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05.29 23:43
- 1992년작이니 31년 되었군요. 런닝타임은 1시간 43분. 스포일러는 따로 적진 않습니다만 짤 중에 들어가 있습니다. 원치 않으면 피하시길.
(아아 이 어찌나 예술적인...)
- 나름 사이키델릭(?)한 스타트를 끊습니다. 그러니까 연인 사이인 이승철과 나현희가 허름한 여관방에서 오골오골 근본 없이 로맨틱한 대화를 하다가 갑자기 문짝을 부수고 들이닥치는 조폭들에 의해 찢어지게 되는 과정을 각각의 입장에서 한 번씩 보여주며 시작하는데, 정말 그 허세 쩌는 로맨틱 대사와 배우들의 기가 막혀 어이가 사라지는 연기, 그리고 홈비디오 아닌가 싶게 찍어 놓은 어두컴컴 화질 덕택에 뭔가 되게 의미 심장한 환상을 보는 듯한 기분이. ㅋㅋㅋ
암튼 그러다 송승환의 나레이션으로 갑자기 미주알 고주알 설정 요약을 하면서 시작합니다. 근데 그게 길어요. 송승환과 이승철은 배다른 형제구요. 송승환은 곱게 잘 자라서 프로 사진 작가로 한창 뜨는 중이고. 이승철은 아빠에게 쏘쿨하게 버림 받고 부산에서 험하게 자란 끝에 조폭이 되었다네요. 나중에 이승철의 존재를 알게 된 송승환이 찾아가서 인사를 건네고, 친형제보다 더 절친한 사이가 되었다든가 그렇구요. 근데 이승철은 자기 조직 보스의 여자 나현희랑 눈이 맞아서 어찌저찌 고생을 하다가 결국 조직 돈 500만원을 들고 여자와 도주를 했으나, 당연히 붙들려서 찢어지게 됐고 그게 도입부에 두 번을 보여준 그 상황입니다. 그 과정에서 나현희는 조폭들에게 칼침을 맞아 한쪽 뺨에 흉터가 생긴 채로 붙들려가 나이트 클럽 공연을 하며 살아가고. 간신히 500만원을 들고 도망친 이승철은 나현희를 찾아 헤매고... 대략 이 정도 상황에서 이제 요약 나레이션은 끝나고 본격적인 이야기가 시작됩니다만.
문제는 대체 이 영화에 '본격적인 이야기'랄 게... ㅋㅋㅋㅋ
(매일 네시 십 일분이 되면 너는 나를 생각하게 될 것이야!!)
- 다들 아시다시피 박찬욱의 감독 데뷔작입니다. 각본에도 직접 참여했구요. 이승철과 나현희에게도 데뷔작이죠. 그리고 그 셋 모두가 부정하고 싶어하는 모두의 흑역사입니다. 박찬욱이야 다들 아시다시피 뭐 그렇지만 나현희는 이것 한 편으로 영화를 끊었고 이승철은 이것 한 번으로 연기를 완전히 끊었죠.
전부터 언제 한 번 보긴 해야지... 하다가 결국 이번에 봤는데요. 참 여러가지로 기대 이상입니다. 아니 정말 진심으로 이 정도의 영화(?)일 거라곤 상상을 못 했어요. 그렇지 않습니까? 나중에 결국 거장급으로 큰 감독이라고 하면 데뷔작이 아무리 구려도 최소한의 기대치 정도는 충족을 시키는 경우가 많잖아요. 최소한의 완성도라든가, 최소한의 재미라든가, 이도저도 아닐 경우엔 감독 스타일이라도 확실하게 드러난다든가. 근데 이 영화는 그 중 어느 것도 충족을 못 시킵니다. 한 마디로 요약하면 '그냥 엄청 못 만들어서 웃긴 영화'에요. ㅋㅋㅋㅋㅋ
(영화 얘기 하지 말랬지!!! 라는 듯한 이승철씨의 살벌한 표정.)
- 뭐 그렇습니다. 엄청난 저예산으로 힘들 게 찍은 거 알죠. 이래라 저래라 제작자의 입김도 왜 없었겠습니까. 송승환을 제외하면 주연 배우 둘이 다 쌩초짜였던 것도 감안해야죠.
이런 부분들 다 이해하고 봤습니다. 장면장면의 배경들이 이야기와 안 어울리게 넘나 험블한 90년대 아무 가정집인 것도, 어두운 장면 들어가면 조명도 제대로 못 비춰서 화질 깨지는 그림이 나오는 것도, 이승철이 '일요일 일요일 밤에' 꽁트 톤으로 비장한 장면을 소화하는 것도. 뭐 다 이해하면서 그냥 즐겁게 봤거든요.
근데 아무리 봐도 이건 박찬욱이 스스로 원해서 넣은 거다! 싶은 부분들까지 앞서 얘기한 부분들 수준으로 허접하다는 게 문젭니다. ㅋㅋㅋ 도입부의 어설픈 왕가위, 아비정전 흉내는 그냥 보는 제가 감독과 함께 부끄러워질 뿐이고. 중간중간 들어가는 박찬욱st. 개그들도 이후에 본인이 보여준 것들 대비 정말 썰렁해요. 채플린 영화 보러 극장 가겠다는 주인공에게 조폭 아저씨가 "뭐? 찌푸린? 넌 왜 굳이 찌푸린 영화 같은 걸 보러 가냐? 우울하게" 라는 드립을 치는데 정말 소파에서 그대로 얼어 붙었...
(유일하게 멀쩡한 연기를 보여주는 송승환입니다만. 배다른 동생의 애인을 짝사랑하는 비극적 랑만 캐릭터... 를 소화하기엔 좀. ㅋㅋ)
- 다만 이걸 아예 작정하고 깔깔 웃으며 보는 괴작! 으로 생각하고 본다면 꽤 괜찮은 작품이기도 합니다.
일단 우리 승철씨. 정말 연기 더럽게 못합니다만, 박찬욱의 그 부끄러운 새벽 2시 or 내 안의 흑염룡 갬성은 어떻게 봐도 부끄러운 것이기 때문에 이승철의 그 발연기가 그 감성의 부끄러움을 200% 강화시켜 보여주는 게 오히려 적절한 것이 아니었나. 이런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ㅋㅋㅋ
웃기는 게 이 양반, 키스 장면은 잘 해요(...) 되게 자연스럽게 리얼하게 잘 하더군요. 그리고 아주아주 일상적인 장면들에선 그냥 그 시절 기준 귀공자st. 소리 들었던 뽀얀 얼굴이 나름 귀여워 보이기도 하구요. 게다가 애초에 후시 녹음으로 다른 사람이 대사를 더빙했기 때문에 대사 처리는 본인 책임은 아니고. 근데 뭔가 격렬한 것을 표현할 때, 특히 고통을 표현할 때 연기가 정말 대단합니다. 막판에 부상을 입고 비틀 절뚝거리며 공중 전화기로 달려가는 장면이 있거든요. 제가 살면서 본 고통 표현 중에 가장 괴이한 연기였다... 라고만 해두겠습니다. ㅋㅋㅋ
그리고 송승환은 이 영화의 몇 안 되는 경력자 겸 나름 유명인으로서 가장 안정적인 모습을 보여주는데. 문제는 이 영화의 아비정전 흉내 나레이션이 이 분에게 몰빵되어 있다는 겁니다. 이 나레이션들은 거의 9할이 고독한 활화산처럼 혼자서만 마구 격하게 터지는 감성으로 채워져 있어서 도무지 감당이 안 됩니다. 하긴 누구를 데려다 시켰어도 감당 못 했을 거에요. 그냥 감성 터지는 것만이 문제가 아니라 그 결과물이 매우 처절하게 구리거든요.
뭐... 구구절절 다 적긴 그러니 마지막으로 하나만 더 지적하자면, 이 영화의 민망함은 초짜 감독 박찬욱의 야심이 상당히 투명하게 드러나는데 그렇기 때문에 그 야심와 결과물의 괴리까지 실시간으로 선명하게 보인다는 데서 나옵니다. 중간에 이승철이 나현희를 데리고 무슨 빈 놀이 공원 같은 데 가서 겁나게 로맨틱한 대사를 마구마구 발사하는 장면이 있거든요. 여기를 바다라고 생각하라느니 어쩌고 저쩌고 하는 대사였는데. 대충 가난한 연인들의 애틋한 로맨스를 보여주는 장면으로 이것저것 레퍼런스도 떠오르고 그러는데, 그 와중에 제 눈에 보이는 건 10대 학생들에게 스마트폰 갖고 1주일 안에 5분짜리 이야기 하나 만들어 오라고 시켰을 때 보게될 것 같은 결과물입니다. ㅋㅋㅋ 아니 정말 안 웃을 수가 없다니까요.
(고통!! 비극!!! 애절!!!!! 을 온몸으로 표현 중인 이승철씨. 그리고 이 장면을 보는 제 표정은 아마도 좌측 단역 분과 비슷했을 것...)
- 그래도 설마 박찬욱인데! 건질 게 정말 하나도 없을 수가 있니? 라고 물으신다면. 뭐 그런 마음으로 영화를 째려본다면 없진 않습니다.
일단 몇몇 장면에서 예쁜 벽지가 좀 보이구요(...) 위에서 말씀드렸듯이 자꾸만 툭툭 튀어나오는 썰렁 개그 같은 데서 박찬욱이 사랑하던 B급 감성을 느낄 수도 있겠죠.
그리고 몇몇 장면들은 '의도대로 찍혔다면 괜찮았겠다' 라는 생각이 들기도 해요. 막판 나현희의 패션쇼와 이승철의 상황이 교차 편집으로 전개되는 부분 같은 건 장면과 어울리는 정상적인 음악을 깔고 제대로 찍어서 제대로 붙였다면 평범하게 괜찮았을 거고. 이승철의 공중전화 씬 같은 것도 평범하게 정상적인 배우가 연기했다면 애절까진 아니어도 박찬욱이 노렸던 홍콩 영화들 장면 비슷한 느낌은 줄 수 있었겠죠.
하지만 이 영화를 그렇게 봐야할 이유는 '어쨌든 이게 그 박찬욱의 데뷔작이니까 뭐라도 건질 걸 찾아보자' 라는 것 밖에 없는데. 아무리 박찬욱이라고 해도 어쨌든 결과적으로 분명히 완벽하게 못 만든 영화에 굳이 그런 식으로 의미를 부여할 필요가 뭐가 있을까요. 전 그냥 웃고 넘겼습니다.
(받아랏! 내 안의 흑염룡!!!!!!)
- 결론적으로, '내 생전에 박찬욱 전집 콜렉션이 나올 일은 없을 것이다' 라는 박찬욱의 드립이 농담이 아닌 뼛속 깊이 진심에서 우러 나온 발언이라는 걸 확인할 수 있는 즐거운 시간이었습니다. 좋게 말하자면 박찬욱은 노력파, 성장형 감독이었던 것이구요. 이딴 물건(...)을 내놓은 사람에게 두 번이나 더 기회를 줘서 기어코 JSA를 뽑아내고 한국을 대표하는 거장으로 키워낸 충무로는 사실 따스함이 넘치는 사랑의 거리였던 거냐... 라는 생각을 하게 만든 훌륭한 작품이었습니다.
이 영화에서 정말 순수하게 좋은 점을 찾아본다면 그냥 나현희의 미모 밖에 없어요. 그 시절에도 예쁘다고 생각했지만 이제 와서 다시 보니 정말 미인일 뿐더러 2023년으로 샥 옮겨 놓고 활동을 시켜도 전혀 위화감이 없을 것 같은 현대적인 미인이시더군요. 연기도 그렇게까지 못하진 않습니다. ㅋㅋ 제가 원래 배우들 연기에 관대해서 그런 걸 수도 있지만 그냥 신인답게 무난하게 못해요. 물론 영화 내내 이 분과 함께하는 이승철의 압도적 연기력 때문에 상대 평가를 하게 되는 면은 있지만요.
뭐 그렇습니다. 아주아주 즐거운(!) 100분이었구요. 한국의 영화 감독 지망생 여러분들, 힘들고 절망스러울 때마다 이 영화를 보세요. 희망이 솟아날 겁니다!!!!
(어쨌든 나현희는 예뻤습니다!)
+ 둘 중에 누가 나은 감독이라고 비교를 할 생각은 없습니다만. 이걸 보고 나니 데뷔작 기준으로 봉준호는 참 엄청났구나... 라는 생각이 어쩔 수 없이 들구요. ㅋㅋ
++ 나현희가 참 예쁜 가운데 보는 내내 손담비 데뷔 초 생각이 나더라구요. 그리고 나현희를 검색해보니 이 분이 한참 전에 슈가맨에 나오셔서 이미 '손담비 닮았다'는 커뮤니티 글과 인터넷 기사가 수백 개가 쏟아져나와 있군요. 아니 물론 손담비가 나현희를 닮은 거겠습니다만.
(내가 미이쳐써~ 하는 노래를 시켜보고 싶어집니다.)
2023.05.30 01:27
2023.05.30 11:21
아니 왜요! 어지간한 박찬욱 감독 팬들은 다 보지 않았을까요? ㅋㅋ 옛날에 비디오로 본 사람도 있을 거고, vod도 출시 됐고 디비디도 나온 걸로 압니다. 웃기는 건 감독이 전혀 관여하지 않고 걍 누군가(?)가 판권 사서 만들어 팔고 있다는 거... 하하.
스토리도 참 구려요. 정확히 말하면 걍 그 시절 홍콩식 멜로-느와르를 거의 그대로 갖다가 이식한 건데, 이야기만 놓고 보면 정말 무엇 하나 새로울 것도 없고 그 시절 방화들 수준입니다. 박찬욱의 흑역사가 매우 궁금해서 참을 수 없는 분들만 보심 될 듯.
2023.05.30 12:05
벽지 집착 외에도 저 채플린 - 찌푸린 이런 저질 말장난 개그도 나름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는 감독님 성향인 것 같네요.
'친절한 금자씨'에서 "가불은 불가." 이거 생각해내고 혼자 엄청 웃으셨었다는 정서경 작가의 증언이 있었죠 ㅋㅋ '헤어질 결심'에서도 박용우가 저 애널리스트입니다. 그 애널은 아니구요 하하! 이런 것도 있었고
2023.05.30 14:58
근데 그게 영화가 멀쩡하게 잘 만들어져 있으면 '박찬욱의 B급 취향'으로 보이는데, 이렇게 영화가 전체적으로 엉망진창이면 '농담까지 허접해!'가 됩니다. ㅋㅋㅋㅋ
2023.05.30 01:38
갑자기...박남정 출연 영화, 이상은 출연 영화랑 배틀 한번 붙여보고 싶네요.
2023.05.30 11:23
배틀 붙여보시고 결과를 알려주시면 신나게 읽겠습니다!! 하하.
2023.05.30 08:46
때깔은 좋았던 영화로 기억했는데 생각해 보니 제가 본 적도 없군요. ㅋㅋㅋ 당시에 내용은 형편 없지만 때깔은 좋았다고 들은 기억입니다.
나현희 씨는 저 비주얼로 왜 크게 못 떴는지 아직도 궁금해요. 90년대에 일본 잡지 모델 분위기 풍기는 신인들이 꽤 등장했던 것 같은데 지금까지 지명도 유지하면서 활동하는 분은 딱히 떠오르지 않네요. 인기 유지는 힘든 일이지만 레전드라고 기억되는 배우 중 어쩌면 한 명도...이런 느낌입니다. 그러고 보니 제가 저런 얼굴 좋아하는 모양입니다. 손담비 씨 얼굴도 좋아하거든요.
이승철 씨가 80년대 중후반엔 미소년 이미지였다는 걸 기억하는 분이 계실지. 하긴 지금 그때 화면 보니까 김태원 씨도 볼이 통통하고 귀엽더군요. 나름 90년대 영화에 왜 80년대 소린고 하니, 저때도 꽤 젊었었는데 이미 그때의 그 미모는 아니었던 건지 소녀들이 단체로 콩깍지가 씐 건지 궁금해서 말입니다.
2023.05.30 11:33
그 때깔이란 게 뭐랄까요... 흔히 말하는 '어쨌든 때깔은 괜찮음' 같은 느낌을 생각하심 안됩니다. 때깔부터 참을 수 없이 구릴 때가 더 많아요. ㅋㅋ 다만 드문드문 당시 방화 기준 좀 참신한 때깔들이 보일 때가 있는데 아마도 그런 부분들에 좋은 인상을 받은 관객, 비평가들이 있었던 듯 하죠.
저 시절 데뷔한 신세대 비주얼(?) 여배우들 중에 생존자라면 이영애 정도... 일까요. 옥소리도 그 시절에 참 예뻤는데 결과는 다들 아시다시피이고. 말씀대로 잠깐 반짝하다 사라진 여배우들 몇몇 얼굴이 떠오르네요. 다들 잘 살고 계시겠죠.
저 짤들이 다 이상하게 나와서 그렇지 영화를 보면 이승철 이쁘장하긴 합니다. ㅋㅋ 다만 자꾸 수염을 기르는데 그럴 때마다 박명수 생각이 나서 많이 괴롭구요. 하하.
2023.05.30 09:08
센스 있는 장면이 있긴 한데 요새 박찬욱 영화는 재밌는 장면이 도배가 되어있다면 진짜 가끔 나와요 어이없게 안좋은 건 너무 많구요 그래도 무난하게만 재밌는 영화보다는 이렇게 엉망인데 괜찮은 구석이 있는 감독이 대성할 가능성이 있는 것 같습니다
2023.05.30 11:36
근데 사실 90년대~00년대 괴작들 보면 엉망이면서 괜찮은 구석만 조금 있는 영화들이 꽤 있거든요. ㅋㅋ 다른 감독들은 거의 사라졌지만 끝까지 살아남아 이 정도까지 온 거 보면 어쨌든 박찬욱이 능력자이긴 합니다.
2023.05.30 09:44
이 영화가 그 영화로군요. 박찬욱 감독이 이 영화 얘기가 나오면 몸을 배배꼬는 느낌이 들었어요. 실제로 꼰다기 보다 말투나 자세가 그런 분위기를 줬어요. 책은 절판되고 작가가 거부하면(생존해 있는 경우) 더이상 안 나오기도 하고 더 퍼져나가기 어려운데 영화는 다르겠죠. 박찬욱 감독이 거장이 될수록 누군가(본문 쓰신 분) 이렇게 보고, 앞으로도 영영 따라다닐 테니까 왠지 흐뭇합니다. (글 제목 보고 뭐 먹으면서 보면 안 되겠지 했습니다. 모니터에 뿜을 것 같아서요. 역시 많이 웃었어요.)
2023.05.30 11:50
배배 꼴만 하죠. ㅋㅋㅋ JSA 이전은 아예 잊어달라고 여기저기서 말하고 다니셨던데 찾아보면 다 농담 아니라 진심으로 보이더라구요.
요 영화의 경우엔 그래도 비디오 테잎만 내놓고 묻혀졌던 상태라 박찬욱 맘이 편했을 것 같은데. 누군가(?)가 굳이 판권 사서 디지털로 만들어 vod 서비스가 가능해졌다고 하더라구요. 뉘신진 몰라도 박찬욱의 진짜 열혈 팬이거나 아님 원수거나... ㅋㅋㅋㅋㅋ
2023.05.30 13:07
2004년에 박찬욱이 [올드보이]로 칸에서 수상한 뒤에 강남 쪽 어느 작은 극장에서 그때까지 만들었던 영화를 전부 모아서 상영하는 회고전이 열렸는데 그 덕분에 이 영화를 영화관에서! 필름으로! 보았습니다. 박찬욱 영화를 막 무조건 엄청나게 좋아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뭐든 일단 흥미롭게는 보는데 이것만은 유일하게 재미가 없었어요. 기억나는 것도 없고요. 딱 하나, 결말부에서 한밤중 다 죽게 생긴 이승철이 병원에 실려가는데 거기가 동물병원이라는 걸로 웃기려고 드는 연출이 있었던 기억이 날 듯 말 듯 합니다. 지금은 그때보다는 '못 만든' 영화를 훨씬 잘 보게 돼서 다시 보면 어떠려나 싶긴 한데 역시 손이 가지는 않네요.
그건 그렇고 마찬가지로 그때 처음 본 다음 장편 [삼인조]는 참 재미있었어요. 처음 볼 때 워낙 많이 웃어서 다시 가서 또 봤죠. 아직 [JSA]를 만들기 전에 KINO에 썼던 글을 돌이켜보면 박찬욱도 [삼인조]를 심하게 부끄러워했던 것 같지는 않은데, [JSA]를 데뷔작으로 알아줬으면 좋겠다는 발언이 돌기에 '이제는 [삼인조]도 버리는 건가' 싶어서 조금 쓸쓸했어요. [달은... 해가 꾸는 꿈]은 이렇게 복원돼서 매우 쉽게 볼 수 있게 됐고 심지어 블루레이까지 나왔는데 한결 괜찮은 다음 작품인 [삼인조]는 보기 어렵다는 게 아이러... 엉? [삼인조]도 이제 웨이브, 왓챠, 유튜브에 다 있네요!?
2023.05.30 15:02
동물병원인데 이름이 '가축병원'인 동물병원이었어요. ㅋㅋㅋ 거기에서 회심의 명대사를 노린 뻘대사가 나오죠. '짐승처럼 살아온 내가 이런 곳에서 마지막을... 인생이란! 크윽!!' ㅋㅋㅋㅋㅋㅋㅋ
삼인조는 말씀대로 여기저기 이미 다 올라와 있더라구요. 검색해보니 2019년에 디지털로 리마스터 되었다고 합니다. 이것도 조만간 봐야죠. 하하.
2023.05.30 13:14
장가는 갔고 독에 쌀은 떨어지고 하여, 조감독 그만두고 월급쟁이가 되기로 했다. 값싼 외화를 들여다가 큰 회사에 이문 붙여 되팔거나 재주껏 개봉시키는 일을 하는 구멍가게였다. 자막도 번역하고 보도자료도 만들고 극장 기획실도 찾아다니고 포스터 디자인도 하고 광고 카피까지 지어가며 밥을 먹었다. 가난한 시인이 출판사 편집장 노릇을 호구지책으로 삼는 일과 비교하고 싶었지만, 사실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것도 내심 잘 알고 있었다. 퇴근 후 시를 쓸 수는 있지만 퇴근 후 영화를 찍을 수는 없으니까.
돈도 조금 모으고 대기업과 안면도 트게 된 사장이 이제 제작을 하자고 했다. 한국영화가 죽을 쑤고 있던 91년 당시, 달랑 조감독 두 편 경력의 서른도 안된 꼬마가 감독이 된다는 건 지나던 개도 웃을 일이었다. 진작 데뷔한 선배를 찾아갔다. "악조건에서라도 데뷔하는 게 좋우, 호시절을 기다리는 편이 좋우?" "각본 들고 영화사 찾아다닐 때 말야, 아무리 망했대도 감독으로 가는 거랑 감독 지망생으로 가는 거랑은 대접이 틀리다, 너."
요즘 말로 하면 초저예산 인디 영화였다. 내가 좋아하던 배우 최재성 씨를 기용할 수도 없었다. 당시 방송 출연이 금지돼 있던 가수 이승철 씨가 영화에 나오면 그 얼굴 보려고 십대 여자애들이 많이 올 거라는 제작자의 주장 떄문이었다. 그래도 워낙 바쁜 사람이었으므로 첫 촬영 며칠 전에야 첫 대면을 할 수 있었다. 그 자리에서 승철 씨가 했던 첫 마디는 기억할 만하다. "영화 줄거리가 뭐예요?"
〈달은... 해가 꾸는 꿈〉, 후앙 미로인지 파울 클레인지, 어떤 화가의 잠언이었다. 데뷔작이 준 교훈이 하나 있다면 알쏭달쏭 멋 부린 제목은 짓지 말아야겠다는 것. 이후로 〈삼인조〉, 〈공동경비구역 JSA〉, 〈복수는 나의 것〉이 나오게 된 배경이다.
흥행도 비평도 좋지 않았지만 당시 활발하게 일하던 조감독들 몇이 몰려와 영화가 새롭다며 칭찬해준 기억은 난다. 그들이 훗날 하나같이 한국을 대표하는 감독이 된 건, 순전히 내가 그때 기원한 축복 덕분이라고 지금도 나는 믿고 있다.
*** 그래도 막상 촬영에 돌입하자 이승철 씨는 최선을 다해 일해주었다. 과연 프로페셔널이라 부를 만했다. 그때의 제작자와는 훗날 다시 만나 〈복수는 나의 것〉을 만들었다. '훗날 한국을 대표하는 감독이 된' 분들이란 이현승, 김성수, 여균동 감독을 말한다.
2023.05.30 15:03
마지막에 하는 이승철 얘기가 얼마나 진심인지는 박찬욱 본인만 알겠지만, 방금 영화를 본 제 느낌으론 분명히 열심히는 하고 있다는 느낌이었어요. 되게 못하긴 하는데 뭐 이승철 인생에 연기 경력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또 촬영 여건이 감독이 연기 지도에 그렇게 열중하기도 힘들었을 것 같기도 하고... 암튼 열심히 하는데 정말 못하는구나! 라는 생각에 더 웃으면서 봤습니다. ㅋㅋ
2023.05.30 15:55
박찬욱 작품이라면 웬만한 똥망작이라도 찾아 보는데 이승철의 벽만은 넘지 못하고 포기했습니다. ㅋㅋ
2023.05.30 22:57
뭐 호감 가는 아저씨는 아니긴 하지만 이 영화에선 그냥 웃겨서 좋습니다(?) 참 열심히 하거든요. 열심히는 합니다. 열심히... ㅋㅋㅋㅋ
아니 이걸 보셨다구요? ㅋㅋ 두번째 작품 '삼인조'는 tv에서 우연히 후반부만 본 적이 있었는데 엔딩 하나는 참 인상적이었다 뭐 그런 기억이 남아있어서 나~중에 처음부터 감상을 해보니 확실히 부족한 부분이 많이 눈에 띄더군요. 그래도 뭔가 당시 비슷한 장르 국내영화들이랑은 나름 차별화되는 감각이나 훗날 대성할만한 가능성이 보이는 부분들도 있는 느낌인데 이게 이 감독의 미래를 아는 입장에서 봐서 그렇게 느껴지나 싶기도 하구요 ㅋㅋㅋ 박찬욱 감독님이 어디 인터뷰에서 사람들이 자기 데뷔작을 JSA로 착각하고 있는데 계속 그랬으면 좋겠다 뭐 이런 말도 했었다죠.
이건 대충 적어주신 줄거리나 감상을 읽어보니 도무지 호기심에서라도 시도해볼 엄두는 나지 않는군요. 이승철 씨는 그래도 이 경험으로 연기쪽은 빠르게 포기하고 본업에만 충실하는 계기가 된 것이 아닐까 싶고 박감독님은 이 실패를 교훈삼아 계속 노력해서 지금의 거장의 모습에 이르렀으니 다 잘 된 겁니다? ㅋ 나현희 씨는 정말 손담비 닮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