셰익스피어의 리어왕을 읽었습니다

2023.05.10 18:11

Sonny 조회 수:357

361188-274945-3512.jpg


서울아트시네마에서 상영하는 구로사와 아키라의 [란]을 최대한 정확히 보고 싶어서 그 원전인 리어왕을 다시 읽었습니다. 마침 밀리의 서재에 있길래 펭귄 판본과 셰익스피어 연구회 판본 두개를 차례대로 읽었습니다. 셰익스피어 연구회 판본은 상대적으로 대사가 좀 정중하고 온건한 반면 펭귄 판본은 대사가 엄청나게 거세고 격정적이더군요. 영어로 읽는다면 좋겠지만 그렇기엔 시간도 너무 모자라고 제 뇌용향은 한계가 명확한지라...


읽으면서 생각보다 쉬운 이야기가 아니란 걸 실감했습니다. 리어왕에는 자식을 오해하고 내치는 어리석은 부모의 이야기가 겹치면서 진행됩니다. 한명은 정직한 딸 코딜리어를 내치는 리어왕이고 또 한명은 서자 에드먼드에게 넘어가 적자 에드가를 내치는 글로스터입니다. 두 아버지가 자기 자식을 모함하고 내쫓는 죄를 저질렀으니 후에 받는 벌도 엇비슷해야 합니다. 그런데 이 두 아버지의 이야기는 죄와 벌의 측면에서 대칭을 이루지 않습니다. 리어왕은 자신의 왕위와 기사단 100명과 다른 모든 걸 박탈당하고 폭풍우치는 광야에서 방황합니다. 거지꼴이 되죠. 그런데 글로스터는 두 눈이 뽑힙니다. 육체적으로 훨씬 더 잔혹한 형벌을 받게 되죠. 글로스터는 자신의 죗값을 치르기라도 하는 것처럼 죽고 자신을 해하려한 서자 에드먼드는 에드가와의 결투 이후 죽습니다. 에드가는 복수에 성공하고 자신의 것이어야했던 재산과 명예를 수복하는데 성공합니다. 그런데 리어왕은 말 그대로 친족일가가 다 몰살당합니다. 심지어 유일하게 착한 딸인 코딜리어도 죽어버립니다. 두 아버지 다 어리석게도 자신의 자식을 내쫓은 죄는 유사한데, 리어왕은 어떤 구원도 받지 못합니다. (코딜리어가 마침내 리어왕을 광야에서 구해낸 것을 구원이라고 해석한다면 좀 다른 이야기일 수 있습니다만)


이 이야기를 교훈극으로 본다면 '그러지 말았어야 했다'는 금기를 어긴 부분이 나와야 합니다. 그런데 리어왕이 뭘 어떻게 했어야 했을까요? 아주 쉬운 대답으로 자식들을 차별하지 말고 재산을 공평하게 나눠줬으면 이 꼴이 안났을 거라고 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이 극 속에서 정확한 대답이 되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왜냐하면 고네릴과 리건, 이 두 딸은 악독하고 불효막심한 자식들이니까요. 리어왕은 아비로서 자신을 해할 자식과 자신을 챙길 자식을 구별해서 차등적인 대우를 할 명목이 있었습니다. 다만 그 구별을 정확하게 하지 못했을 뿐이죠. 코딜리어에게 재산의 1/3을 줬어도 뭐가 어떻게 됐을지는 모릅니다. 언니들은 워낙 탐욕스럽고 인정없는 자들이니까요. 그렇다면 아첨에 넘어가지 말았어야 했을까요? 글쎄요. 부모로서 달콤한 소리를 하는 자식을 이뻐하지 않기란 어렵습니다. 그에 반해 코딜리어는 말을 너무 쌀쌀맞게 하기는 했죠. 아버지를 아버지로서 사랑한다고 하면서 두 언니의 아첨을 비난했다면 더 좋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코딜리어는 할 말 없다, 라고 못을 박아버리죠. 여기에 냉정한 태도로 그래, 코딜리어는 원래 이런 데 아첨을 싫어할만큼 강직한 딸이지, 하고 납득하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그렇다면 뭘 해야할까요? 성질머리를 죽여라? 흠... 원래 나이가 들면 성질이 더 과격해지고 또 왕이라면 그러지 못하리란 법도 없습니다. 리어왕의 원래 성격이 어떠한지는 알기가 어렵지만, 최소한 이 극에서는 딸들에 대한 분노로 미쳐있다는, 원인제공자들에 의한 후천적 변화라고 양해할만한 여지가 있죠. 그러니까 이 이야기의 교훈을 찾으려면 몹시 난감해지고 맙니다. 글로스터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그가 에드먼드의 속임수에 넘어갔던 건 이 서자를 적자와 마찬가지로 대하려했던, 공정때문이었습니다. 아마 그래서 "비극"이라고 칭하는 거겠죠. 


리어왕에서 흥미로운 캐릭터는 바로 리어왕을 따라다니는 광대입니다. 그는 이 극에서 혼자만 세상의 법칙을 초월하듯 리어왕을 계속 놀리고 있습니다. 리어왕도 이 광대에게 크게 화를 내지도 않고요. 아무리 봐도 정신분석학적으로 들여다보고 싶은 캐릭터입니다. 리어왕이 자신을 자책하기 위해 만들어낸 환상이 아닐까요? 


이런 부분들이 구로사와 아키라의 [란]에서 어떻게 나올지 한번 봐야겠습니다. 아직 못쓴 부분이 많지만 서아트까지 가는 길이 가깝지 않은 관계로 패스!!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공지 제 트위터 부계입니다. [3] DJUNA 2023.04.01 30089
공지 [공지] 게시판 관리 원칙. 엔시블 2019.12.31 49100
공지 [공지] 게시판 규칙, FAQ, 기타등등 DJUNA 2013.01.31 359416
123254 [안습] 네팔대사관, "평양냉면 먹으면 국가보안법 처벌?" [5] tigertrap 2010.07.22 3419
123253 [신간] 예언, 언데드 백과사전, 영원의 아이, 앰버 연대기, 포드 카운티, 달링 짐, 나이틀라잇, 그림포 등등 [2] 날개 2010.07.22 2208
123252 인셉션 그 장면에서 든 쪼끔 민망한 생각(스포있음) [7] 푸른새벽 2010.07.22 4371
123251 위로가 필요한 여름입니다. [12] 태시 2010.07.22 2733
123250 김상현 SF 『하이어드』 이벤트(세 곳) [1] 날개 2010.07.22 1525
123249 박해일씨!!! 득남했군요!! [8] 장외인간 2010.07.22 3606
123248 타인의 술버릇 [2] Death By Chocolate 2010.07.22 2261
123247 저도 인셉션(스포 있을지도........) [2] 감동 2010.07.22 2336
123246 SBS 참담한 실적 [3] Apfel 2010.07.22 3417
123245 인셉션 안본 분들은 나가주세요 (혼자 있고 싶습니다) [3] no way 2010.07.22 2964
123244 다 나가주세요 게시판에 혼자 있고 싶습니다(따라하기 입니다 내용 없습니다) [2] 가끔영화 2010.07.22 2399
123243 그냥 인셉션 스틸 몇장 (스포일러에 예민하다면 보지 마세요) [4] morcheeba 2010.07.22 5026
123242 잠시 후 김제동의 '7일간의 기적' 첫방송 시작하네요. [3] mithrandir 2010.07.22 2113
123241 시원한 tv theme song 가끔영화 2010.07.22 2023
123240 공포의 모녀 고냉이들 -심약하신 분들은 보시지 않는 것이... [5] Luna 2010.07.22 2779
123239 포화속으로 손익분기점 돌파 [2] 수수께끼 2010.07.22 2739
123238 코요태, 역시 기본은 하네요. [3] @이선 2010.07.22 2793
123237 도대체 왜 아들은 188cm, 딸은 168cm? [16] 빠삐용 2010.07.22 4372
123236 7인의 사무라이 지루해요? [16] 633 2010.07.22 2458
123235 송지나作 '왓츠업', 전혜진 하차-장희진 투입 [2] 달빛처럼 2010.07.22 3609
XE Log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