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11.18 23:42
[하녀]라는 슬로바키아 영화를 올해 프라이드 영화제에서 보았습니다. 작년에 부산에서 상영했던 것 같고, 수입이 되었는데,
극장 개봉될 수 있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제가 본 건 자막이 레터박스에 걸쳐 있더군요.
시대배경은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기 직전. 슬로바키아 시골마을에 엄마와 같이 살던 안카는 엄마가 결혼하자
프라하에 있는 대저택의 하녀가 됩니다. 그리고 이 영화가 프라이드 영화제에서 상영되었다는 건 안카가
그 집 딸인 레시와 사랑에 빠진다는 이야기겠지요.
영화가 끝날 무렵엔 실화인 것처럼 에필로그를 맺고 있어서 검색을 좀 했습니다. 일단 실화는 아니고,
한나 라시코바라는 작가가 쓴 소설이 원작이라고 합니다. 소설의 주인공 안카는 라시코바의 엄마를
돌보았던 유모가 모델이고요. 라시코바는 이 소설을 직접 각색했는데, 소설에서는 암시만 되던
안카와 레시의 관계가 (프라이드 영화제에 걸릴만큼) 큰 비중으로 늘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것말고도
많이 바뀌었대요. 예를 들어 원작의 무대인 빈이 프라하로 옮겨졌다거나. 이건 촬영 조건
떄문일 수도 있겠습니다.
[아가씨]스러운 로맨스나 섹스를 기대하시면 곤란합니다. 물론 주인 아가씨와 하녀가 나누는 섹스와 로맨스는
있습니다만, 영화는 그것들보다는 20세기초 오스트리아-헝가리 연합제국의 계급사회를 묘사하고
풍자하는 데에 더 집중합니다. 영화가 여기서 가장 집중하며 묘사하는 부분은 바로 인간의 대소변이에요.
안카가 일하는 대저택엔 수세식 화장실이 없고 다들 요강을 쓰기 때문에 하인들이 그 높은 양반들의
대소변을 갖고 나와 길가의 하수구에 버려야 합니다. 이 장면을 처음 접하면 (그 뒤로도 여러 번
나오는데) 이 대저택의 화려함보다 그 뒤에 숨겨진 더러움이 더 잘 보이죠. 물론 그 사람들은 하인들이
자기 대소변을 보는 것이 전혀 부끄럽지 않은데, 하인 계급은 거의 사람 취급을 받지 않으니까요.
레시가 안카와의 사랑을 통해 변한다면 그것도 드라마일 텐데, [하녀]는 냉정하기 짝이 없는
영화입니다. 계급은 사람을 만들고 그 사람은 쉽게 바뀌지 않습니다.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어쩔 수 없이 바뀐 사람들도 있었겠지만 [하녀]의 세계에서는 아니에요. 이 영화의 로맨스가
충분히 발전해서 해피엔딩에 도달할 수 없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사랑과 섹스만으로
이룰 수 없는 것들이 있습니다.
영화의 섹스와 로맨스의 묘사는 [아가씨]와 원작인 [핑거스미스]를 연상시키는 구석이 있습니다.
하지만 이 작품들은 섹스와 로맨스를 이중의 겹을 통해 보잖아요. 그러니까 적어도 한 명은
포르노의 관습에 익숙한 커플의 이야기죠. 하지만 [하녀]의 두 주인공은 모두 직설적이고
단순합니다. 그러니까 이런 장면이 나와요. 결혼을 앞둔 아가씨가 하녀에게 결혼식 날
남편과 무얼 해야 하는지 모르겠다고 말합니다. 하녀는 아래층으로 내려가 하인과
섹스를 하고 그 경험을 아가씨에게 최선을 다해 전수합니다. 신혼여행을 다녀온
아가씨는 하녀의 뺨을 때립니다. "거짓말쟁이, 네가 해준 거랑 완전히 다르잖아!"
그리고 이 모든 이야기가 이 사람들에겐 진지하기 짝이 없는 것입니다. [아가씨]/[핑거스미스]를
거친 관객들에겐 당연히 웃기는데, 하긴 삶의 어딘가에선 이런 단순함이 존재하긴
해야겠죠?
기술적으로 잘 만들어진 영화는 아닙니다. 정직하지만 거칠지요. 지나치게 자주 나오는
음악을 절반만 잘랐어도 결과물이 더 좋았을 거라는 생각이 들어요. 영화 자체의
매력보다는 그 영화를 통해 얻는 풍속학적 자료의 흥미가 더 큽니다.
(23/11/18)
★★☆
기타등등
각색물에서 안카와 레시 이야기의 비중을 늘리라고 제안한 건 작가의 아빠였다고.
감독:
Mariana Cengel-Solcanska,
배우: Dana Droppova,
Radka Caldova,
Vica Kerekes,
Zuzana Maurery,
Anna Geislerova,
Cyril Dobry,
Karel Dobry
다른 제목: The Chambermaid
IMDb https://www.imdb.com/title/tt10545296/
Daum https://movie.daum.net/moviedb/main?movieId=16913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