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3.05 16:54
문예출판사에서 나온 프리드리히 뒤렌마트의 [약속]에는 '약속'과 '사고' 두 편의 소설이 실려 있어요.
'약속'을 읽은 후의 생각만 적어 봅니다.
추리 소설을 많이 읽진 않았으나 이 분야 책을 읽고 나면 기계적인 봉합이나 허술하게 느껴지는 설명식의 마무리에서 오는 아쉬움, 씁쓸한 뒷맛을 느낄 때가 있어요. 그런데 이 '약속'이라는 소설은 잘 쓰여진, 소위 완성도 있는 추리 소설을 지적합니다. 그런 소설의 아귀가 딱딱 맞는 논리성과 완벽 추구를 지적하고 있습니다. 이 소설은 그런 면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는데요, 짜맞추어진 이야기 구조에 바탕한 소설 일반에 대해 확장해서 생각해 보기도 가능한 거 같습니다.
소설은 이야기 전달자이며 전직 경찰국장이기도 한 인물이 우연히 추리 소설 작가를 만난 김에 다음과 같은 얘기를 풀어 놓습니다. 추리 소설에서 인물 역할, 이야기 진행은 너무나 논리적으로 배치되어 작위적으로 느껴지면서 정의를 구현하고 해피엔딩에 이른다, 따라서 우연과 비논리 투성이 현실을 무시하며, 극복된 완전한 세계를 거짓되게 세워놓았다, 라고 말입니다. 현실과 거리가 먼 추리 소설의 완전함 추구는 거짓되며 그런 식의 계속된 추구는 문체 연습에 불과할 것이라고도 합니다. 그러고 나서 이 주장과 관련 있는 사건 하나를 이야기하는 식으로 되어 있어요. 말하자면 이 작품은 소설을 가지고 추리 소설을 질타하고 있었네요. 이 소설의 부제가 '추리 소설에 부치는 진혼곡'입니다.
이렇게만 소개한다면 이 소설이 추리 소설 업계의 화제 거리로서 특이한 추리 소설 정도로 그쳤을 것 같지만 '약속'이라는 소설은 다방면으로 뛰어난 느낌을 주었어요. 뒤렌마트는 현대 스위스를 대표하는 작가 중에 한 명이라지요.
인간의 삶이란... 소설 속의 마태처럼 이렇게 모든 것을 걸고 최선을 다해 산다고 해도 인생이란 얼마나 우스꽝스러운 비극일 수 있는지 보여 줍니다. 심지어 다 읽고 나니 인간의 발버둥을 내려다 보는 신의 시선이 느껴지기도요. 어떤 작가의 시선은 그런 위치에 가 있기도 한가 봅니다.
이 작품에서 이야기는 겹겹으로 감싸져 전달되고 이야기는 이야기가 진행되는 장소 배후에서도 진행됩니다. 소설가가 소설 한 편에서 만드는 세계에 대한 세심한 주의환기로 읽을 수도 있겠습니다. 되풀이 되는 얘기지만, 어떤 추리 소설처럼 무리하여 인과 관계를 짜고 권선징악의 이치에 맞아야 한다는 진행으로 꽉 짜인 세계는 현실과의 거리감 때문에 어리둥절한 느낌을 주게 되니까요. 이런 생각을 하다가 작가 제발트의 말이 떠올랐습니다. 이제는 플롯에 의존한 잘 짜여진 이야기는 읽기도 쓰기도 어렵다, 라고한. 본인이 자신의 작업을 설명하며 잘 짜여진 스토리에 대한 불신을 표현한 말이었어요. 그러나 모든 작가가 제발트가 글쓰기에서 도달한 필연성을 가질 일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잘 만들어진, 잘 뒤틀리고 잘 반영한 이야기는 여전히 개인마다 다양하게 받아들일 여지를 주는 '힘' 있고 '유효' 한 '꿈이자 상징물' 이라고 생각합니다.
'약속'의 중심 인물인 경관이었다가 주유소 주인이 된 마태가 어떤 사람인지 드러내는 다음 고백을 소개합니다.
"조금 전 박사님께선 내가 아직도 호텔에 살고 있는 것을 이상하게 여기셨지요"
이윽고 그는 말을 이었습니다.
"그건 당연한 일입니다. 나는 이 세상과 맞서고 싶지 않았던 겁니다. 노련한 대가처럼 세상을 극복하려 했지, 세상과 맞붙어 괴로워하는 걸 원치 않았어요. 세상에 맞서 우월한 위치에 머물고 싶었지요. 숙련공처럼, 당황하는 법 없이 세상을 지배하려 했던 겁니다."
저도 (다시 태어나 부자라면)호텔장기기식자 생활을 하고 싶은데 말입니다.
그나저나 마태의 세계관은 추리 소설의 그것 아닌가요. 그리하여 마태는 점점 어찌되어 갈 것인가...
재미있게 읽은 소설이라 추천합니다.
2024.03.05 18:59
2024.03.05 20:19
[판사와 형리]도 흥미롭게 읽었던 소설입니다. 저는 대학 때 읽은 '미시시피씨의 결혼' 비롯 이분의 희곡들이 하나도 생각이 안 납니다. 다시 읽으면 기억이 떠오를지도요.
호텔은 근사하고 거창한 곳이면 넘 번잡하지 않을까요. 아침식사 괜찮은 조금 한적한 곳에 침구에서 이만 안 나오면 됩니다. 장기투숙은 아마도 다음 생 이야기겠지만.ㅎ
2024.03.06 02:37
이루어지지 않을 계획이라는 건 스스로 잘 알지만 소개글을 보니 소설이 너무 재밌어 보여서 일단 메모장에... ㅋㅋㅋㅋ
호텔 장기 기식이면 얼핏 생각하면 참 좋긴 한데. (청소, 정리, 설거지 안녕!!!) 근데 또 자기가 머무는 공간을 자기 맘대로 꾸밀 수가 없다는 점에선 불편할 것 같기도 해요. '장기'의 기준을 어디에 잡느냐에 따라 다르겠습니다만. ㅋㅋ 한 두 주 정도는 마냥 편하고 좋을 것 같기두요.
2024.03.06 10:16
재미있다고 했지 너무 재미있다고 하진 않았습니다?(발을 조금 뺀다) 추리 소설에 대한 유감과 소설 작법에 대한 전직 경찰국장의 장광설이 조금 있습니다. 저는 50년대 후반 스위스 경찰들의 수준이 우리 현실과 차원이 달리 높아 가지고 신기했어요.
소설 읽기의 영향으로 생긴 판타지가 몇몇 있는데 호텔에 장기 투숙하기도 그 중 하나입니다.ㅋ
글 잘읽었어요. 감사합니다. 저는 대학 시절 [판사와 형리]를 구매했었던 기억이 나요. 지금 내용은 거의 가물가물하고 작가와 이름만이요.
돈이 많은건 아닌데 1990년대 언제 쯤 몇달을 런던에서 '호텔장기기식자 생활'을 했는데요. thoma 님께서 꿈꾸시는건 훨씬 근사하고 거창하신거겠지만요.
'베이스워터' 역 근처일거여요. 일장일단이 있어서 기숙사로 옮겼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