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4.22 11:53
오랜만에 차분하게 글로 정리해고픈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때 그 때 읽히는 책 장르를 찾기 위해 고군분투하는데 최근에 하나 찾아서 잘 읽고 있는 듯 합니다.
한참 성매매 관련 책들을 읽었는데, [레이디 크레딧]을 읽고 나서 조금 사그라든듯 합니다. 근원적인 문제를 체감하고 그 문제의 규모와 압력이 개인의 선택을 아득하게 초월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어서였을까요.
세계의 시대상이 변함에 따라 약하게나마 전쟁의 공포를 꾸준히 느끼고 있어서, 전쟁시와 패전 이후의 삶에 관심이 생겼었습니다. 그리고 요새는 거시적으로 다루는 개념들보다는, 개개인의 진술과 서술이 더 와닿아 그런 책들을 골라 읽게 됩니다. 저 자신도 결국 개인 1인으로서 삶을 살고 있고, 앞으로도 그 범위 내에서 살아갈테니까 국가적인 관점은 알면 좋지만 알아도 딱히 삶에다 이어붙일 때가 없더라구요.
가장 최근 다 읽은 책은 [너희는 죽으면 야스쿠니에 간다]였는데요. 박사 논문을 책으로 바꿔 썼는데 쉽게 잘 읽혔습니다. 태평양 전쟁에 참전한 3명의 노인들을 인터뷰한 내용이었는데, 개인으로서 커다란 전쟁에 빨려들어가고 패전을 겪는 과정을 잘 느낄 수 있더군요. 도입부에서 저자가 제주도에서 태어나 제주도 절벽의 군사 요점으로서의 '구멍들'을 발견하고 궁금증을 갖는 과정부터 이입되었습니다. 책이 차분하기도 하고, 관점이 있는 일본 전사 서술이 착 달라붙더군요. 읽다가 패전 이후 일본 해군이 책임 회피를 성공하는 모습을 보며 많이 화가 나기도 했습니다.
패전 직후, 해군 군령부는 연합군사령부에 의해 전쟁 중의 '특공'이 '전쟁범죄'로 신판될 것을 우려했다. 이들은 연합군의 추궁에서 어떻게 빠져나갈 것인지 골몰했고, 그 매뉴얼을 체계적으로 정리해나갔다. 그들이 내놓았던 매뉴얼은 의외로 전쟁 당시의 선전과 일맥상통했다. 해군 군령부는 특공이 상층부의 명령에 의해 실시된 사실을 강력히 부정하며, 특공대원들의 출격은 어디까지나 자발적인 것이었다고 주장했다. 즉 국가가 절체절명의 위기에 빠진 상황에서 일선 장병들이 애국심에 따라 자발적으로 행한 것이므로 비인도적인 전쟁범죄와는 전혀 다르다는 것이 그들의 논리었다.
결과적으로 특공에 대한 책임을 지고 누군가가 전범으로 기소되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중략) 특공 병기의 도입을 위해 동분서주했던 쿠로시마 카메토는 공직에서 추방되는 정도로 일신의 안위를 보전했고, 이후 기업체 임원으로 안락한 여생을 보냈다. 쿠로시마는 사망할 때까지 특공에 대해 입을 열지 않았다.
책 뒤에서 그 '메뉴얼'이 어떻게 구성되고 진행되는지 간단하게 다뤄지고 있는데, 역시 윗선들은 처벌을 거의 받지 않고 '자발적'으로 범죄를 일으킨 일선의 사관/부사관들이 강력한 범죄자로 사형이나 종신형을 받았다고 되어 있었습니다. 전세가 기운 상황에서 목숨을 바치는 것은 얼마나 부질없는 일인지.
최근 읽다가 반납한 책 중에서는 [어느 하급장교가 바라본 일본제국의 육군]이란 책이 있었는데요. 글을 너무 찰지게 잘 쓰고 재미있어서 꼭 다시 빌려서 끝까지 읽을 생각입니다. 위의 책은 해군을 주로 다뤘다면 이 책은 육군에서의 개인을 다루고 있는데 얼마나 중구난방이었는지 자세히 쓰고 있습니다. 일본 본토에서 러시아와 싸울 준비를 그렇게 했는데 갑자기 미국과 싸우게 되는 상황이 서술되기도 합니다. 나중에 알고보니 야마모토 시치헤이란 사람은 '제왕학'이라거나 '일본인이란 무엇인가', '공기의 연구' 같은 개념론으로 유명한 사람 같더라구요. 이런 사람의 개인 서술이 더 재미있다고 생각합니다. 가능하면 동 저자의 [홍사익 중령의 처형]도 읽어볼 생각입니다. (홍사익이란 사람은 중장이었으니 너무 높은 개인이긴 하지만 당시 조선인으로서의 일생도 궁금합니다.)
이 전에는 [태평양 전쟁 - 펠렐리우/오키나와 전투 참전기]라는 책을 읽었거든요. 미군 해병대원으로 참여한 내용을 병사 개인으로서 바라본 내용이라 이입이 많이 되었습니다. 일본과는 분위기가 다르게 다들 자발적이고 좀 더 현대적인 시각이 느껴지기도 했습니다. 나중에 보니 [퍼시픽]이라는 드라마가 이 책에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 하더라구요. 안타깝게도 그 드라마를 보고 싶었지만 한국에서 합법적으로 돈 내고 볼 수 있는 창구를 찾질 못 했습니다. 섬에서 이뤄지는 상륙전과 그 선봉을 맡는다는 것. 보통 1차/2차 세계대전은 한국에서도 영화나 드라마로 많이 화자되는데 유독 태평양 쪽 전쟁은 흥행이 잘 안 되는 느낌이 있네요.
그 사이 [남양 섬에서 살다]라는 책도 읽었습니다. 이 책은 굉장히 독특하다고 생각하고, 흔하게 읽을 수 있는 내용은 아니라고 생각해서 한 번쯤 읽어볼만 하지 않나 싶습니다. 일제시대에 태평양 섬에서 조선인들이 일을 할 수 있다고 신문에 모집 광고가 나고, 거기 가서 일을 했던 사람의 회고록인데요. 일제가 태평양의 섬들을 어떻게 관리했는지 이렇게까지 실무적으로 자세하게 다뤄진 책이 있었나 싶습니다. 전후에 순식간에 미군 쪽에 서서 일을 맡고.
그 외에도 몇 권을 더 읽은 것 같은데 막 기억이 나진 않네요. 저는 역사를 잘 몰라서 그런지, 조선시대(잠시 대한제국)와 일제, 일제와 해방 후 한국 사이에 보통 서술들은 완전히 선이 그어져서 그 사이의 인물들이 서로 넘나들지 못하는 기분이 들 때가 많거든요. 그런데 그 때 당시 살던 사람들이 다들 바로 다음 시대에서 똑같이 나이 먹고 연속성을 가지며 살았을텐데, 그런 내용을 체감하게 될 때 지저분했던 것이 깨끗해지는 기분이 듭니다.
(아, 그 사이 [한국전쟁에서 싸운 일본인]이란 책도 읽었군요. 대부분 미군이 한국에서 작전을 해야 하는데 '한국에서 말이 통하는 통역병'으로 데려간 사람들이 많더군요. 이 책에서 가장 흥미로웠던 부분은 흥남 철수를 위해 바다에서 기뢰를 제거해야 하는데, 기뢰 제거 팀을 일본군에서 불러다 했다는 부분이었습니다. 일본군은 당시 그렇게 참여할 수 없었기 때문에 민간으로 위장해서 했다고 하더군요.)
앞으로도 '패전 이후 개인들의 삶의 선택'이라던가, '분명 직전까지 원수처럼 피 흘리고 싸우던 미국인과 어떻게 갑자기 협력할 수 있었는지'의 멘탈리티를 더 읽어볼 생각입니다. 지금까지는 정보통제 속에서도 이미 전쟁이 기울었다고 생각한 사람들이 많았고, 이렇게 될 줄 알았어 하고 패전 이후 손을 놓아버리는 식이더군요. 또는 항복 이후 총을 들고 미군을 기다렸지만, '상대도 마찬가지로 내가 죽인 사람들이 있다'라는 동병상련과 같이 밥을 먹으면서 마음이 풀리는 경우도 있고요. (일본은 쫄쫄 굶는데 미국은 잘 먹으니, 그 음식을 함께 먹기만 해도 마음이 풀리기도 하더군요.)
[너희는 죽으면 야스쿠니에 간다]라는 책이 굉장히 얇은데도, 상당히 괜찮았어서 글을 써보게 되었네요.
2024.04.22 15:15
2024.04.22 16:24
한국의 성매매 '사업'은 거대한 사업이 되어 금융권에서 대출을 통해 사업을 확장할 수 있을 정도의 규모로 부피를 이미 차지하고 있다고 할까요. 성형 산업의 얼마를 성매매 '사업' 쪽에서 끌고 가고 있는지 의심스러울 정도. [레이디 크레딧]을 조금 인용해 보면,
성매매 업소에 여성을 충원함으로써 업주는 성매매를 통해 수익을 올리는 동시에 이들 여성들을 상대로 '이자 장사'를 할 수 있다. 만약 선불금이 5000만 원인 여성의 하루 벌금 또는 하루 '할당량'이 100만 원이라면 이는 이자율 730%에 해당한다. 성매매 업주가 지역 신협에서 40%의 이자로 5000만 원을 빌려 여성들에게 선불금을 제공한 것이라고 가정하면 그는 690%의 이자를 남긴 것이 된다.
이런 방식으로 '선불금'을 3금융권에서 지원받아 빌려주고 감당하는 형태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네이버 지식인에 '일수방'이나 '마이킹' 같은걸 검색해보면, 현 시점에서도 이 금융 체계는 끝없이 돌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죠. 합법화/불법화보다는 이미 불법인데도 감당할 수 없을만큼 비법적으로 운용되고 있다는 지점도. 자세한 내용은 책을 참조해보시는 게 좋습니다.
따로 메모해놨던 제 글을 보니, '한국에서는 경제적 선택이 합리적이기 이전에 도덕적이다. 도덕률이란 인간을 움직을 수 있는 동인이자 다른 사람을 쉽게 비난할 수 있는 원천이다. 한국에서 부채를 갚지 못하거나, 돈을 버는데 방해하는 것들은 비합리적인 것이 아니라 비도덕적인 것이다.'라고 해놓았군요. 개인적으로는 그 책에서 주장하는 상당한 통찰이라고 생각했는데, 최근 트위터에서 성매매 관여자들이 말했던 '너희들은 말로만 떠들지 빚진 사람들 돈을 직접 갚아주고나 있냐? 우리는 그들을 직접 돈 벌게 해주고 있다'라는 주장이 떠오르기도 했습니다. 초자본주의 한국에서 이런 도덕률을 뜯어 고치는 동시에 금감원/검찰 수준의 압력이 없는한 문제 해결은 요원해 보입니다. (유착이나 안 하면 다행이라는 생각.)
2024.04.22 15:21
오랜만에 쓰셔서 반갑고 내용도 반가운 글이네요.
전쟁 관련 일본인들의 대응을 이어 읽으셨군요. 관심 장르가 생기면 그 분야를 파는 독서 경향을 가지셨나 봅니다. 저는 쉬 싫증을 내는 것도 있고 목표 의식이 부족한 것도 있어서 이 책 저 책 왔다리갔다리하며 읽는 편입니다. 주로 소설을 읽지만 얼마 전부터 관심이 가는 사회학의 경우도 이 책 좋네, 이 저자 재밌네 생각하면서도 연달아 이어달리지는 못하겠더라고요.
아무 강제성 없이 강한 결심이나 목표도 없이 부유하며 읽는 독서 습관을 근래 고민하고 있었습니다. 나날이 눈은 피로해지지, 책은 곁에 두고 싶어서 자꾸 사면서도 다 읽고 죽겠나 싶은 생각도 들어서요.ㅎ 저는 다독하자는 생각은 원래 없는데 그렇다면 뭘 골라 어떻게 읽을지 체계가 필요하지 않나 생각했습니다.
[너희는 죽으면 야스쿠니에 간다]는 장바구니에 [공기의 연구]는 보관함에 넣었습니다. [어느 하급장교가 바라본 일본제국의 육군]은 절판이네요. 도서관에는 있나 봐요.
저는 지금 전에 사두었던 [동조자]를 읽고 있습니다. 박찬욱 감독 시리즈가 나오자 이제 미루지 못하고 시작했습니다. 이 책도 전쟁과 밀접한 관련이 있어요.
참, 잔인한오후 님은 집에서 독서하실 때 어디서 주로 읽으시는지 궁금합니다. 오늘도 책을 오래 읽을 때의 독서인의 자세가 궁금한 thoma입니다.
2024.04.22 16:34
잘 보도되지 않는 전쟁과 소요는 꾸준히 있어왔지만 (남수단이나 미얀마 내전 등) 시간이 흐를수록 안정보다는 불안정에 다가가고 있고, 한국의 국제 위치도 갈수록 불안한 위치로 넘어가는 것 같아서 알고 싶어지더라구요. 요즘 시대에 피해없이 전쟁에서 승리하는 결과에 도달하기보단, 전쟁 참여 양 쪽다 개고생을 하는데도 불구하고 서서히 빨려들어가는 모양새라서 그런 시대의 멘탈리티나 경험을 이해하고 싶어지더군요. 결국 모든 것은 일상이 되고, 자신을 위한 선택을 어떻게든 하는 것이 좋다는 개인적인 결론입니다.
( [너희는 죽으면 야스쿠니에 간다]에서 특공에 참여할 비행사들을 뽑는 장면을 회고하는데요. 이번에 전투에 나가야하는데 지원하는 사람, 하고 묻는다고 합니다. 그럼 전부 다 같이 손을 든다고 해요. 그럼 그 중에서 '너, 너, 너'라고 해서 자발적으로 출격하게 된다고 합니다. 거기서 손을 안 들면 매우 뻘쭘하다고 해요. 죽음을 앞두고도 함께 죽음을 나누는 동지가 되지 않을 뻘쭘함이란, 그리고 거기서 빠져 나갈 수 있을 수 있는 마음가짐이란 뭘까 생각하게 됩니다. )
thoma 님은 꾸준히 차근차근, 마치 숨 쉬고 밥 먹듯 책을 읽으시는 것 같아서 그것도 멋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은근 독서의 맥락도 있으시고요. 저도 10권 빌리면 한 권 정도 읽으니, 산 책은 아마도 절대 다 못 읽고 죽겠죠 ㅋㅋ. 그만큼 더 샀을 것이니까.
책은 보통 침대 위에서 읽습니다. 누웠다 뒤집었다, 옆으로 기댔다가 중간 중간 집중력이 떨어져서 휴대폰 한참 하다가 다시 펼치기도 하죠. 아니면 회사에서 월도하면서 전자책을 몰래 읽을 때도 있는데, 이 때 좀 많이 읽는 것 같기도. 그럴 시간이 난다면 말이죠. 그리고 가끔 하다 하다 안 읽어지면 근처 카페에서 자신을 가둬놓고 책 워밍업을 하기도 합니다. 보통 차를 한 잔 시키고 다 마실 때까지 앉아있는데, 물을 잘 안 마셔서 한참 걸리기도.
2024.04.22 17:41
레이디 크레딧! 읽을 책 목록에 넣어둔 작품입니다. 트위터에서 흥하던데 비슷한 책들도 장바구니에 넣어두었습니다. 언젠가 소감을 나누고 싶군요 ㅠ
2024.04.23 11:00
Sonny 님이 읽어보시면 제가 놓치거나 못 본 부분들을 보실 것 같군요. 저는 잠시 쉬었다 힘을 내서 [불처벌]이나... 좀 더 법적 선택지들을 확인해보게 될 것 같습니다.
2024.04.24 18:30
오 재미있어 보이는 책들이 이렇게 많이?! 정보 나눠주셔서 감사해요. 지금 도서관으로 가는중이에요.
개인적으로는 남양군도...라는 이름이 붙으면 호기심이 생겨요. 올리버색스의 책 중에 그 지역만의 유전병에 대한 책을 매우 재미있게 본터라 그 이후부터는 저절로 눈이 가더라구요. 거듭 땡큡니다^^~
2024.04.24 2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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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인들의 멘탈이 참 궁금했는데 거기도 그렇게 상관들이 책임 안지는 구조군요. 그러니 제대로 전범재판같은 거 받고 역사를 바로잡기가 쉽지 않았겠네요.
성매매에 관한 '아득히 초월적인 문제의 규모와 압력' 이야기도 더 듣고 싶네요. 합법화 불법화 다 부작용이 상당해서 어려운 문제라고만 생각했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