), Josh Hartnett (어네스트 로렌스), Rami Malek (데이빗 힐), Jack Quaid (리처드 파인만), Tony Goldwyn (그레이), David Dastmalchian (보든), Dane De Haan (니콜스). 


OPPENHEIMER- I THINK WE DID IT ALREADY 


[오펜하이머] 가 인류 역사상에 남을 걸작인지는 솔직히 모르겠습니다. [다크 나이트], [인셉션], [인터스텔라] 그리고 [오펜하이머] 중 하나나 두 작품 정도는 아마도 내가 죽은 다음에도 오슨 웰즈, 앙리 조르주 클루조 또는 알프레드 히치코크의 명작들과 동류의 대접을 받는 “걸작” 으로 살아남게 될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긴 합니다. [오펜하이머] 가 그런 대접을 받을 수 있을지 의문이 든다면, 그것은 이 한편이 [덩케르크] 의 계보를 잇고 있는 “사극” 이며, 후자가 영국인들의 역사의식과 국가적 정체성에 직접적으로 호소할 수 있었던 것과 동일한 방식으로 미국인들의 그것들에 뿌리를 내리고 있는, 기본적으로 “로컬” 한 한편이라는 이유 때문일 수도 있겠습니다. 당연한 말이지만, 그 때문에 미국인들이 아니면 근본적인 이해가 불가능한 작품이라던지 그런 투의 주장을 하려는 것은 아니고요. 기가 질릴 정도로 뛰어난 역사의식과 과학자라는 존재에 대한 심도있는 이해에 기초를 둔 한편이긴 하지만, 모든 놀란 작품들이 그렇듯이 장르적 테크닉과 스타일을 구사하는 데에는 거리낌이 없습니다. [다크 나이트] 가 수퍼히어로 영화라는 서브장르의 울타리를 짓이겨버렸던 것처럼, [오펜하이머] 는 “전기적 사극” 이라는 형식을 근본적으로 해체하되 원래 그러한 전기적 사극이 지향해야 했던 바인 목표와 과제를 여느 전기적 사극들보다도 몇 배 더 훌륭하게 수행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그러나 [오펜하이머]의 궁극적 명성과 “역사적” 평가가 어찌 되었건, 이 한편을 만든 크리스토퍼 놀란이 현존하는 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영화 예술가 중 하나 (어쩌면 그냥 가장 위대한 영화 예술가. 피리오드)라는 사실에는 의문의 여지가 없습니다. [오펜하이머]가 오스카상을 하나도 못 받았어도, 돈을 하나도 못 벌고 폭망했어도— 실제로는 2024년 5월 현재 글로벌 박스오피스 성적은 대략 9억7천6백만달러라고 하고, R등급을 받은 미국 영화중 역대 2위의 히트작이라고 합니다 (아이맥스상영으로만 1억9천만달러를 벌었다고 함)— 이 사실에는 아무런 타격을 주지 못했을 것입니다. 이제 놀란을 빼놓고 21세기의 영화를 논할 수는 없게 되었고, 결국 놀란이 줄기차게 주장해왔던, “관객들이 지분거리고 낄낄거리면서 곁눈으로 관람을 해도 괜찮을 허술한 부위가 한 군데도 없는, 주로 캐릭터들의 대화로 진전되는 세 시간짜리 시대극” 이라도 제대로만 만들면 수백 수천만의 관객들이 극장에 와서 웃돈 내고 볼것이다, 스펙터클과 진실된 드라마는 전혀 대치되는 개념이 아니다, 두 마리 토끼 아니라 두 마리 코끼리라도 얼마든지 잡을 수 있다, 등의 (스마트폰으로 영화 보는 세상이 왔다 어쩌구 하는 “앞서가는” 나불이들한테서 욕을 퍼먹어 온) 방향성이 세상 돌아가는 꼬라지를 제대로 파악하고 있었음을 증명해 낸 셈입니다. [오펜하이머] 를 감상하기 전에는, 이 한편이 그냥 수준높은 전기영화— 한국에서 무슨 안중근 세종대왕 주인공의 사극 만드는 그런 수준이 아니라, 지금까지 한국에서 만들어진 것보다 몇 단계 더 뛰어난 “전기영화” 를 상정하고 하는 말임— 로 귀결될 가능성에 대해 약간의 의구심이 들었습니다만, 보기 시작한지 15분 만에 그런 어리석고도 쓸데없는 생각은 눈 녹듯이 사그라져 없어져 버렸습니다. 


물론 이 말은 [오펜하이머] 가 로버트 오펜하이머라는 과학자의 커리어와 삶, 그리고 정신세계에 관심을 두지 않는다는 뜻은 아닙니다. 영화를 보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놀란의 접근 방식은 서사의 중심에 어떤 인물을 배치해 놓고 그 인물을 하나의 에니그마, 또는 텅 빈 (내용을 전혀 알 수 없는) 공간으로 다루면서 시대상과 주제를 그려내는 소위 “예술영화” 스러운 전기영화의 그것과는 완연히 다릅니다. 26년을 미국 대학의 강단에 서 온 역사학자로서, 이 한편에서 다른 모든 요소들보다 우선적으로 감탄스러웠던 점은 놀란이 킬리언 머피가 연기하는 오펜하이머 (동료들로부터 “오피” 라는 애칭으로 불리웠던) 의 극도로 사적이고 개인적인 삶의 궤적과, 그가 “과학자” 라는 집단의 일원으로써 참여했던 20세기 중반부의 격동하는 정치-사회-문화적인 흐름의 균형을 맞추어내는 방식이었습니다. 이런 균형감각을 우리가 “역사의식” 이라고 불러야 할 것이지만서도, 대~ 한민국 (미합중국도 사실 나을 거 없지만) 에서 보통 “역사의식” 이라고 일컬어지는 것들은 이런 감각하고는 관련이 없습니다. 


이러한 시각에서 고찰하자면, 놀란의 “교차편집” 이란 단순히 서사에 긴장을 가져다주고 지루함을 봉쇄하는 감각적인 기술을 까마득히 넘어선 자리에서, 한 개인의 사상, 행위— 할 수 있었는데 하지 않은 것들과 하지 말았어야 하는 데 했던 것들— 그리고 감정— 즐거움, 성취감, 슬픔, 회한, 그리고 문득 덮쳐오는 실존적인 고뇌— 을, 도저히 그 전모를 파악할 수 없는 거대한 역사적인 수레바퀴의 움직임에 연동시키는 뛰어난 테크닉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메멘토], 아니 데뷔작인 [팔로우잉] 때부터 연마한 놀란의 이러한 수법은 이제 그 “형식” 과 “내용” 이 합일되어 그 결합의 모양새를 우리가 함부로 떼어내어 분석할 수 없는 경지에 이르렀다고 생각합니다. 로저 이버트가 언젠가 [시민 케인] 에 대해 언급하면서 오슨 웰즈의 걸작을 아무리 여러번 봐도, 다음 장면에 무슨 일이 벌어질 것인지 아무리 열심히 미리 예습을 해놔도, 결국은 마치 영화를 처음 보는 관객인 것처럼 그 서사에 장악당한다는 식의 말씀을 한 적이 있는데, [오펜하이머] 도 마찬가지입니다. 


루이스 스트로스의 (청결한 와이드스크린 흑백 화면을 통해 한 시대 전의 헐리웃 대작을 연상시키는 모습으로 구현된) 의회 청문회의 일부시종, 오펜하이머가 치욕스러운 방식으로 국가안보관련 정보를 취득할 자격을 박탈당하는 (훨씬 더 좁은 화면비에 거칠고 적나라한 색조로 묘사되는) 그레이 패널의 전개, 맨해턴 프로젝트에 연루되기 전의 학생 그리고 젊은 연구자 시절의 오펜하이머의, 영국과 미국의 여러 지방을 넘나들면서 발가벗은 모습을 드러내는 사생활의 그것도 포함한 삶의 모습, 그리고 수많은 인물들이 동원되어 벌어지는 맨해턴 프로젝트의 장대한 전모, 이러한 몇 가지의 서사들이 중층적으로 동시진행을 하는 와중에서도, 놀란은 필요한 때에 어떤 서사의 어떤 부위를 강조할 것이냐 하는 액선트와 높낮이의 통제에 있어서 일말의 흐트러짐이 없습니다. 


그리고 이 글을 혹시 읽으시는 젊은 분들 중에서 문화-예술 분야에 종사하시거나 진입을 생각하는 분이 계시다면 빌어먹을 “오리지널리티” 타령은 제발 쓰레기통에 처넣으시기 바랍니다. 놀란 정도의 레벨이 되면 이딴 “오리지널리티” 논쟁은 1 옹스트롬 사이즈의 의미도 없습니다. 남들이 이미 써먹은 테크닉이라도 걔네들보다 더 잘하는데 어쩔거여? 야구나 축구라는 종목을 어느 나라가 발명했던지, 그거 가지고 “종주국” 행세하면서 지네들은 야구 축구 지지리 못하는 주제에 다른 나라 사람들을 깔보면 세상에 그런 비참하게 쪼다스럽고 열등감에 쩔은 짓거리가 없겠죠잉? 


OPPENHEIMER- IGNITING ATMOSPHERE 


놀란이 오펜하이머의 “과학적 상념” 을 시각-음향화하는 수법도 이미 다른 데에서 써먹힌 것들이 많습니다. 스티븐 호킹의 일대기이고 역시 에드 레드메인의 출중한 연기를 감상할 수 있는 [Theory of Everything] 에서도 호킹이 커피잔에 담긴 커피가 떠도는 모습에서 원자와 전자의 움직임을 연상-“공상” 하는 (이것도 내가 누차 한 얘긴데 SF 는 공상과학 맞고, 싸이엔스 픽션의 “싸이엔스” 오라지게 찾지 마시길 바랍니다) 시퀜스 등에서 본 기법이 오펜하이머의 학구 시절을 다룬 시퀜스등 여러 개소에서 사용되고 있죠. 빛으로 만들어진 점들과 줄 (band) 들이 폭발적인 음향과 더불어 진동하면서 시계를 압도하고, 또 깨진 유리잔의 미세한 조각들이 우주를 구성하고 활강 (滑降) 하는 입자들로 변모하는 그런 (얍살한CGI 를 될 수 있는 한 배제하고 고전적인 방식으로 촬영된) 특수효과들은 그러나 그 역동성과, 무엇보다도 루드비히 괴란슨의 너무나도 훌륭한 스코어와의 유기적인 연관성을 통해 다른 작품들에서는 느낄 수 없었던 박진감과 아름다움을 시전하고 있습니다. 놀란 작품들이 다 그렇지만, 특히 장르적인 설정이 의도적으로 배제된, “실제 있었던 이야기” 를 그린 [오펜하이머] 에서야말로, 거의 모든 시퀜스의 영상과 음향이 그 자체만으로도 감동에 가까운 감정을 불러 일으키고, 놀란이 이러한 장르적이고 판타지적인 구상을 통해 연마했던 기법들의 정수 (精粋) 를 제대로 관상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또한, 놀란은 “외국인” 이긴 하지만 그가 처음으로 미국 역사를 정면으로 다룬 [오펜하이머] 에는 국외자의 시점에서 아이러니칼하게 미국 사회나 문화를 비꼬아 바라보는 시각이 전무합니다. 이 한편을 처음 보았을 때, 나는 놀란이 오펜하이머와 이 한편의 “빌런” 으로 설정되었다고도 할 수 있는 루이스 스트로스, 키티 오펜하이머와 그의 애인이었던 진 태틀록 등의 캐릭터들을 그 수많은 문제점과 과오들에도 불구하고 공감과 감정 이입을 할 수 있는 인물들로 그려내고 있다는 점에 새삼스럽게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되풀이해서 말하지만 나는 제작자-감독으로서의 놀란의 가장 뛰어난 능력중의 하나가 캐스팅의 센스라고 생각합니다. [오펜하이머] 의 캐스팅 디렉터를 새삼스럽게 찾아보았는데 John Papsidera 라고 하는 분이고 주로 조너선 놀란과 일급 TV 시리즈 ([웨스트월드], [Fallout] 등) 에서 호흡을 맞춘 분이네요. [오펜하이머] 에서는 로스 알라모스의 과학자-연구원들, 그로브스 장군 휘하의 군인들, 청문회와 워싱턴의 정치인 써클에 모이는 각종 인물들에 이르기까지 캐스팅에 구멍이 전혀 없습니다. 물론 따지고 들자면, 맷 데이먼이 맡은 레슬리 그로브스 장군 (퇴역후에 중장으로 승진한 모양인데 맨해턴 프로젝트 당시에는 별 두개 소장이었던 것 같습니다) 의 묘사가 내가 받은 전기적 정보를 통해 받은 좀 더 지적이고 계산적인 인물의 인상— 그런 면에서는 폴 뉴먼이 연기한 [Fatman and the Little Boy] 의 그로브스에 더 가깝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만— 에서 약간 어긋나 있다던지, 그런 소소한 시비를 걸 수는 있겠죠. 


언제나처럼 사상적인 측면에 대해 얄팍하게나마 한마디 하자면, [오펜하이머] 를 가로지르는 주제의 축의 하나는 “과학자” (넓게는 “지식인”) 라는 존재의 위상과 그들이 “군사적인 힘” 과 “정치적인 힘” 을 행사하는 “전문가” 집단들과 어떻게 맏물려 돌아가며 현존하는 세상의 정치-사회적 구조를 형성하고 있는가에 대한 고찰이라고 보여집니다. 영화중 대사에도 나오지만, 놀란은 오펜하이머가 자신과 맨하탄 프로젝트 팀의 멤버들을 “이론가 (theorist)” 라고 호칭하면서, 그 이론들이 실제로 구현되었을 때 이것을 어떻게 다룰 것인가는 “우리”의 책임의 범위에서 벗어난 것이라고 우기는 그런 주장에 대해 비판적이고, “실제 역사” 에서는 이러한 뛰어난 이론가들이 구체적으로 이론의 “현실화” 과정의 모든 측면에 관여했다는 것을 극명하게 보여줍니다. 오펜하이머나 다른 등장인물들이 유시 버클리의 F. A. E. C. T 같은 조직과 공산당에의 연루 관계를 집요하게 추궁당하는 장면들에서도 오펜하이머의 윤리적 타협성이나 그의 출중한 리더십을 어느 한쪽만 조명하는 대신에, 이러한 우리가 해석하기에는 그를 도덕적으로 재단하는 근거로 쓰이기 십상인 제재들이 사실은 유기적으로 엉켜있었다는 역사적 관점을 뚜렷하게 제시합니다. 이제는 영어 관용구에서 “카드를 가진” 이라는 수사만 남아서 사용되는 “card-carrying communist 카드를 가진 공산주의자” 라는 표현이 얼마나 사람들의 인생을 파멸시키는 마녀사냥의 문구였는지 [오펜하이머] 처럼 똑똑히 보여주는 작품은 기억에 없습니다. 무슨 이념적인 대대적인 메시지보다도 이런 거의 놓치기 쉬운 디테일에서 작가의 역사의식이라는 것이 명확하게 보이는 것이지요. 


또한 놀란은 맨하탄 프로젝트의 팀들 사이에서도 원자폭탄의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의 투여 여부를 놓고 첨예하게 의견이 갈리고 있었고, 오펜하이머가 “알면서도” 세계를 파괴할 수도 있는 무기의 개발을 “정당화” 했다는 것을 의심의 여지가 없이 명료하게 보여줍니다. 그러나 스트로스 청문회 등의 시퀜스에서는 “과학자” 들이 정치가들과 정책 입안자들에 맞서서 더 대국적인 시야를 취하는 그런 모습도 담겨있지요. 더도 말고, 나는 지금 대학교에서 물리학자나 생물학자 등의 과학자, 아니면 대기업에 취직해서 과학기술 연구원이 될 것을 꿈꾸는 젊은 분들께 꼭 [오펜하이머] 를 보실 것을 추천드리고 싶네요. 더럽고 치사하고 위선적인 부분, 그리고 지성과 이해를 통해 초월적인 진실에 근접하는 경외스러운 부분도 다 아울러서 포함하는, 정형화되지 않은 그들의 “본연의 모습” 을 영화라는 대중매체를 통해 볼 수 있는 진짜 얼마 안되는 기회라고 생각합니다. 


놀란의 지금까지의 작품들을 보자면, 아마도 맨하탄 프로젝트에서 처음으로 원자폭탄의 지상에서의 폭파에 성공하는 테스트 시퀜스가 이 작품의 클라이맥스에 놓여질 것을 기대하셨을 분들도 계셨을 지 모릅니다. 이 시퀜스는 확실히 극장에서 관람하면 관객들을 틀어쥐고 놓아주지 않는 공력을 발휘합니다만— 실제 폭발의 빛이 보인 몇 초 후에 충격파가 먼데서 관찰하는 연구원들과 군인들을 강타하는 “과학적으로 적합한” 묘사와 더불어서 말입니다. 물론 실제 원자폭탄의 폭발에서는 주관적으로 여러 사람들이 경험하는 시간의 단락이 중층적으로 겹쳐지는 “예술적” 인 편집기법이 사용되고 있지만— 놀란은 여기에서 이때다 하고 온갖 특수효과를 동원해서 아마게돈의 영상을 보여주는 그런 천박한 짓거리는 당연히 하지 않습니다.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서 투하된 이후의 원자폭탄의 참상을 오펜하이머의 주관적 심상속의 “환영” 이외 직접 보여주지 않는 것도 마찬가지 의도입니다. 놀란이 이 상황을 무시하고 넘어갔다는 비판은 그냥 영화를 봐도 뭘 봤는지 모르는 사람들의 헛소리에 지나지 않고요. [다크 나이트] 의 실질적인 클라이맥스가 조커와 배트맨의 액션 대결이 아닌 투 페이스가 “이 세상은 결국 운 (運) 에 의해 움직이고 있으며 선도 없고 악도 없다. 착각하지 말라” 라는 철학을 두고 고든, 배트맨과 대사를 나누는 “연극적인 일막” 이라는 것을 봐도 알 수 있듯이, [오펜하이머] 의 전편을 관통하는 주제의식의 가장 명료한 발현은 톰 콘티가 연기하는 아인슈타인과 오펜하이머의 (그리고 스트로스가 “정치적” 인 형태로밖에 해석할 수 없었던) 대화 장면에 있다고 할 수 있고, 그 사실이야말로 이 한편이 실제로 어떤 영화인가 그 성격을 잘 보여준다고 생각합니다. 


결론적으로, [오펜하이머] 는 실제로 해놓은 아무리 안티들이 깎아내려도 부정할 수 없는 어마무시한 기술적-사상적-예술적 성취보다도, 이 한편이 의도적으로 무시하고 피해간 뻔하고도 예상의 범위에 들어갔던 선택지들을 통해서 그 진정한 예술적 위상을 가늠할 수 있는 그런 한편입니다. 놀란이 뭘 하던지 마음에 안 드시는 분들도 계시겠지만, 위에서도 말했듯이 “과학” 이니 “예술” 이니 “문화” 니를 입에 달고 뭔가를 말하거나 쓰거나 하려는 분들은 그냥 그의 진보성 (당신들보다 앞서나갔다고. 그런 면에서 “진보”) 과 출중한 “역사의식” 을 마음을 열고 받아들이시기 바랍니다. 


OPPENHEIMER- ISOTOPE


극장 관람 당시에 천명 좀 남짓한 큰 극장에 꽉 들어찬 관객들의 (유시 버클리의 로렌스 연구소 이름을 남긴 어네스트 로렌스 교수가 비교적 중요한 역할로 등장하는 등 북캘리포니아 주민들에게는 특히 의미있는 장면이나 설정들이 꽤 나오는 작품이라는 것을 고려에 넣고서라도) 열렬한 반응을 음미하면서 관람했는데, 유니버설에서 출시된 4K UHD 블루 레이는 시각적인 측면 뿐 아니라 그 음향효과와 위에서도 언급했지만 루드비히 괴란슨의 음악을 압도적인 디테일 및 임양감과 더불어 전달해 줍니다. 극장에서 보는 것과 매치는 될 수 없지만, 웬만한 블루 레이나 스트리밍 서비스 따위는 아예 상대가 안되고요. 지금까지 내가 구입한 4K UHD 안에서도 다섯 손가락 안에 들어가는 퀄리티입니다. 아마존에서는 일반 블루 레이보다 4K UHD 가 값이 더 싼데, 아직껏 포케이로 안 갈아타신 분들께는 [오펜하이머] 를 계기로 한 번 시도해 보심직도 합니다. 


내가 구입한 판본에는 오디오 코멘터리나 그러한 통상적인 서플은 일체 없고, 따로 서플만 들어있는 블루 레이 디스크에 1시간 13분짜리 메이킹 오브 도큐, [오펜하이머] 공개에 맞추어 따로 제작된 (!) 1시간 27분짜리 오펜하이머와 맨하탄 프로젝트에 관한 도큐멘타리, 65mm 흑백 필름을 사용한 촬영분에 대한 8분짜리 소고, 예고편 모음집이 수록되어 있습니다. 그 중에서도 내가 내용적으로 압도된 서플은 저널리스트 처크 토드가 사회를 본 미국 TV시사 프로그램 [Meet the Press] 특별판에서 놀란이 35분 가량 다른 패널리스트와 대화를 나누는 내용입니다. 그 패널리스트의 멤버는 영화 관계자들이 전혀 아니고, 놀란을 제외하면 과학 저널리스트이자 [American Prometheus] 의 원저자인 카이 버드, [인터스텔라] 에서도 놀란의 자문역을 했던 칼테크의 물리학자 킵 손, 현재 로스 알라모스 국립과학연구소의 소장인 톰 메이슨, 현금 캐나다 거주중이고 이탈리아 출신의 이론 물리학자이며 퀀텀 그래비티 연구의 대가인 카를로 로벨리 등의 과학자-과학 전문가들이 대거 등장해서 [오펜하이머] 의 주제와 역사적 사실, 과학적 함의 등에 대해 토론하는데, 이 과학자분들이 놀란과 그의 작품에 대해 보여주는 존중심의 표출 만으로도 저는 거의 눈물이 날 정도로 감동을 받았다고 고백합니다. 


놀란이 스스로 집필한 각본에서 가장 “영화적” 이고 “드라마틱” 한 부분은 그가 “만들어낸” 게 아니고 실제 존재하는 기록에서 거의 고대로 가져온 것이다 (놀란이 든 예는 캐더린/키티 오펜하이머가 그레이 패널에서 검사측의 사적인 심문에 대해 표독스럽고도 위트가 있는 가시돋친 반응으로 일관하는 시퀜스입니다) 는 사실, 카이 버드가 자신의 원작에는 스트로스 청문회에는 깊이 들어가지 않았지만, 영화 제작 당시에 놀란이 각본을 쓰기 위해서 스트로스 청문회의 속기록을 처음부터 끝까지 다 읽었다 (!) 는 사실을 깨달았다는 사실, 핵무기의 “전쟁억지력” 에 대해 메이슨 박사와 로벨리 박사의 상충되는 의견, 킵 손 박사의 안드레이 사하로프 등 소련 과학자들과의 유대 등의 경험에서 우러난 과학이 사람들을 나눌 수도 있고 불러 모을 수도 있다는 성찰 등, 그야말로 이 35분짜리 패널의 내용을 듣기 위해서만 2만몇천원의 돈을 쓰는 것이 전혀 아깝지 않습니다. 이런 학구적이면서도 영화예술에 대한 존중심이 넘쳐나는 내용이 그냥 “서플멘트” 로 끼워져 있다니, 사치스럽기 그지 없고 솔직히 부러움에 배가 아픕니다. 유니버설의 [오펜하이머] 4K UHD 블루 레이에는 당연히 수 (秀) 등급을 드리고, 수 플러스 같은 등급을 따로 만들고 싶을 정도의 최고의 디스크라는 것을 강조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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