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12.07 21:44
뒤늦게 보았습니다. 스포일러 의식 않고 그냥 씁니다.
저는 박찬욱 감독의 영화를 좋아하는 팬은 아닙니다. 전반적으로 과잉되게 느껴지고 그리 코드가 잘 맞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봤던 작품 중에서 꼽자면 '복수는 나의 것'이 가장 강렬했고 무서웠고 잊히지 않네요. 이후에 본 영화들은 잘 만드는 것 같다고 생각은 해도 좋아한다고 할 수 있는 작품은 없었어요.
이 영화는 소식을 듣는 순간부터 보고 싶었어요. 보면 좋아할 것 같은 예감이 드는 영화였습니다. 이제 봤고, 예감은 틀리지 않았습니다.
마지막 바다 장면에서 눈물이 좀 났네요. 영화에 감동했고 다 본 다음엔 뭐 때문에 그랬는지 조금 생각해 봤습니다.
영화가 매우 고전적이었어요. 남녀간의 '사랑'이라는 주제 자체가 이제는 좀 말꺼내기도 뻘쭘한 고전적인 주제가 된 거 같아요. 저부터도 '사랑은 무슨...어디 쓰냐'라던가, '연애하는 영화라니 듣기만 해도 지루하네'라는 인간이 되었으니까요. 그런데 영화를 보고 나자 잊고 안 쓰던 근육을 쓰게 된 느낌, 공룡 화석을 눈으로 보는 감동과 비슷한 그런 느낌이 들었습니다.
이런 것이 가능하였던 건 모두 탕웨이라는 배우가 존재해서라고 생각합니다. 이 배우의 외모나 분위기에서 오는 고전적 우아함과 꼿꼿함(!)도 물론 역할을 하지만 그보다 이 배우가 중국인이면서 한국인과 결혼해 한국어를 어설프게 할 수 있는 존재란 점이 너무나 중요해 보입니다. 탕웨이가 아니었으면 이 영화는 불가능하였지 않을까요? 저만의 과장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탕웨이의 서래로 인해 언어(한국어)가 원래의 의미를 찾습니다. 서래에게는 언어(한국어)가 습관이 아닙니다. 자신이 쓸 때든, 남이 자신에게 하는 말이든 머리 속의 개념과 단어들을 일일이 연결짓고 제대로 쓰고 있는지 의식해야 하는 처지입니다. 언어에 집중하고 하나하나의 말이 소중할 수밖에 없어요. 이것은 사랑에 있어 천혜의 조건입니다. 사랑에 빠진다는 것 자체가 어떤 의미에서 상대의 언어에 집착하는 것 아닐까요. 상대의 말은 절대 흘려 듣지 못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있는 자리에서 많은 말이 오가는 중에도 특정인의 말을 골라내 듣고 의미 부여를 하곤 합니다. 그 상대가 나에게 건네는 말은 참으로 특별하고요.
하지만 타성적인 한국어 사용자인 해준은 어떨까. 현대인 치고 품위있는 남자라고 표현 되었으나 서래에 비하면 많이 모자라 보입니다. 그는 (서래만큼)의미의 심각성을 고려하지 않고 말을 뱉고 (서래만큼)말을 소중하게 여기지 않으니 잊기도 하고 귓등으로 스쳐 듣기도 하는 현대 한국남자인 것이지요. 그는 그의 품위가 직업적 자부심에서 발로한 것이라고 하는데, 이것을 폄하하는 것은 아니지만(이것도 희귀한 덕목아닙니까) 말의 의미를 천착하는 것과 직업인의 자부심을 견주어 보자니 그의 품이랄지 세계가 좁아 보이는 것은 어쩔 수 없었습니다. 그러고 보니 기독교에서는 말이라는 것이 로고스, 사랑 그 자체를 뜻하기도 합니다만 제 역량을 벗어나니 연결지어 쓰진 못하겠고 줄여야 겠습니다.
영화는 후반부로 가면서 이미 헤어질 결심이 끝난 산에서의 만남과 마지막 바다 장면이 무척이나 낭만적, 비극적으로 표현되어 있었습니다. 박찬욱 감독이 이 정도로 비극적 아름다움을 발산형으로 표현하다니 그저 좋았습니다. 덕분에 두고두고 이렇게 신비하고 참혹함을 담은 바다 장면을 되풀이 볼 수 있게 되었지 않습니까.
박 감독의 어느 인터뷰를 보니 사람들이 다른 영화의 영향을 많이 언급한다고 합니다. 특히 '현기증' 이야기를 많이 한다고. 여러 사람이 그러는 걸 보면 맞을 거라고. 그런데 만들 때 의식하지 않았고 다른 이들에게 듣기 전까지도 의식하지 못했다고 합니다. 저는 당연히 그랬으리라고 생각합니다. 영향이라는 것은 몸 속에 스며들어서 받은 이의 것으로 숙성되게 마련이니까요. 창작자들 다 거인의 어깨 위에 있는 존재들이니까요. 영화애호가들이 어디서 봤더라? 하며 찾아내 보는 건 그냥 하나의 지적 즐거움일 테고요.
모든 출연 배우들의 연기가 다 고루 좋았다는 점도 짚고 싶습니다. 또한 유머! 이렇게 무뚝뚝하면서 적절한 유머라니 너무 즐거웠어요.(철썩이가 박용우 시체보고 '와 앉하놨노, 무섭그로' 하는데 빵 터졌습니다. 김신영도 짱이었고요.)
2022.12.07 22:10
2022.12.07 22:31
전 정말 재밌게 보았어요. 가영 님도 그러실 걸요.
2022.12.07 22:10
김신영도 짱이었고요(2) 박찬욱 감독이 괜히 캐스팅한 것이 아니라 그 역할에 요구되는 부분을 완벽히 해줄 수 있다고 다 생각이 있었던 것 같아요. 언어에 관해 쓰신 부분에서 제가 비슷하게 생각했던 것도 있고 더 생각해보게 만드는 것도 있네요. 인터뷰들을 보니 박찬욱과 정서경이 애초부터 탕웨이와 이번에 같이 하려고 여주인공을 중국인 캐릭터 설정부터 했다고 하니 탕웨이 아니었으면 안되는 역할이 맡는 것 같아요. 탕웨이는 배우 자체의 매력과 연기는 좋은데 이렇다하게 맘에 드는 출연작이 영 없더라고요. 저는 색계나 만추도 그냥저냥 괜찮게 봤던 정도였는데 이번에 정말 평생 착즙(?)할 수 있는 작품이 나온 것 같습니다. 이것만으로 박찬욱&정서경 콤비에게 고맙네요 ㅎ
2022.12.07 22:35
조연들의 연기가 하나 같이 뽑아낼 수 있는 최고가 아니었나 싶어요. 다 사랑스럽더라고요.
탕웨이가 저번에 청룡시상식에선가 객석에 앉아서 울었잖아요. 서래 생각에 그렇게 울었구나 영화를 보니 이해가 되었어요.
극장에서 볼 기회가 있으면 좋겠어요.
2022.12.08 05:14
이 글 흥미롭게 재밌게 읽었어요. 소감을 섬세하게 잘 적으시네요. 그래도 제 정서/인식과 맞지 않아서 박 감독의 영화는 안 볼거지만요. - -
2022.12.08 09:43
주관적인 감상을 마음대로 쓸 뿐이라 조심스러운데 좋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한국 탑 감독들 중에 박찬욱 감독은 호불호가 좀더 나뉘는 감독 같습니다. 저는 이번 영화는 좋았습니다.
2022.12.08 10:18
각 국적에 따른 언어가 곧 한 개인의 인격이고 그 언어의 차이를 이해하려하는 게 그를 이해하려고 한다는 게 로맨틱하네요. 생각해보니 번역어플로 언어를 해석하는 게 뭔가 좀 로맨틱했어요. 어쩌면 디지털이 일상화된 21세기에만 느낄 수 있는 실시간 번역의 로맨스일지도요.
2022.12.08 11:57
첫번째 사건의 진상도 어플로 밝혀내죠. 본격 하이테크 크라임/로맨스.
2022.12.08 12:12
첨단 기술과 고전적 내용이 어우러져 있어요. 언어의 차이로 인한 이해와 오해의 깊어짐 같은 것도 생각하게 되더라고요.
2022.12.08 11:07
본문은 읽지 않았어요....
아직 보지 않아서요,,,빨리 봐야겠어요.
2022.12.08 12:13
얼른 보시고 즐기시길.
2022.12.08 11:47
그러고보니 그렇네요. 이렇게 대놓고 '사랑'이 전부다!!! 라고 외치는 한국 영화는 근래 거의 없었던 것 같아요. 대놓고 나는 로맨틱해질 거다!!!! 라는 듯한 마지막 바닷가 씬도 그런 면에서 신선한(?) 느낌이었던 것 같구요.
말이 잘 안 통하는 관계라는 상황을 이런 식으로 풀어내서 로맨틱하게 만든 건 정말 참신한 부분이었다고 생각하구요. 전 그냥 '참신하구나'하고 말았는데 그걸 되게 잘 풀어 주셨네요. ㅋㅋ 뭐 전에도 비슷한 시도가 없었던 건 아니지만 이렇게 깊이 파면서 캐릭터성으로까지 승화 시킨 경우는 정말 별로 었었던 것 같아요.
2022.12.08 12:17
모처럼 한국 영화에서 '사랑'을 이야기하는데 거부감 없이 즐긴 영화입니다.
사랑이 가능하려면 이해도 필요하고 오해도 필요한 것 같아요. 그런 속성을 경계에 살고 있는 서래라는 인물로 잘 나타낸 것 같습니다. 좋은 영화가 그렇듯이 파보면 이것저것 많은 말을 내놓을 수 있는 영화가 아닌가 싶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