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06.10 14:16
화자의 추적을 따라가면 독자인 우리는 데이비드 스타 조던이 grit을 통해 자신을 극복해낸 것처럼 보였지만 그 grit으로 자신에게 지나치게 의미부여를 한 탓에 타인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하는 데 실패했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럼에도 이 부분을 조금 조심스레 읽어야되는 것은 "사실은 나쁜 사람이었어!"라는 위선자 판정보다는 한 인간 안에서 복잡하게 드러나는 양면성 자체를 이해하는 것이어야 하겠지요. 인간의 어떤 성질이나 발자취가 꼭 그를 어떠한 사람으로 단정짓지는 않는 것이야말로 이 책에서 화자가 내내 이야기하는 "혼돈"의 개념과 더 맞을테니까요. 어쩌면 그를 그런 식으로 "분류"하는 것 자체가 데이비드 스타 조던이 일생을 매달려왔던 신의 질서를 반복하는 실수에 더 가까울지도 모릅니다.
한 인간이 보이는 것처럼 (자신이 보여주고 싶어하는 것처럼) 우월하거나 대단하다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으면, 그 혼돈의 이치를 인간의 선악이나 우열의 판단만이 아니라 우리의 세계 자체에 적용할 수도 있을 겁니다. 이런 개념으로 화자는 놀라운 전복을 이야기합니다. 물고기라는 분류가, 어류라는 분류 자체가 아예 틀렸다는 학계의 발견을 소개합니다. 금붕어도 상어도 넙치도 잉어도 우리는 다 물고기라는 한 종류 안에 들어있다고 믿어왔습니다. 그런데 그 분류가 전혀 아니라는 거죠. "물고기"라는 분류 자체가 그냥 물에 사는 어떤 생물체들의 가시적인 공통점만 묶어놓았을 뿐 사실 같은 부류로 묶일 수 없다는 과학적 발견이 나옵니다. "물고기"라는 단어 자체가 인간의 편의를 위해 구분된 단어일 뿐 포유류나 유인원같은 하나의 공통적 체계가 아니라는 것을 말합니다.
이 부분을 읽으면서 우리는 너무나 자연스럽게 데이비드 스타 조던의 연구를 생각해보게 됩니다. "물고기"라는 가장 거대하고 포괄적인 테두리 안에서 나머지 세세한 차이점들을 발견하고 구분하려는 그의 노력은 대체 무엇이었을까 하고요. 이것은 한편으로는 물고기 분류에서 우생학으로까지 나아간 그의 도덕적 실패에 천벌이 내린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 고소함을 잠시만 만끽하고 나면 다시 한번 인간의 무의미와 자연의 자유로움에 대해 생각해보게 되죠. 인간이 자기들끼리 이건 이것이고 저건 저것이라고 나누는 것이 얼마나 허망한 것인지. 혹은 실체적 진실에서 멀리 떨어져있는 것인지. 물고기라 불리는, 혹은 아주 어려운 학명을 띈 그 생명체들은 인간이 뭐라고 부르고 뭐랑 엮던 그냥 살던 대로 살 뿐입니다. 오로지 인간의 학문만이 틀렸을 뿐이고 인간의 편의만이 사라졌을 뿐이죠.
자연을 이해하려는 인간의 노력이 무의미하다는 이야기는 절대 아닙니다. 다만 이 책이 그 반전에 가까운 과학적 발견을 통해 알리고 싶어하는 것은 존재 자체에 대한 의미와 우열을 인간이 결정할 수는 없다는 그런 뜻일 겁니다. 자연을 이해하되, 자연의 혼돈을 우리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있는가. 데이비드 스타 조던이 처절하게 실패한 것은 바로 이 부분일 것입니다. 가장 궁극적인 분류에서부터 틀린 채로 시작된 나머지 분류와 이해에 그는 평생을 다 바쳤죠. 그것은 과학적 태도에도 경종을 울리는 것이 아닐까요. 신념을 과학에 결합시켰을 때, 있는 그대로의 과학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인간사회의 질서에 편입시키려 할 때 우리는 가차없이 틀리고 말 때가 있죠. 예를 들어 인간의 동성애를 "비정상"으로 놓기 위해 동물들의 암수 커플링을 이야기하지만 다른 동물들도 동성애를 한다는 과학적 사실 앞에서 무너지거나, 수컷이 암컷보다 우월하다는 것이 자명하다고 하지만 여왕벌이나 암사마귀 앞에서 그저 정액운반만을 하는 수컷의 운명을 이야기하면 초라해지는 그런 믿음들 말입니다. 우리는 자연을 보고 배울 수 있지만 그렇다고 자연이 인간 세계를 본딴, 인간이 본따야 하는 그런 예시로는 존재하지 않을 것입니다.
데이비드 스타 조던이 살아있을 때 이 발견이 나왔다면 그는 과연 인정할 수 있었을까요. 괜히 상상해보게 됩니다. 그는 특유의 grit으로 자신의 학문적 업적을 모두 버리고, 처음부터 다시 시작할 수 있었을까요. 아마 그건 표본실이 지진으로 무너졌을 때보다도 그에게 훨씬 더 지독한 고난이었을지도 모릅니다. 왜냐하면 "물고기"의 존재와 분류는 그가 내면의 아름다움과 규칙으로 삼았던 "신의 질서"를 가장 확실하게 구현해놓은 것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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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이비드 스타 조던을 추적하는 여정은 "물고기"란 분류가 없다는 발견까지 이어지면서 혼돈 그 자체인 자연을 되새깁니다. 그리고 정신질환자로서의 화자를 어떻게 바라볼 것인지도 대략 가닥이 잡히죠. 그들은 이상하고 소외당해 마땅한 사람들인가. "정상"의 기준에서라면 그럴 것입니다. 그리고 그 정상성에 대한 회의를 우리는 이미 데이비드 스타 조던을 통해 발견했죠. 그렇다면 화자의 아버지가 말한 것처럼 혼돈 속에서 인간은 아무 의미도 없다는 극단적 허무를 받아들여야 하는 것일까요. 저는 화자의 아버지의 그 믿음 또한 어느 정도는 자기기만이라고 생각합니다. 인간이 자기 삶에서 아무 의미도 발견할 수 없고 혼돈 속에서 찰나를 보낼 뿐이라 하더라도, 그것은 전지적인 신 혹은 영원의 시간을 가진 우주에서 바라봤을 때나 가능한 개념이기 때문이죠. 화자는 내가 제일 중요하다는 grit과 나는 아무 것도 아니라는 허무 사이에서 자신의 가치를 찾아가는 방법을 터득해나갑니다. 불임화 수술의 폭력 속에서도 함께 살아가는 생존자들을 보고 아름답다고 느꼈듯이, 우리 자신을 개별적인 개체이자 그 의미를 가진 우주로 받아들일 수도 있겠지요. 그것은 우리들이 '남들보다' 특별하다는 뜻이 아니라, 모두가 그런 것처럼 자기 자리에서 의미를 가지고 살아나간다는 뜻일 겁니다. (여기서 저는 데이비드 스타 조던이 시시해보이는 식물들의 학명을 외우고 그들의 특성을 이해하며 반가워했던 것을 떠올리고 씁쓸해졌습니다...)
화자는 자신이 계피냄새가 나는 첫사랑 남자와의 연애에 실패한 것을 어떻게든 극복하려고 애썼습니다. 그 지독한 좌절 속에서 데이비드 스타 조던 연구를 시작했던 것이기도 했죠. 화자는 자신이 왜 그랬는지 모르겠지만, 첫사랑과 연애를 하던 도중에 해변에서 어떤 여자아이를 발견했고 그 아이와 육체적인 관계를 맺었죠. 그래서 그는 왜 자신이 사랑하는 이를 배신하면서까지 그 충동에 휩쓸렸는지, 왜 자신이 이토록 어리석었는지 "도덕적"인 자책을 계속합니다.
그는 이 책의 말미에 깨닫습니다. 자신이 파티에서 만난 다른 어떤 여자에게 끌리고 그 여자와 연애를 시작하면서, 자신이 사실은 양성애자였다는 사실을 발견하죠. 여기에서 독자인 우리는 두가지 해석을 얻게 됩니다. 그 때 화자가 계피냄새 첫사랑남자와의 연애 중 다른 여자아이에게 끌렸던 것은 단순한 도덕적 타락이 아니라 그 자신도 모르던 양성애자로서의 충동이 이끌었던 것임을. 그리고 "물고기"란 분류가 틀렸듯이 화자에게 씌워진 "이성애자"로서의 분류 또한 틀렸을 수 있음을요. 화자는 세계가 혼돈이라는 그 깨달음을 자신의 성 정체성에 고스란히 적용하고 적응합니다. 화자는 이전까지의 잘못된 분류에서 벗어나 새로운 자신으로, 혹은 더 온전한 자신으로 거듭납니다. 자신이 무엇에 끌리고 행복해하는지를 발견했으니까요.
여기서 화자의 이야기는 조금 아이러니하게 흘러갑니다. 연애 도중 다른 여자아이와 바람을 피워서 화자는 이별을 당했고 고통스러워했지요. 그런데 같은 실수를, 다른 여성과 사귀면서 또 반복합니다. 여자친구와 여행을 간 화자는 서퍼 가게에 있는 에메랄드 빛의 눈동자를 가진 소녀에게 끌리면서, 그 여자와 같이 잠수를 하고 수영을 하면서 새로운 사랑을 시작하죠. 만약 이 책이 도덕에 관한 책이었다면 이 부분은 아귀에 맞지 않습니다. 화자는 후회를 했고 깨달음을 얻은 뒤 같은 과오를 되풀이하면 안됐으니까요. 그런데 화자는 똑같은 짓을 합니다. 그리고 후회하지 않죠. 어째서? 당시 사귀던 여자는 별로였고 화자는 이제 도덕적으로 망가져버려서?
진정한 자기 자신을 찾아나서는 건 자신이 무엇에 끌리고 행복해하는지를 깨닫는 것일 겁니다. 화자가 남자만이 연애대상이 아니라 여자 역시 연애대상이라는 걸 발견한 것처럼, 더 정확한 연애대상을 찾아내면서 새로운 자기자신에 급격히 적응한 것이겠죠. 이것을 과연 인간 사회의 도덕으로만 판단할 수 있을까요. 새로운 연애 대상이 화자에게는 생물로서의 또 다른 환경이자 자신의 유전자 안에 들어있는 본능적 충동이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렇게 생물로서 더 정확한 행복을 발견하고 그것을 쫓아나가면서 화자는 "진화"를 해냈다고 감히 말 할 수 있지 않을까요. 어쩌면 그것은 인간 사회의 "질서"에 반대되는 "혼돈"으로서의 행보일지도 모릅니다. 화자의 변덕과 충동은 혼돈 속에서도 유의미를 잡아내려는 또 다른 혼돈스러운 도전이라고 전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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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인간의 지독한 끈기와 열정이 어디에 도달했는지, 질서를 찾으려는 그 "신성한" 움직임은 얼마나 악하고 속된 결과를 빚어냈는지 이 책은 고스란히 밝히고 있습니다. 인간 세계는 늘 이러한 혼돈으로 가득차있고 때로는 선의를 부르짖는 그 일방적인 흐름이 많은 다양함을 파괴해버린다는 경고를 던집니다. 그리고 화자의 제멋대로의 연애와 행복을 통해 다시 생각하게 됩니다. 정신질환이 있는 사람들은 그 자체로 결함이 있거나 사회적으로 계도해야할 대상만은 아니며, 어쩌면 자신의 혼돈을 유난히 크게 가진 "어떤 사람"으로서 그저 자기 삶을 살아가고 있을 뿐이라는 것을요. 행복해질 자격에 대해 우리는 감히 단정할 수 없을 것입니다. 달팽이가 느리다고, 소의 울음소리가 시끄럽다고, 우리는 그것을 열등하거나 귀찮은 것으로 치부하지 않습니다. 정신질환을 갖고 있는, 그렇지 않은 모든 사람들이 자신의 생존 방식을 가지고 자신의 행복에 도달할 수 있으면 그것이 또한 혼돈의 아름다움이 아닐까요.
2022.06.10 15:14
2022.06.10 16:58
2022.06.10 17:27
일단 저는 "물고기"란 존재의 분류가 질서의 실패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각각의 다른 분류로 쪼개져 들어갔으니 다른 질서로의 전환일 뿐이며 분류학 자체가 흔들리지 않았으니 혼돈이 나설 곳은 없겠죠. 말씀하셨듯 분류 자체를 무의미하게 생각하면 들어맞을 수는 있겠지만 과학이 그렇게까지 쓸모없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고 하셨으니까요.
아마 비일반적인 것이 나중있다고 말씀하려 하셨을 것 같은데, 거대한 역사적 맥락으로 비교해 봤을 떄는 총기 규제라는 질서와 그 반대의 혼돈(자유), 금주법이라는 질서와 그 반대, 혹은 마약이라는 혼돈과 마약 규제라는 질서 같은 것들을 떠올리게 됩니다. 소수자이며 선한 혼돈만을 추려 생각하는 것 마저 혼돈에 대해 인간적 판단을 내린다는 느낌도 있습니다. (혼돈과 질서 자체가 모호하게 규정되어 있는 것은 책이나 글이나 마찬가진데, 이러이러한 것만 혼돈이라는 단어 정의에 의한 동어 반복으로 간다면, 그 혼돈은 그렇다고 인정하겠습니다.)
멀리 가지 않고 그 책에서 있었던 일만 한정해서 담박하게 말해보자면, 주인공은 바람을 피우고 나서도 도저히 그게 되돌려질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하지 못하다가 (왜 상대방이 정서적으로 그걸 되돌릴 수 없는지 "이해"하지 못 하다가) 최후에 그 헤어짐을 받아들이게 되고, 말씀하셨듯 윤리적 교훈으로 끝나지 않고 자신의 혼돈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며 새로운 바람을 피우며 결말에 도달합니다. 저는 여기서 윤리적 죄책감 정도는 바라지도 않고, 타자의 감정을 논리적으로라도 파악하고 타자에 대한 사고의 객관적 서술이나 자기반성이 정말 아주 조금이라도 있었다면 이런 말을 하지 않았을 겁니다. 세계로부터 자유를 얻고 혼돈의 자기 자신을 받아들인다는 그 과정에서, 객관적 자기반성이 완전히 결여되어 있는 이 상태는 어떤 면에서는 살인 등의 범죄를 저지르고 나서 (자기 반성이 없으므로 가능한) 혼돈의 자기 자신을 받아들이는 것도 가능한 식의 미학적 결말로 쉽게 치닿는게 아닌가 싶은 의심이 있습니다. (데이비드 조던은 적어도 남들이 예견할 수 있는 논리적 과정을 통해 상대방을 괴롭혔다면, 저자는 예견할 수 없는 과정을 통해 상대방을 괴롭힐 것입니다.) 신의성실의 원칙까지 가지 않더라도, 이에 대한 한 푼의 자기 객관화 없이 (혹은 그런 객관화가 존재하지 않아야 가능한 것 같은) 혼돈의 결말까지의 과정이 해롭다고 생각합니다.
2022.06.10 17:45
2022.06.10 17:51
물고기 분류의 실패는 맞는 말이지만 질서의 실패 예시 중 하나라고 하면 아니죠. 그게 질서의 실패라면, 토마스 쿤의 책은 [과학 혁명의 구조]가 아니라 [과학 실패의 구조]가 되지 않았을까요?
2022.06.10 18:14
2022.06.10 18:36
그래서 전 이 책의 구성의 큰 부분이 전혀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물고기의 분류가 산산조각으로 해체되는게 혼돈의 진심 한방 펀치처럼, 사이다처럼 그려지는데, 그것은 분류학의 근저에 있는 분류 정의에 따른 질서의 재배치에 지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 재배치에는 선악과 의식이 없고, 심지어는 혼돈에 기반한 것도 아닙니다. 생물의 분화 단계를 좀 더 촘촘히 나눌 수 있게 과학이 발전했을 뿐이지요. 그리고 이러한 분류학적 사상이 인간이 어떤 특별한 시류에 따른 다른 생물들과 변별되는 만물의 영장으로까지 도달했다는 것에서, 현재 존재하는 모든 생물이 지금까지 적자인 상태로 함께 변화해왔다는 것으로 변하게 도와줬다는게 흥미롭지 않습니까?
어떻게 나누고 따로 불러야할 지 공백 상태에 있다는 건 포스트 아포칼립스 (이 책에서 말한 대표적인 혼돈인 캘리포니아 지진이 전 세계적으로 온다면 있을 수 있는 ) 쯤이어야 가능하지 않을까요? 지금 부르는게 가능한 물고기 이름을 검색할 경우, (예 - 명태 : 동물계 척삭동물문 조기어강 대구목 대구과 명태속) 어떤 것도 공백상태에 있지 않습니다. 혹시 분류학적 공백상태의 물고기를 찾으셨다면 축하드립니다! 아직 분류되지 않은 동물을 발견하셨군요!
개인적으론 딱히 어떤 것이 더 인간 중심적이거나 아닌 것인지 판단이 잘 안 됩니다. 자신이 혼돈이라고 (사실 작중에선 그런 말을 하지 않았습니다만) 받아들이고 자신의 직감대로 사는 인간과 사회적으로 구성된 윤리적 도로를 따라 자발적으로 질서를 지키는 인간 중 누가 인간 중심적이라고 할 수 있을지.
2022.06.10 22:24
지금 잔오님이 "물고기"라는 단어를 쓰는 것 자체가 공백 상태를 의미합니다. 그런 분류는 과학적으로 이제 없습니다. 그런데 왜 쓰시죠? 그냥 관습적으로 인간의 편의를 위해 전혀 맞아떨어지지 않는 분류법을 쓰고 있기 때문일 뿐이죠. "물고기"란 존재가 없는데 그 구분법에 따른 어휘를 쓰시는 게 바로 그 공백을 뜻합니다.
지금 인간 중심의 인식론을 고집하시느라 이 책이 주장하는 걸 전혀 받아들이시지 못하시는군요. 예를 들어볼까요? 저기 멀리 해안가에서 '우리가 생선이라 부르던 것'이 튀어올랐습니다. 이제 물고기란 분류는 없습니다. 그런데 어떤 생물인지, 학명을 띄고 있는지, 이름이 무엇인지는 분간이 안됩니다. 그 때는 그 생물을 뭐라고 부를 건데요? 물고기란 분류가 아직도 있는 것처럼 그냥 그 단어를 억척스럽게 고집하거나, 아니면 그 생물의 분류가 없음을 인정하고 명명할 수 없는 상태로서의 존재로 호칭을 하던가 둘 중 하나뿐입니다. 명태도 명태인 걸 알아야 명태라 부르죠. 명태인 걸 모르는데 명태를 봤다고 하면 물고기란 분류가 없어진 지금 상태에서 뭐라고 부를 수 있는데요?
2022.06.11 01:24
저는 이 화자가 일렬의 경험과 새로운 정체성을 찾아서 자기자신을 발견한 것을 동치로 서술하는게 자기기만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건 지금까지 잘 쌓아올렸던 관계의 단계적인 정리를 건너뛰는 폐기의 짜릿함인 것이죠. 이것은 화자의 성적 정체성이 어떤 것이든 관계 없이 당사자 입장에서만 짜릿한 일인 것이고, [부부의 세계]의 이태오처럼 '사랑에 빠진게 죄는 아니잖아' 수준의 일반적 지탄을 받을 일을 핵심을 피해 서술했다고 생각합니다. 그걸 잘 감싸는데 성적 정체성과 혼돈과 질서, 스타 조던까지도 이용당한 것입니다. 남의 삶이니 그러려니 싶지만 그런 이야기를 이렇게 번듯한 대주제로 받아들이긴 어렵습니다.
저는 일부러 물고기라는 단어를 섞어서 썼고, 분류학에서 물고기라는 분류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즉 어류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과 이 일상적 단어의 사용과는 관련이 없는 부분입니다. 그런 기의와 기표가 질서로 이루어져 있다는 주장과 그것이 인간의 오만이라는 것까지 오게 된다면 어떠한 논제도 미뤄 다룰 수 없게 됩니다. 왜냐면 그런 인간이 만든 모든 협의를 오만으로 치부하는 확장 나선 구조 속에서 언어조차 가정 불가능하며 서로 같은 의미로 확정하는게 불가능한 상태에선 대화가 아무런 의미가 없을테니까요. 그런 혼돈이 좋으시다면 계속 논지를 확장하시는 것도 나쁘지 않습니다.
분류학으로 되돌아가 봅시다. 저 혼돈의 바닷가에서 어떤 이름모를 생물이 떠올랐다고 해서, 우리가 그 이름을 모른다고 해서 혼돈 속에 있지 않습니다. 우리가 계통분류학이라는 정의를 협의했다면 거기로부터 모든게 파생될 수 있습니다. [지구상의 생물들은 모두 공통조상에서 나왔으며, 현재까지 세대를 변천하여 각자 다른 형태의 모습으로 변화해 왔다]라는 정의를 협의하고 있다면 그 이름모를 생물에서 최초로부터 현재까지 이어져 오는 모종의 가지를 가정할 수 있는 것이죠. (심지어 이것은 인간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그 사실 자체는 존재할 것입니다. 마치 빅뱅이 사실이라면 인간이 없다고 해도 빅뱅이라는 우주 탄생의 순차적 과정은 영원히 존재할 것처럼.) 우리가 해뜬다, 해진다고 표현하는게 지동설의 공백이 아닌 것과 마찬가지죠. 그리고 이분법적이 아니지만 두 개 이상으로 분리되는 걸로 보이지 않는 질서와 혼돈의 이항 대결은 Sonny님만이 주장하고 계신게 아닐까요? 그리고 적어도 그 둘을 나눠서 분류하셔야 이런 주장이 가능한게 아닐까요? 모든 게 혼돈 속에 있고 동성애자, 양성애자, 물고기, 윤리 등을 굳이 이름지어서 붙이는게 인간의 오만이라면 이런 주장들은 어떤 의미로 왜 하고 계시는 건가요?
(여담입니다만 '인간 중심의 인식론'이란게 정확히 뭔진 모르겠지만, 인본주의로 줄여 표현할 수 있다면 그 반대편에는 보통 신본주의가 있다는 아이러니컬함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군요. 그리고 여기까지 와서 말인데 저는 질서의 성공이니 실패니 하는 말을 안 했는데 어쩌다보니 혼돈의 "실패"와 질서의 "성공"을 추려 정리하고 있었군요, 아쉽습니다. 혼돈과 질서가 선악과 관계가 없는 만큼이나 성패와도 거리가 먼 요소라는 생각이 드는군요.)
2022.06.11 08:00
2022.06.11 08:48
개인적으로 '인간 중심 사고의 오만'에 대한 주장들을 보면 좀 재밌다는 생각을 합니다. 왜냐면 그걸 주장하는 것도 인간이고, 그 사람이 그런 결론을 내리기까지의 사고와 그것의 바탕이 되는 지식들은 결국 그 인간들이 인간 중심적인 사고 방식으로 수천년간 쌓아 올린 것들이니까요. 결국 그 '인간 중심 사고의 오만'이라는 주장 자체가 인간 중심의 결정체 비슷한 걸로 보여요. 그보다 더 인간다운 주장이 있기가 힘들어요. 강아지들이 '개 중심 사고의 오만'을 경고하며 반성하고 그러진 않으니까요. 심지어 인간보다 환경과 자연을 중시해야한다, 인간 따위 사라져 없어져도 지구와 환경은 살려야한다는 주장을 하는 사람들도 그렇죠. 그보다 더 인간다운 사고 방식은 없다고 봐요.
그리고 지금 잔인한오후님과 Sonny님의 대화를 봐도 제 기준으론 Sonny님께서 훨씬 '인간적인' 주장을 하고 계신 걸로 보이거든요. '인간이 인식하든 말든 그것은 거기에 있다'라는 잔인한오후님에 비해 Sonny님께선 '인간이 만든 분류 기준의 실패'에 큰 의미를 부여하고 계시죠. 무척 인간적이면서 동시에 인간 중심적으로 보입니... (쿨럭;)
2022.06.11 10:03
인간의 오만을 경계하자는 것이니 당연히 인간적인 주장이죠. 그렇게 따지면 세상 모든 철학이 인간 머릿속에서 이뤄지는 것이니 사고의 확장이나 인식론적인 변화를 이야기하는 것 자체가 의미가 없습니다. 인간중심적 사고는 완전한 기준의 무와 철저하게 인간만 생각하는 사고 양자택일의 문제가 아니라 당연히 정도의 문제고 우리는 아주 큰 실패에 대해서 더 겸허하게, 인간중심적 사고를 덜 할 수는 있는 거죠.
더불어 "물고기"란 분류가 없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응 그러거나 말거나 거기에 그 존재들은 있다고 하는 건 제가 내내 이 글에서 이야기한 주장인 동시에, 인간이 그 생물을 인식하는 건 어떻게해서든 인간중심적인 필터를 거쳐서 인식한다는 한계가 존재합니다. 지금 댓글을 달고 있는 로이배티님조차도 그 인간중심적 사고의 한계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애초에 인간의 인식의 한계를 자각하자는 이야기에, 인간의 인식이 뭐 중요함? 이라는 반론은 단계를 초월한 해탈의 경지죠. 그렇게 따지면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이든 무슨 유전자의 발견이든 의미있는 게 없습니다. 원래 그대로 다 있는 거니까.
2022.06.11 09:29
저는 이 대화를 통해 Sonny님을 특정한 논지로 굴복시키려는 것도 아니고, Sonny님이 가정한 제 연애관을 주입시키려는 것도 아닙니다. 계속하여 논지가 확장되기만 하고 협의가 확정되지 않기 때문에 확장된 만큼 더 강한 논지들을 바탕으로 서로 나누게 되는거죠. 알아서 피해주라고 하셨으니 방어적으로 마지막 댓글을 달아볼까 합니다. 제가 맨 처음 주장한 논지는 여타 거대한 비유가 포함된 주장이 아니라, [질서의 아름다움만큼이나 혼돈의 아름다움도 누군가에게 피해를 줄 수 있다]는 논지였음을 기억해주시면 좋겠습니다.
또한 저는 연애환승을 살인과 불륜에 동치한 게 아닙니다. 연애환승에 도달하는 과정에서 관계정리나 죄책감, 자기객관화가 결여된 자기합리화를 살인과 불륜의 자기합리화 과정과 동치시킨 것이고 그것이 제 주장의 핵심입니다. 연애환승 자체를 윤리적으로 비난하는 걸로 오해되는걸 최대한 피하려고 제 글을 써왔는데 그것이 전달되지 않았다면 제 잘못입니다. 인생이 한 번 뿐인 만큼, 사랑이라는 관점에서 어떤한 관계가 형성될지는 알 수 없는 일입니다. 다만 그 결과를 향한 과정은 차곡차곡 온전히 감수하며 나아가는게 옳다고 믿습니다.
안타깝게도 저도 이상한 사람들의 비도덕적인 이야기를 즐깁니다. 다만 저는 혼란스러운데요, '비도덕적인' 이야기라고 이미 말씀을 하셨는데 그 이야기들이 '비윤리적이고 신의를 어긴 이야기다'라고 서술을 하는 것과 무슨 차이가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그런 취향을 비난한 적은 없는데 왜 그렇게 되는 것인지... 비윤리적이라고 말하는 게 비난이 되는 것인지... 비도덕적이라고 말하는건 비난이 아니고 괜찮은 것인지... 윗문단에서 이야기했지만 반복하자면 저는 연애환승 자체의 윤리성에 대해선 이 대화 속에서는 관심이 없습니다.
음... 마지막으로 저는 서로 상대방의 것 중 동의할 걸 동의하고, 동의하기 힘든 것은 넘겨주는, 주고 받는 대화를 선호합니다. 제가 얼마나 큰 걸 바라고 있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제 주장은 서두에 말했던 것대로 [혼돈도 질서만큼이나] 정도일 뿐입니다. 인식 부분은 더 길게 이야기해봐야 본질에서 멀어지기만 하니 생략합니다. 많이 아쉽군요.
2022.06.11 10:20
1. 개념적으로만 말하면 의미가 없다고 이미 설명했습니다. 그걸 잔오님은 작가의 '연애상대방 속이기'로 사례를 드셨고.
2. 그렇다면 잔오님의 수사법에 문제가 있는 거죠. 연애환승을 이야기하는데 왜 살인을 미학적으로 포장하는 것만큼이나 위험하다고 하셨나요? 예시로 든 살인 혹은 불륜은 글쓴이의 행위와 동치되지 않는데, 어떻게 그 과정만을 따로 동치할 수 있나요? 연애환승 부분은 이 책에 에필로그에 해당하고, 그 부분 전체가 이 책의 전체를 보장하지 않습니다. 잔오님께서는 비난하는 부분은 이 책에서 묘사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런데 첫 댓글을 '살인'부터 이야기하면 읽는 사람 입장에선 지나친 매도라고밖에 생각할 수 없죠.
연애환승에서 도달하는 과정을 왜 작가가 잔오님 말씀처럼 모든 걸 상세하게 설명해야됩니까? 대체 왜? 왜 연애를 향한 과정이 차곡차곡 온전히 감수하며 나아가야하나요? 작가가 에메랄드 눈동자의 현 아내를 만나는 과정에서 그 전 여친에게 어떤 감정을 느끼고 어떤 절차를 밟았는지 왜 설명해야합니까? 윤리적으로 비난하려는 의도가 없는데? 어불성설이죠.
3. 왜냐하면 잔오님께서는 이 책을 평가하면서 화자의 비윤리적이고 신의를 어긴 이야기 자체를 들어 책 전체가 주는 교훈이나 맥락을 통째로 부정하고 계시기 때문이죠. 그런 식으로 읽으면 위대한 개츠비에서 데이지는 그냥 "불륜녀"고 개츠비는 그냥 "불륜남"이죠. 어떤 이야기에는 캐릭터의 도덕성보다 더 중요하고 크게 드러나는 지점이 있습니다. 그 사고의 부분을 도덕성에 한정지을 때, 어떤 이야기들은 아무 의미도 없어집니다.
4. 잔오님은 이 글에 단 댓글을 말씀하신 것처럼 동의할 건 동의하고 동의하기 힘든 것은 넘겨주는 대화를 하신 적이 없습니다.
2022.06.11 10:11
김주영의 '고기잡이는 갈대를 꺾지 않는다' 의 후속편인줄
잘 읽었습니다.
다만 질서의 아름다움만큼이나 혼돈의 아름다움도 누군가에게 피해를 주고, 거대한 이론적 압력을 일으킬 수 있다는 점을 짚고 싶네요. 이 책에서 마지막까지도 질서의 아름다움에서 일어난 문제들을 정면 지적하거나 비판하지 않고 중립적 서술로 유연하게 넘기니 이중잣대를 대고 있는 것도 아니겠지만요. 개인적으로는 그런 판단을 내리지 않고 무지한척 모호함을 유지하는 것이 자기 객관화를 피하며 얼버무리는 편이라고 봐서 해롭다고 생각합니다. 범법까지 가지는 않았지만, 여러 혼돈에 대한 피해에서 1인칭적 책임은 쏙 빠지고 3인칭으로만 묘사하게 되니까요. 여튼 뻔한 말입니다만, 어느 쪽으로든 중용은 중요하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