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07.06 10:34
요새 극장이 망해간다고 하지만 그래도 보고 싶은 영화는 계속 개봉하고 있습니다. 특히나 재개봉을 해버리면 미처 못봤던 영화를 볼 절호의 기회이기에 옳다구나 하면서 반가운 마음으로 극장을 가게 되죠. 최근에 톰 크루즈의 팔구십년대 작품들도 재개봉을 했고 [순응자]같은 작품이나 [샤이닝]같은 작품들도 재개봉을 하는 추세이구요. 아마 개봉할 영화들이 더 줄어들면 이런 흐름은 더 거세질 것 같습니다. 아마 온 극장이 씨네마테크처럼 기획전을 주구장창 틀어댈지도 모르죠.
그런데 이런 작품들을 다 챙겨볼 수 없습니다. 아니, 고전 명작들은 제쳐놓고서라도 그냥 개봉하는 영화들만 봐도 다 못보고 넘어가기 일쑤에요. 가장 간단한 기준으로 비교적 마음이 한가로운 주말 이틀에 각각 영화를 한 편씩 본다고 합시다. 저는 하루에 볼 수 있는 영화의 최대 갯수가 한 편이고 그 작품이 괜찮으면 그 여운을 오래 씹는 편이라 영화를 볼 때의 텀이 길었으면 좋겠거든요. 그렇게 보면 일주일에 영화를 두 편 보는 건데 이렇게 하면 너무 서운하니까 평일에 살짝 무리를 해서 영화를 한 두편 정도 본다고 칩시다. 그러면 영화가 오후 일곱시 쯤에 시작하니까 (퇴근하고 호다닥 가도 일곱시가 그나마 제일 빠른 상영시작시간입니다) 평균 상영시간 두시간으로 잡고 아홉시에 상영 종료를 하겠죠. 그러면 집에 가면 열시입니다. 평일에 자발적으로 이틀 정도 야근을 하는 기분인데, 이러면 정말 녹초가 됩니다. 집에 오면 간신히 샤워를 하고 자발적 녹다운.
제 체감상 저렇게 무리를 해도 괜찮은 영화를 다 못봅니다. 왜냐하면 이건 훌륭한 영화다! 라고 확신이 드는 작품 갯수만 한달에 8개는 가볍게 넘어가니까요. 깅가밍가한 작품도 있을테고 자기 취향이 아닌 작품들도 있을테죠. 그리고 씨네필들은 원래 남이 어떤 영화를 봤냐고 물어볼 때 안봤다고 하는 걸 수치스러워하는 사람들이지 않습니까? ㅋ 그러니까 어지간한 영화면 다 챙겨보겠죠. 별점 두개에서 두개반 나오는 그런 영화들도요. 이 행위를 과연 극장을 다니면서 할 수 있는 건지 그 물리적 여건에 대해 궁금증이 듭니다. 과연 한달 새에 개봉하는 영화들을 다 챙겨보기나 할 수는 있는 것인지.
여기서 끝이 아닙니다. 씨네필들은 당연히 비평적으로 영화를 접근하겠죠. 그러면 영화를 보고 후기도 정성껏 쓸 거란 말입니다. 제가 블로그에서 이웃을 걸어놓은 씨네필들은 예사롭지 않은 글들을 씁니다. 그런 글들이 과연 한두시간 안에 뚝딱 나올 수 있는 것인가... 고민도 오래하고 탈고도 여러번 한 흔적이 보이거든요. 이것까지 합치면 극장에 영화를 보러 왕복하는 시간 두시간 + 영화를 보는 두시간 + 영화 보고 글을 쓰는 두시간 도합 여섯시간이 소요됩니다. 여기다가 씨네필들은 단순한 리뷰어가 아니니까 그런 비평적 글쓰기를 위해서 영화 이론도 엄청나게 읽겠죠. 그러면 그런 글들은 또 언제 시간을 쪼개서 본다는 것인지? 저는 필로만 읽는데도 그걸 다 읽을 시간과 힘이 없어서 사놓고 쌓아놓기만 하거든요. 지금도 [헤어질 결심] 비평모음집을 사놨는데 아직 비닐도 못뜯었습니다...
그런 씨네필들은 영화를 보는 눈과 기본적인 글실력을 다 다져놓은 상태인걸까요. 뇌에 영화근육이라는 게 이미 자리잡힌 것처럼...? 헬스 한 3년차 하면 3대 500은 칠 수 있게 된다는 듯이? 청소년 시절부터 영화에 대한 애정과 감각을 혼자 훈련해왔고 대학교에서 영화 전공쪽 수업을 들으면서 4~5년간 전문적인 훈련을 거친 뒤에는 영화를 보면서 빠른 시간 안에 그 영화에 대한 결론을 얻고 글로 정리할 수 있게 되는 것일까요. 저는 그런 과정을 겪은 적이 없어서 씨네필들이 극장에 가서 영화를 보고 글을 쓰는 그 일련의 물리적 과정이 좀 신기합니다. 어쩜 그렇게 꼬박꼬박 극장을 다니고 후기를 가지런하게 남기는지... 특히 남들이 아름답다고 하는 영화에 대해 거침없이 비판적 시선을 제기할 수 있는 자신의 그 미적 확신이 때로 부러울 때가 있습니다. 영화를 많이 보는데도 그 영화들에 대해 자신만의 결론을 깔끔하게 얻어내는 것도 신기합니다.
여기에 어떤 영화가 너무 좋은 경우 두세번 보는 때도 있겠죠? 이러면 그에 들어가는 물리적 시간과 수고는 배로 들어갑니다. 이동진 평론가처럼 한번 본 영화는 두번 안보는 경우도 많겠지만... 여기에 각종 영화제까지 덧붙여진다면? 저는 하루에 한편이 최대 영화관람횟수라 다른 도시에 가서 하루에 영화를 두세편 보는 분들의 감상력(?)이 신기할 때가 있습니다. 좋은 영화를 보면 보는 대로 정리할 것이 많을테고 안좋은 영화를 보면 보는대로 쓸데없이 영화위장만 차버려서 다른 영화를 볼 때 좀 거북할 수도 있을 것 같은데요. 어찌됐든 영화를 그렇게 직접 가서 많이 볼 수 있다는 게 단순히 체력의 문제만은 아닌 것 같습니다. 그 깊이와 넓이에서 어떤 식으로든 작은 미학적 성취를 쌓아나가는 분들을 보면 대단하다고 느낍니다.
무엇보다 대단한 건, 한편의 영화를 결국 놓아준다는 것 같습니다. 저는 정리가 안되면 영화가 머릿속에서 유령처럼 계속 맴돌고 있습니다. 그렇게 희뿌연 영화들이 정리된 영화들보다 훨씬 더 많은데, 어떤 식으로든 영화와의 대화를 끝내고 다음 영화를 만나러 가는 씨네필들은 대단한 것 같습니다. 이렇게 쓰다보니 씨네필이라는 건 지적 탐구심이나 감상력(?)보다도 어떤 식으로든 매듭을 짓고 마는 그 결단력에 있는 것 같다는 생각도 드는군요.
2023.07.06 10:49
2023.07.06 10:52
저는 VOD 필은 그렇게 하실 수도 있겠다 싶은데... 극장을 빼놓지 않고 찾아다니는 씨네필들이 신기합니다... 딱히 업을 그 쪽으로 삼고 있지도 않은 분들이 그렇게 활동하는 거 보면 진짜 신기해요
2023.07.06 11:01
그래서 그냥 영화팬도 아니고 씨네'필'인 것 아니겠습니까. 사랑의 힘은 위대한 것... ㅋㅋ
주변에 글로, 그것도 비평으로 먹고 살던 분들이 몇 분 계신데 사실 그게 어느 정도 능력치와 경험이 쌓이고 나면 자기만의 로직? 내지는 공정? 같은 게 생겨서 금방 뭔가 튀어나오더라구요. ㅋㅋㅋ 자동 조리 기구에 재료를 투입하면 쿵쾅쿵쾅하며 요리가 튀어나오는 느낌이랄까요. 당연히 글로 올릴 땐 그걸 다듬고 정리를 해야겠습니다만. 그것도 말씀대로 '거의 매일' 그 과정을 반복하는 분들이라면 그렇게 오랜 시간이 걸리진 않을 겁니다.
2023.07.06 11:04
아하... 역시나 기본적인 영화근육이 있는 것이군요 그러면 가능할 것 같기도 한데, 여전히 경탄스럽습니다.
2023.07.06 11:22
아예 전문적으로 영화만 보고 글을 쓰고 밥벌어 먹고 사는 것도 아닌데 저정도로 시간과 노력을 투자하니까 배티님 댓글처럼 '씨네필'이라고 불릴 자격이 있는 것이겠죠? ㅎㅎ
제가 즐겨찾는 NBA 커뮤니티에서도 본업은 엄연히 따로 있는데 NBA 정규경기는 물론이고 대학 유망주들까지 풀경기로 다 찾아보고(경기당 타임아웃 같은 때 스킵하면서 봐도 넉넉잡고 2시간반~3시간) 엄청 고퀄의 분석글을 올려주시는 분들도 있거든요. 저런 고퀄 잉여짓이라고도 표현할 수 있는 일을 할 수 있는 의지와 에너지는 제 생각에도 좀 따로 타고나는 것 같아요.
저는 평일에는 밤에 수면시간 약간 희생해서 한 편보고 휴일에 별다른 일 없으면 오전, 밤에 두 편 정도 감상하는 편인데 그 중 간단한 감상글 하나 올리는 것도 귀찮아서 못하겠더군요 ㅋㅋ
2023.07.06 12:02
애정과 열정의 문제이려나요. 하기사 원래 '필'이란 단어가 도착증을 가리키고 있으니... 어떤 면에서는 레이디버드님이 말씀해주시는 기록벽 같은 게 따로 있어야할려나봅니다
2023.07.06 11:59
영화와 연애한다고 생각하면... 가능할 것 같습니다. 그리고 영화만이 아니라 컨텐츠 부피가 극도로 커져서 모든걸 다 본다는건 애저녁에 포기하고 어떻게하면 잘 걸러서 취향에 맞는 것들을 골라보느냐의 문제가 된듯 합니다. 하루에 여러 편 영화보기 이런 부분은 성향차가 아닌가 싶어요. 책도 마찬가지거든요, 하나를 완전히 이해될 때까지 느리게 읽는 법과, 밥 먹듯 꾸준히 계속 읽고 다음 책으로 넘어가는 방법이 있죠. 모든 끼니의 영양소가 완벽하게 흡수되어 몸과 일체가 되는건 아니지 않겠습니까 하하.
2023.07.06 12:04
저는 영화보기가 독서와 일대일로 비교가 되기에 좀 안맞는다고 느끼는데, 독서는 영화보기보다 훨씬 더 주도적이고 머리를 많이 쓰는 취미이지만 자기가 덮고 싶을 때 덮어버릴 수 있습니다. 하지만 영화보기는 그게 안됩니다. 정해진 상영시간과 리듬이 있기 때문에 반드시 두시간을 소모해야되죠. 그리고 그 영화를 제대로 보려면 극장을 가야합니다. 어떻게 해서든 물리적으로 최소한 3시간 30분은 걸립니다. 그래서 그 영화한편의 감상을 끝마치고 감상까지 전문적으로 남기시는 분들의 물리적 열정이 좀 신기하거든요.
2023.07.06 16:08
제 경우는....
1. 일단 칼출근 그리고 칼퇴근이 늘 가능한 직장이 있습니다. 9시 반이나 그전에 출근한 다음엔 적어도 6시에 퇴근합니다.
2. 자가용이 있고 비교적 한산한 대전광역시에 주거하니 도시 반대편에 있는 대전 CGV에도 금세 갈 수 있습니다. 여기에다 10분 이내 거리에 신세계 메가박스 (돌비 시네마)가 있으니 금상첨화.
3. 평일엔 영화 한 두 편 관람 그리고 리뷰인데, 주말은 거의 논스톱으로 진행됩니다. 주변 커피집 그리고 스터디 카페 휴게실 신세 많이 져 왔습니다.
4. 전 그저 리뷰어에 불과하니, 어떻게 보고 평하는지는 다른 분들에게서 배워왔지요. 로저 이버트 영감님과 듀나님으로부터 지난 20여년 간 진짜 많이 도움 받았습니다.
5. 그런 동안 틈틈이 흥미가는 책들 읽어봅니다.
6. 하여튼 간에 볼 건 많고 시간이 충분하지 않으니, 보고 나서 바로 자판 두들겨대는 건 습관이 된 지 오래입니다. 정보 수집, 스틸 컷 확보, 자판 두들기기, 약간의 교정 및 검토, 그리고 블로그 포스팅 및 SNS 메세지 올리기까지 시간은 총 약 90-100분 정도입니다.
7. 하지만, 이제 40대 접어드니 슬슬 건강 관리 및 페이스 조절해야 하지 않나 싶어요.
2023.07.06 19:20
아하. 설명 감사합니다. 이렇게 들으니 또 궁금한 게, 어떤 영화의 감상은 극장에서 나오면서 휘발되기 시작하는 어떤 즉효적인 감흥이 있고 또 하나는 시간이 걸려서 갑자기 찾아오는 깨달음 이렇게 두 종류가 있다고 생각하는데 이럴 경우 후자의 감상은 어떻게 기록하거나 정리하는지가 궁금합니다. 저는 한 2주전이었나 [비디오드롬]을 보고 나서 이 영화를 어떻게 정리해야할지 계속 고민하고 있었는데 문득 마지막 장면의 감정적인 의미? 같은 게 빡 와닿았거든요. 이런 감흥은 어떻게 기록해야하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2023.07.06 20:05
전 제 머릿속에 꽤 오래 간직하다가 재감상/비평 때 써먹지요. 곧 어느 스콜세지 영화 평에 이 전략 적용시킬 예정입니다.
2023.07.06 19:02
지금 Sonny 님께서 이 게시판에 쓰시는 글의 질과 양에 대해서도 '저 사람은 대체 어떻게...?' 라고 경악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만 말씀드리고 싶어요.
2023.07.06 19:20
ㅋㅋㅋㅋㅋㅋ겸연쩍군요
2023.07.07 08:59
정답이네요 ㅋㅋㅋㅋ 애초에 많이 본다고 씨네필은 아니니까요 즐기고 싶은 만큼 즐기면 되는거같습니다
씨네필에서 약간 변종(?)으로 VOD필로 되는 방법도 있습니다ㅎㅎ (그래서 제가 신작 VOD 중독..허허) 자매품 OTT필..
코로나 유행 이후로 영화관 -> VOD까지의 시간이 엄청 줄긴 한 것 같더라고요ㅎ
근데 저는 요새 다른 이유로 영화관에 가는 게 어렵고 직장과의 병행은.. 좀 쉬다가 한산한 심야 보러 가는 걸로 조율했던듯요? 껄껄껄
자동으로 고퀄 감상 술술 나오는 분으로 듀게에도 로이배티님 계시죠. 쓰시는 글 마다 "힘빼고 휘두르는" 고수의 향기가 느껴집니다!! 이자리를 빌어 존경을... 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