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03.27 21:49
'매혹'에 관한 영화라고만 생각했는데 확실히 영화에 관한 영화로군요. 좀더 범주를 넓혀 예술에 관한 영화라고 해도 무방하겠고요. 현직 예술가나 자신의 일부를 예술가로 정체화하고 있는 사람들이 보면 더 흥미롭겠어요. 사실 꼭 예술이 아니어도 될 것 같습니다. 가정과 양립불가능한 것이 예술뿐이겠나요? 도박이나 예술이나 다 또이또이아닌가 싶은데 말이죠. 물론 전자는 좀더 자기파괴적입니다만. 영화의 리듬이 느긋하면서도 처지지 않고 아주 좋았습니다. 오래 전 영화지만 뮌헨같은 경우 장르 속성때문이었는지 몰라도 가쁘면서도 뭐랄까, 넘 테크니컬한 느낌이었거든요. 후반부 캘리포니아로 가족들이 이주하고 나서는 살짝 루즈해지는 느낌이었습니다만, 그 호흡이 또 영화 속 상황과 맞물리는 듯도요.
인상적이었던 장면 중 하나는 헤드라이트 불빛 앞에서 춤을 추는 엄마에 상반된 반응을 보이는 자녀들의 모습이었습니다. 딸들은 민망해 했지만 주인공에게는 맨몸의 윤곽을 그대로 드러낸 엄마조차 그저 비일상적인 흥미로운 피사체였던 것 같군요. 현실 관계의 진짜 일면을 발견하기는 그 나중일이고요. 또 다른 인상적인 장면은, 주인공의 디렉팅에 상황에 몰입하고만 아마추어 배우의 모습이요. 컷 이후에도 걸음을 멈추지 못할만큼 얼마나 진실한 연기였던지요. 필름 속에서 엄청 멋진 주인공이 돼버리고만 어떤 이는 저거 다 페이크라며 당황해 했지만요. 사실 영화뿐 아니라 재현은 선택적이고 불완전한 진술일 수밖에 없죠. '언어'를 사용하는 일상적인 대화 속에서조차요. 어떤 걸 사실처럼 제시하고 또 사실로서 받아들일지는 각자의 욕망에 달린 문제겠고요. 특히나 멈춰있는 수십 개의 프레임이 움직이는 걸로 보이는 영화-활동사진이야말로 재현 혹은 속임수의 끝판왕이다보니 이 화두에 더 민감한 것 같아요. 이외 스필버그를 처음 매혹시켰던 이미지가 스펙타클한 것이었다는 게 흥미로웠습니다.
부모에 대한 묘사는 되게 균형잡혀 있네요. 정말 좋은 부모였나봐요. 부모를 인간적으로 충분히 이해하게 되었다거나. 크레딧에 데이빗 린치가 있길래 나중에서야 찾아보니 노장 감독 역할이었네요. 꽤 말라서 못알아볼 정도던데. 명상에 빠져 있다더니 살도 훅 빠진 것인지. 하기야 나이도 꽤 잡쉈고.. 미쉘 윌리엄스가 나오는 영화를 보기는 오랜만입니다. 역시 참 잘해요. 아, 영화에 나오는 피아노 연주곡들도 좋았습니다.
엔딩은 귀여워라, 풋풋 순수한 ET 갬성이 물씬나는 조크라니요.
매혹될 수 있는 무언가가 있고, 그에 대한 재능도 있으며, 마침 그 재능을 꽃피울 환경이 받쳐주고, 그 매혹된 무언가가 사회적으로 인정까지 받는 것이라면 진짜 행운 아닙니까. 스필버그의 사주는 엄청 좋을 것 같네요 ㅋ 넹, 뻘소리였음다... 여튼 다른 의미에서 이 영화가 계속 기억에 남게 생겼습니다. 왜냐면, 극장에서 혼자 봤거든요. 이렇게 혼자 보기는 처음이고요. 평일 낮이어서 그런지 관객이 저밖에 없더군요 >>> 궁금: 해당 회차에 예매한 관객이 없으면 그 회 영화 상영은 안하는 걸까요?
혼자만은 아니었지만 관객이 다섯 이하였던 또다른 영화들은 천재선언과 매트릭스2입니다. 좌석이 나무로 된, 되게 큰 옛날 영화관들에서 봤었던 기억.
대중적인 영화는 아니지만 대중적인 재미는 있습니다.
저는 이게 진짜 스필버그의 능력인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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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작 저는 기대보다 못할 가능성이 높다고 말씀드렸지만, 어쨌든 좋게 보셨다니 기쁘네요. 어쨌든 저는 아주 좋게 봤으니까요. ㅋㅋ
저는 실제 극장에서 관객 가장 적었던 게 바로 스필버그의 '이티' 재개봉이었습니다. 친구들과 넷이 갔는데 단관이 되어 버렸었죠.
그리고... 맞아요. 스필버그 할배가 근래들어 제 취향이 아닌 작품들(역사적 사건을 재구성하는 드라마라든가)을 자주 하시는데. 아 왜 자꾸 이런 걸 만드는 거야... 하고 투덜거리면서 보면 결국 재밌습니다. 그래서 더 대단한 사람이란 생각이 들기도 하구요.
저도 그 몰입 만빵 아마추어 배우 장면이 참 좋았어요. 계속해서 스필버그 자신의 영화 사랑에 대한 이야기를 늘어 놓다가 그 장면에선 자기 말고도 정말 순수하게 영화의 매력에 빠져든 평범한 사람들의 모습들까지 보여주는 느낌이었거든요. 살짝 감동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