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모의 신비

2023.02.04 13:46

Sonny 조회 수:500

"싸이버" 공간에서 먼저 친분을 획득한 사람들끼리 대면을 하고 만나는 순간은 묘한 감흥을 줍니다. 이 분이 그 분이시구나, 하고 뒤늦은 깨달음을 얻게 되죠. 어쩌면 모든 인간관계의 실패와 성공을 이렇게 함축적으로 체험하는 시간이 또 있을까 싶습니다. 인간관계라는 것은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타인에 대한 환상을 깨고 진실로 나아가는 과정이기 때문이죠. 닉네임, 프로필 사진, 온라인 공간에서 사용하는 말투나 전달하는 정보 같은 것들에 의존해서 만든 이미지는 얼굴과 목소리를 만나는 순간 완전히 부숴집니다. 환상 속의 타인은 늘 어디서 많이 본 편리한 이미지들로 꼴라쥬되어있지만 현실에서의 실체를 가진 사람은 훨씬 더 비표준적이고 개성적입니다. 익명성이라는 가면이 깨지는 그 체험은 우리가 모든 인간관계에서 체험하는 동시에 온라인 모임에서 정모를 통해 가장 극적으로 느끼는 순간이기도 할 것입니다.


온라인 모임에서의 정모가 주는 또 다른 감흥은, 사람이 캐릭터로 인식된다는 것입니다. 너무 당연한 소리이지만 현실에서 우리가 늘 잊고 사는 것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을 직위, 업종, 나이 같은 정보로 구성된 사회적 거리와 필요를 통해 인식합니다. 매일 타고 다니는 동네의 마을 버스 기사가 어떤 사람인지 우리는 사실 전혀 모릅니다. 그 사람이 버스를 안전하게 잘 모는지, 그것만이 중요하죠. 어떤 관계들은 기브 앤 테이크의 거래, 지배와 피지배의 권력이 굉장히 농도가 높습니다. 슬프게도 많은 사람은 수단이지 목적은 되지 못합니다. 그러나 타인을 그 자체로 목적의 가능성을 탐색할 때, 우리는 그 탐구심을 해명하기 위해 그의 "캐릭터"를 구축하고 분석합니다. 물론 캐릭터조차도 한 사람의 진실이라고는 할 수 없겠지만 아무튼 단계적으로 벽을 깨나가며 실체에 접근하는거죠. 이 사람은 이런 캐릭터이구나, 라고 서로 성급한 질문과 대답을 던지는 그 과정이 저에게는 굉장히 로맨틱해보이기도 합니다. 당신은 누구입니까? 나는 어떤 사람입니까? 라고 이렇게 사람 자체를 목적으로 추구하는 기회가 과연 얼마나 있을지요.


온라인 모임에서의 정모란 어떤 세계가 완전히 재구축되는 그런 사건입니다. 어떤 사람의 외양과 제스처와 목소리와 사소한 버릇과 취향을 통해 비로서 한 인격체의 이미지를 만들고 그걸 바탕으로 기존의 언어적 사교행위와 관계를 다시 쌓아나가게 됩니다. 이것은 단지 정보량의 문제는 아닌 것 같습니다. 전에는 닉네임만 알았던 사람을, 얼굴과 목소리까지 알았다는 게 아니라 이제 닉네임 위로 그의 또 다른 실체가 희미하게나마 덧씌워지는거죠. 환상과 오해가 한번 갱신되었습니다. 그렇다면 다들 "실체"를 알게 된 것일까요. 저는 거꾸로 생각합니다. 온라인 정모의 즐거운 점은 타인의 실체를 정확히 알아간다는 지점이 아니라 정모에 모인 사람들끼리 캐릭터를 오해하고 또 다른 환상을 만들어나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온라인 정모는 즐거운 소동극이자 역할극입니다. 술잔을 부딪히지만 서로 00님~ 이라고 부르는 그런 희한한 자리입니다.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공지 제 트위터 부계입니다. [3] DJUNA 2023.04.01 28303
공지 [공지] 게시판 관리 원칙. 엔시블 2019.12.31 46852
공지 [공지] 게시판 규칙, FAQ, 기타등등 DJUNA 2013.01.31 357003
122318 현대 아이오닉 6 커머셜 theforce 2023.02.08 291
122317 크리스마스 캐롤 (2009) catgotmy 2023.02.08 129
122316 보조배터리 어떤거 쓰세요? [7] 쏘맥 2023.02.08 378
122315 [왓챠바낭] 너무 멀쩡해서 이 시리즈(?)와 안 맞는 느낌. '아라한 장풍 대작전'을 봤어요 [18] 로이배티 2023.02.07 632
122314 멜 브룩스 세계사 part2가 42년만에 나오나 봅니다. [2] 무비스타 2023.02.07 445
122313 에피소드 #23 [2] Lunagazer 2023.02.07 88
122312 프레임드 #333 [6] Lunagazer 2023.02.07 101
122311 Edward R. Pressman 1943-2023 R.I.P. 조성용 2023.02.07 134
122310 KV626, Lunagazer님 댓글에 감사드려요 [2] 산호초2010 2023.02.07 247
122309 옛 카드와 편지를 읽어보시나요?(인생에 대한 새로운 깨달음) [10] 산호초2010 2023.02.07 345
122308 터키 지진 영상 보셨나요? [3] 말러 2023.02.07 498
122307 [넷플릭스바낭] 록우드 심령회사.. 캐릭터가 살아있는 영어덜트 판타지물 [13] 폴라포 2023.02.07 518
122306 "더 글로리" 정성일 배우의 매력에 빠져드신 분은 없나요? [13] 산호초2010 2023.02.07 686
122305 요즘 본 영화들에 대한 짧은 잡담... [6] 조성용 2023.02.07 480
122304 네이버 연예카테고리 댓글DB 일괄 삭제(예정) 예상수 2023.02.07 224
122303 장고:분노의 추적자 (2012) catgotmy 2023.02.07 169
122302 [핵바낭] 세기말, 세기 초. 충무로 격동의 세월 with 눈 먼 돈 [12] 로이배티 2023.02.07 602
122301 쿵후 쿵푸 [2] 돌도끼 2023.02.06 186
122300 영어 제목이 왜 사쿠라인가 했네요 [1] 돌도끼 2023.02.06 332
122299 프레임드 #332 [4] Lunagazer 2023.02.06 90
XE Log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