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5.04 23:21
- 2022년작입니다. 런닝타임은 1시간 57분이구요. OTT에 무료로 있는지는 모르겠고 전 지니티비로 봤어요. 스포일러는 마지막에 흰 글자로.
(쌀소년, '라이스보이'는 주인공 아들래미가 학교에서 애들에게 놀림 당할 때 불리는 별명입니다. 어감은 귀여운데...;)
- 바다의 일출을 보여주며 무슨 동화 같은 톤의 나레이션이 나와요. 고아였지만 씩씩하게 자란 소영이라는 여자가 어쩌다 뜨거운 사랑을 해서 애도 만들었는데, 멘탈이 안 좋았던 애 아빠가 자살을 해버렸네요. 그런데 당시 한국 법으론 미혼모가 자기 자식을 자식으로서 호적에 올리는 게 안 됐나 봐요. 그래서 한국을 떠나 캐나다로 과감하게, 아들과 단 둘이 떠나는 선택을 하는 소영이구요.
배경은 1990년 캐나다입니다. 그래서... 젊은 미혼모 소영이 어린 아들 동현을 데리고 이민을 와서 이런 고생 저런 고생 하며 살아가는 이야기입니다. 이 외엔 특별히 스포일러 없이 얘기할만한 게 없네요.
(제목은 라이스보이의 차지지만 이야기의 주인공은 엄연히 엄마입니다. 아들래미 입장에서 바라 본 엄마의 인생. 뭐 그런 거죠.)
- 연도를 보면 아시겠지만 '패스트 라이브즈'보다 먼저 나왔고 이 또한 호평을 받은 영화지만 그렇게 화제는 되지 않았어요. 하지만 어쨌든 평가는 아주 좋은 편이고. 예전에 듀게에서 후기 글도 읽었던지라 기억해 뒀다가 내친 김에(?) 봐 버렸네요.
(이야기의 소재를 알고 보면 그냥 딱 봐도 참 갑갑하고 우울하고 힘들어 보이는 짤입니다.)
- 근데 거의 연달아... 비슷하게 닮은 소재 영화 두 편을 보고 나니 자꾸만 비교를 하게 됩니다. ㅋㅋㅋ 이 둘이 또 소재만 비슷하지 되게 달라서요. 재밌게도, 이 쪽에 없는 게 저 쪽엔 와장창 있고, 그 반대도 그렇고 뭐 이런 느낌이었습니다.
그러니까 '패스트 라이브즈'를 보면서 한 가지 살짝 신경이 쓰였던 부분이 있었는데요. 이런 류의 이민자 이야기라면 필수적으로 들어갈 법한 부분들이 쏙 빠져 있다는 거였어요. 노라의 이야기에는 인종 차별로 인한 고난도, 경제적 어려움으로 인한 고통도 존재하지 않잖아요. 당연히 창작자의 선택에 의해 배제된 것일 테니 단점이라 지적하긴 뭐하지만... 그 중에서 경제적인 부분은 솔직히 좀 거슬렸어요. 이거 본인이 겪어보질 않아서 그런 건가... 하는 생각이 들어서 말이죠. ㅋㅋㅋ 아직 성공하지 못한 젊은 글쟁이 부부가 뉴욕에 위치한 아담하고 예쁜 집에서 프리한 생활을 하며 자신의 민족 정체성에 대해 사색하는 이야기라니. 폼 나는 건 좋은데 뭔가 좀? 이랬는데 말입니다.
이 '라이스보이 슬립스'는 기본 설정부터 아주 팍팍하지 않습니까. 고아에다가 죽은 남편네 가족과도 의절하고 아들만 데리고 떠나왔으니 기댈 곳이 아예 없습니다. 원래 재산 같은 게 있을 리도 만무하고. 이민 초기부터 영화가 끝날 때까지 주인공 소영은 똑같은 의류 공장 생산 라인에서 일을 해요. 그리고 모자가 함께 내내 인종 차별에 시달리며 고통 받습니다. 그래서 이 이야기는 '사색'이라기 보단 '살아남기'에 대한 이야기에 가까워집니다. 서바이벌!!! ㅋㅋㅋ
그리고 이야기의 끝이 향하는 방향도 거의 정확하게 반대에 가까워요. '패스트 라이브즈'는 결국 한국을 과거의 인연으로 묻어 두고 미래를 향해 나아가는 과정을 그린 이야기... 였다고 생각하는데요. 이 영화는 그렇게 고통 받던 모자가 자신들의 뿌리를 찾으면서 거기에서 위안을 받고 힘을 얻는 식의 이야기로 흘러갑니다. 역시나 폼 나는 건 전자입니다만... 아, 아무 것도 아닙니다!! ㅋㅋㅋㅋㅋ
(근데 그렇게 가난하고 벅차게 생계 유지하는 것치곤 집은 썩 좋아 보여서 캐나다는 90년대에도 복지가 좋았나... 하는 별 상관 없는 고민을. ㅋㅋ)
- 그래서 이 영화의 전반부는. 그렇게 답답하고 고되고 짠하고 힘든 이야기로 흘러갑니다만. 이게 그냥 흔한 수난극으로 굴러떨어지지 않는 건 주인공 소영의 캐릭터 덕분입니다. 어쩔 수 없는 약자지만 어떤 상황에서도 이를 악물고 버티는, 그러면서 자신의 위엄도 잃지 않는 멋진 약자거든요. 직장에서 성희롱을 당하면 바로 상대방에게 죽여 버리겠다고 쏘아 붙이고. 아들이 차별로 불합리한 일을 당하면 야 너 그거 인종 차별이야! 라고 지적하면서 아들에게 고개 숙이지 마! 사과하지 마!! 라고 외치는 강한 여성이에요. 그리고 그걸 연기하는 최승윤씨가 상당히 좋습니다. 일단 무용수 & 안무가로도 현업이신 분이셔서 그런지 대충 추레한 차림을 해놓아도 꼿꼿 단정한 포스가 느껴지구요. 몸짓이나 표정 같은 데서 느껴지는 표현력 같은 게 있어서 역할에 잘 어울렸어요. 아마도 저는 처음 접하는 배우인 듯 한데 앞날을 기대해 보구요.
(비주얼도 좋고 연기도 좋고... 그리고 특이하게도 요즘 세상에 개인 홈페이지를 운영하시더군요. https://www.choiseungyoon.net/)
- 다만 영화의 후반부는 뭐랄까... 좀 호불호가 갈릴 수 있겠단 생각이 들었습니다. 스포일러라서 자세히 말은 못 하겠지만 암튼 중반 쯤에 큰 사건이 하나 벌어지고 후반부는 그에 대한 이야기로 흘러가는데요. 이게 좀 뭐랄까. 많이 통속극 무드입니다. ㅋㅋㅋ 나쁘진 않아요. 톤 조절도 잘 하고 인상 깊은 장면도 있고 마무리도 인상적이고 다 좋은데, 그래도 뭔가 통속극 느낌이구요. 그래서 '로튼 토마토 97%짜리 인디 영화에 이런 통속 무드라니 당황스럽군!!!' 이라는 생각이 들고 좀 아쉽기도 해요.
...하지만 최종적으로 나쁘진 않았습니다. 중반까지 워낙 캐릭터와 정서를 잘 쌓아 놓았고. 그리고 배우들이 끝까지 잘 해주거든요. 그 '통속 무드'도 좀 아쉬우나마 선을 크게 넘진 않구요. ㅋㅋㅋ
(제목의 느낌대로(?) 식사 장면이 참 자주 나오고 또 거기에 의미를 부여하는 이야기입니다. 중요한 순간엔 항상 밥을 먹어요. 한국인은 밥심이니까!!)
- 결론적으로 뭐... 이런 이민자 스토리에 관심 있는 분들이라면 한 번 챙겨 보실만한 수작이었습니다.
이 시절에 무려 필름 카메라로 촬영했다는 포근한 영상미도 좋구요. 음악도 잘 쓰고 이야기도 괜찮고 전반적으로 웰메이드.
분명히 큰 단점이 있는데. 장점들로 그걸 커버하고 최종적으로는 '그래도 보길 잘 했다'라고 생각하게 만드는 영화 정도. 뭐 그랬구요.
다만 후반부 급 커브(?)의 존재는 미리 인지하시고 마음의 준비를 좀 하시는 게 좋을 것 같단 생각은 드네요. ㅋㅋㅋ
어쨌든 잘 봤습니다. 최승윤씨 잊지 않고 지켜보겠어요. 앞으로 더 더 잘 나가시길.
+ 영화의 제목은 여기에서 따왔다고 합니다.
감독이 이야기를 쓸 당시에 꽂혀서 듣고 있던 앨범 제목을 그대로 갖다 쓴 파렴치한 작명이라고. ㅋㅋㅋ
이건 또 무슨 뮤지션인데? 했는데 알고 보니 '시규어 로스' 멤버가 만든 팀이라는군요. 호기심에 눌렀다가 앨범을 통째로 다 들었습니다. 좋네요.
++ 감독님은 여기 직접 출연도 하세요. 주인공 소영의 남자 친구로 나오는데, 찍으면서 역할에 과몰입하셨는지 그만 촬영 종류 후 결혼을 하셨다고. 으핫하.
+++ 주인공 모자가 곧 본인들의 이야기... 는 아니더라구요. ㅋㅋ 대체로 지어낸 이야기와 캐릭터에 자신과 주변 사람들의 경험을 녹여낸 정도. 극중에 나오는 한국 장면들은 자기가 아는 한국인들과 촬영 스탭, 배우들과 상의를 해가며 어색한 부분 없도록 최선을 다 했다는데, 그 덕인지 그 부분은 되게 그냥 한국 영화/드라마 같습니다. ㅋㅋㅋ
++++ 스포일러 구간입니다. 최단 분량 스포일러에 도전!!
그렇게 모자가 각종 차별과 가난 등등에 시달리면서도 꿋꿋하게 9년을 버텨내고 1999년을 맞는데요. 이제 둘 다 그래도 어느 정도는 적응을 마쳐서 살만 하네요. 특히 엄마는 그새 남자 친구도 생겼는데 이 양반이 또 완전 세상 스윗합니다. 본인이 한국인 입양아라는 출신 때문에 이해도 잘 해주고 정말정말 완벽한 가운데 청혼까지 받았어요! 이제는 정말 탄탄대로!! 고생 끝 행복 시작!!!! 인데. 췌장암 4기 진단을 받습니...
그래도 우리의 세상 스윗남은 '소영씨 떠나면 데이빗(=동현)은 내가 친아들로 키우겠다'고 다짐을 하며 영원한 사랑을 맹세하는데... 아들놈은 아무래도 훨씬 충격이 크겠죠. 울적울적하게 멘탈 나가서 흐느적거리다가 인종 차별하는 백인 놈 하나를 두들겨 패고, 다음엔 신나게 얻어 터지고. 1주일 정학까지 먹어서 집에 돌아왔는데... 이걸 보고 소영은 결심을 합니다. 그동안 본인 아빠에 대해 궁금해 해도 아무 말도 안 해줬거든요. 그런데 이제 본인 살 날도 얼마 안 남았겠다, 아들은 마침 일주일 정학이겠다. 바로 한국으로 날아가네요.
가서 애 할머니, 할아버지, 작은 아버지도 만나고. 한국 구경도 시키고... 해주니 아들래미는 마냥 행복하죠. 와! 나처럼 생긴 사람들 뿐이야!! 눈치 볼 거 없구나!! 다들 한식을 먹어! 와!! 와!!! 그래서 염색했던 머리도 밀고, (실수 때문이지만) 푸른색 컬러 렌즈도 빼고. 튜닝 전 순정 비주얼이 되네요.
엄마는 아들 때문에 등졌던 시댁 식구들을 만나 낡은 원을 풀고 일생 못 가 볼 것 같았던 남편 묘에도 아들과 함께 찾아가요. 그렇게 남편에게 인사를 한 후, 먼 하늘을 바라보며 몇 번 일생의 한과 슬픔을 담은 고함을 몇 번 지르고요. 아들을 돌아보며 말합니다. '이제 집에 가자'.
그러고 둘이 떠난 산으로 서서히 내려 앉는 해를 보여주며 스탭롤이 올라가고, 끝입니다.
2024.05.05 18:09
2024.05.06 00:33
아 이렇게 말씀하시니 갑자기 웃음이 나옵니다. 그러니까 본인이 각본 쓰고 직접 연출한 작품에서 완전 무결한 이상적인 남자로 등장하신... ㅋㅋㅋ
영화에서 일부러 자세히 설명은 안 해 주지만, 애초에 시아버지는 며느리에게 큰 불만이 없었던 것 같았어요. 아마 자기 자식에게 자기가 부모 노릇하기 위해 내린 선택이니 좋지는 않아도 마음 속으로 이해는 해줬던 게 아닌가 싶었습니다.
2024.05.05 21:39
2024.05.06 00:34
교포 영화 시리즈(?)는 세 편으로 끝내려고 했는데요. 이렇게 말씀하시니 하나 더 봐서 4부작(...)으로 가야 하나 싶습니다. ㅋㅋ
2024.05.06 12:32
패스트 라이브즈 댓글에도 달았었지만 이런 소재를 다루면서 완성도도 탄탄한 작품들이 매년 나와주는 게 참 반갑더라구요. 언급해주신 이 작품엔 있지만 저 작품에는 없는 그런 부분들도 결국 '아시안계 아메리칸 이민자' 서사라고 다 같은 게 아니라 각자 처지와 상황, 와서 겪는 일에 따라 각기 다른 천차만별의 경험담을 이렇게 다양하게 간접체험해볼 수가 있어서 관객 입장에서는 오히려 더 좋은 게 아닐까 싶구요.
작년 선댄스 공개되자마자 엄청난 화제를 불러일으켰던 '패스트 라이브즈'와는 달리 이 작품도 호평은 받긴 했지만 인연이라는 개념과 선을 넘을듯 넘지않는 미묘하면서 가슴 뛰는 삼각관계라는 점에서 좀 더 다양하게 어필했던 전자와는 달리 표현해주신대로 너무 통속적인 멜로 드라마라서 뭔가 크게 차별화되는 부분이 없지 않았나 싶어요. 그래도 막판에 한국 파트 같은 건 전혀 예상을 못했는데 감동을 더 깊게 전해주는 역할을 잘 해내더군요. 마지막 대사가 참 심금을 울렸죠.
최승윤씨가 저도 참 좋았는데 감독님도 역시 좋으셨던거군요? ㅋㅋㅋ 사심하고는... 영화 본 다음에 배우님에 대해 더 알아보니 써주신대로 원래 안무가 등을 하시다가 연기자가 되려고 노력하시는 과정을 유튜브에 시리즈로 올리셨더군요. '최승윤 배우 만들기 프로젝트'라고 검색하면 나옵니다. 소소하게 재미있고 사람이 참 매력있는 것 같아요.
2024.05.06 20:18
네 말씀대로 정말 각자 인생이 다 다르니까요. 연달아 보다 보니 그게 이렇게 작품들 차이로 나타나는 게 느껴져서 재밌더라구요.
그래도 제겐 '패스트 라이브즈'가 뭔가 지적이고 관념적인 에세이 느낌이라면 이 영화는 좀 투박해도 진솔한 일기장 같은 느낌이라서 이것도 좋게 봤습니다. 엔딩을 위한 도구가 너무 통속적이긴 했지만 그것도 배우들이 잘 커버해줬구요. 막 추천은 못하겠지만 저는 잘 봤습니다. ㅋㅋ
무용이나 체조 같은 걸 업으로 하는/했던 사람들을 보면 뭔가 기본적인 움직임이나 분위기 같은 게 다른 부분이 있는 것 같아요. 젊을 땐 몰랐는데 나이 먹고 보니 그런 부분들이 되게 매력적으로 느껴집니다. 제가 전혀 그렇지 못한 몸으로 살아와서 그런가봐요. ㅋㅋ 암튼 감독님 심정(?) 이해합니다!!! ㅋㅋㅋㅋ
2024.05.08 10:37
교포의 입장에서 이 영화가 '전생' 영화보다 좋았어요. 아마 아이를 키우는 입장이어서 더 그랬던 것 같습니다. 캐나다 집이 좋아보인다고 하셨는데 저는 그게 오래되고 관리가 안되어 임대료가 싼 구식 하우스일거라는 느낌이 팍 오던걸요. 많이 봐서.
시어머니가 전혀 내다보지도 않는 것도, 시아버지와 삼촌이 따뜻한 것도, 아이에게 산소에서 절하는 거 가르치고 찜질방 가는 거 저는 다 좋았고 눈물도 났어요. 이제 아이는 자기가 어디서 왔는지 아는 거죠. 식구로 받아들여진 거죠.
최승윤씨의 현실적인 영어발음, 그러면서도 할 말 다하고 사회생활 다하는 열심히 사는 아시안 여성. 많이 보았기에 저는 감명 깊었습니다.
주목해야 하는 배우라고 생각도 했어요. 첫 영화가 주연인데 이정도로 해내다니..
2024.05.09 22:30
역시 이런 영화들은 아는 만큼 보이는 것 같습니다. 말씀하신 그런 디테일 같은 건 전 전혀... ㅠㅜ
최승윤씨 연기 정말 좋았어요. 외모부터 연기까지 캐릭터와 너무 잘 맞았고 말씀대로 끝까지 현실적인 영어 발음 같은 디테일도 좋았구요.
오늘 글 적은 영화까지 교포, 이민 영화 네 편을 봤는데 그 중에서 가장 감정적으로 울리는 건 이 영화라고 저도 생각했어요. 본문에서 '통속적' 이라는 표현을 썼지만 부정적 의미는 아니었구요. 하하.
글 잘읽었어요. 감사합니다. 극장에서 보았어요. 영화 속의 감독님 너무 이상적인 남자죠 :)
한국에서 만난 시아버지(?) 쿨하셨던걸로 기억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