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04.27 18:27
마음가는 대로 감상이니 감안하시고, 스포일러는 의식 않았으니 역시 감안하시기 바랄게요.
Drive My Car, 2021
오프닝 크레딧이 나오는 시간이 영화 시작 후 40분 지나서입니다. 어 이제사 나오나, 하고 시간을 보니 그러네요. 거기까지가 주인공 가후쿠에게 치명상을 입힌 아내 오토와 함께 살던 장면이자 아내의 죽음이라는 사건이 있는 전사이니 구분해 주는 역할도 하게 됩니다. 제목이 저럼에도 영화를 보기 전엔 몰랐는데 이 영화 일종의 로드 무비네요. 도쿄에서 횡단해서 서쪽에 있는 히로시마로, 히로시마에서 종단해서 북쪽인 홋카이도로. 그리고 극중극이 매우 중요해서 저는 이 영화가 매개체를 통해 고통을 직시하면서 매개체를 통해 그 고통을 견디는 방법을 찾는 이야기로 봤습니다. 우리가 영화(이 영화에선 연극이지만)를 보는 것도 이와 성격이 같은 행위라고 말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차 역시 매체라고 할 수 있겠죠. 내 소중한 차를 타인에게 허락해 나가는 과정으로 진행되다가 나중에는 그냥 완전히 내주는 방식으로요.
아내 오토와 관련된 부분에서 무라카미 하루키의 입김을 강하게 느꼈습니다. 원작은 읽지 않았지만 하루키의 이전 작품에서 봤던 여성에 대한 막연하고도 알 수 없음에 따른 신비화와 섹스가 중요하여 이야기 만들기를 연결짓는다거나 하는 것이요. 대표적으로 '아내에겐 들여다 볼 수 없는 어두운 소용돌이가 있었어' 같은 표현이 하루키의 두고 쓰는 문자라 그랬는데 사실 이 영화에서 저에게는 가장 이입이 어려운 부분이 이런 하루키의 강렬한 향기가 엄습하는 대목들이었습니다. 게다가 그 전생이 칠성장어인 여학생 등장하는 스토리는 강렬한 상징성만큼이나 강렬한 거부감이 ㅠㅠ.(일본 사람들의 이래저래 어쨋거나 장어 사랑! 그리고 오래 전에 본 이마무라 쇼헤이 감독의 '우나기'도 아내의 불륜으로 시작했다는 게 떠올랐습니다.) 그리하여 저는 운전 기사인 미사키의 사연이 더 설득력 있게 다가오더군요. 두 사람이 겪는 마음의 고통이 처절함으론 우열을 가리기 어렵지만 가후쿠보다 훨씬 현실성 있고 생생하게 아픈 이야기였습니다.
카메라가 차 안에 있을 때보다 밖에서 차가 움직이는 걸 보여 주는 장면이 좋았습니다. 인물들이 대화하는 장면보다 풍경 속에 그냥 들어가 있거나(입엔 담배를 물고) 말없이 이동할 때가 더 좋았고요. 솔직히 대사를 아주 조금만 줄였으면 좋았을 텐데 싶은 장면들이 있었습니다. 칸 영화제에서 각본 상 받은 영화를 보며 이게 무슨 생각이람. 저의 마구잡이 생각이지만 대사가 의미심장하면서 길이도 꽤 긴 장면들이 있어서 현실에서 저런 대화가 오간다면 기억해야 할 중요한 얘기임에도 참 기억하기 어려울 것인데 싶더라고요. 길게 주고받는 대화가 의미심장하게 유기적으로 잘 엮여 있기 때문에 각본 상을 받은 것이라고 볼 수도 있겠지만요. 저는 생각해 봅니다. 깊이 있는 대사를 곱씹기 위한 것이 우리가 영화를 재관람하게 하는 중요한 이유가 될까. 영화는 대화 장면을 놓고 볼 때 현실과 가장 비슷한 시간 체험을 하는 예술 같은데 대사가 의미심장하고 길다면, 그래서 관객이 충분히 대사를 읽어내기(기억하기) 어려웠다면 좋은 체험이랄 수 있을까. 무슨 소리, 전통적인 연극에선 영화보다 대사의 역할이 더 크지 않나. 무슨 소리, 연극은 '희곡'이라는 문학 장르와 뗄 수 없는 관계로 따로 대사만 향유되기도 하니 다르지 않을까. 여기까지 엄벙덤벙 생각해 봅니다.
영화가 끝 난 다음에 생각해 보니 하마구치 류스케 감독이 이 영화를 통해 말하고자 하는 야심이랄까 스케일이 생각보다 컸습니다. 칠성 장어 소녀의 분명한 자백과 더불어 왜 하필 히로시마인가, 왜 배우들은 다양한 아시안으로 구성되어 제각각의 언어로 대사를 치게 하는가, 게다가 한국인 배우의 중요한 역할이나 마지막을 부산 장면으로 끝내는 것을 보면요.
가후쿠가 히로시마를 구경시켜 달라니 미사키가 쓰레기 처리장으로 데려가는데, 멋지던데요. 과연 관광지로 손색이 없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가후쿠가 묵는 숙소도 분위기 좋았는데 창이 한 면이라 춥겠습디다.
한국인 부부는 그림같은 집에 그림같은 개와 그림같은 가정을 이루고 살더군요. 그래서 보는 한국인 입장에선 좀 한국인 안 같았습니다.
2022.04.27 18:53
2022.04.27 19:53
저도 그 점 불안했어요. '자네 23세인가' 하고 '살아 있으면 23세다' 라는 대사가 나왔죠.
집에 '바냐 아저씨'가 없어서 안 읽어도 영화만으로 좋아야 좋은 것이다고 혼자 결심?하고 그냥 봤는데 역시 읽으면 달리 다가오는 것인가요? 쇼킹하다니 궁금합니다.ㅎ 이 영화가 아니라도 체홉은 읽고 싶긴 합니다.
2022.04.27 19:08
말씀하신 '하루키 느낌'이 강해질 때마다 옛날 말로 '문예 영화'를 보는 기분이 들어서 제겐 좀 안 맞았어요. 제가 그런 류의 영화를 별로 안 좋아해서. ㅋㅋ
그래도 막판 근처쯤 가서 배우들과 함께 야외에서 연습하는 장면의 느낌은 참 좋아서 그게 제일 기억에 남네요. 햇살이 참으로 일본 영화스럽게 반짝반짝 쏟아지면서 현장의 공기가 느껴지는 기분이 드는데, 그런 느낌은 유독 일본 영화들이 실감나게 잘 잡아내는 것 같아요.
2022.04.27 20:07
저는 '해피 아워'를 좀 더 즐기며 본 거 같아요. 짜임새, 의미, 완결성은 이 영화가 분명하지만요.
그 야외 연습 장면에선 배우들도 좋아하는 느낌이 있었습니다. 대학 때 잠깐 연극 연습할 때 생각도 났습니다. 대본 읽기나 분위기 바꿔서 실외로 나가서 해 보는 것이나 비슷한 면이 있어서 생각이 나더라고요.
2022.04.30 13:46
저도 비슷하게 느꼈습니다. 대사 좀 줄이거나 없으면 더 살아나는 장면들이 많은데, 했습니다. 마사키 캐릭터 인상적이었습니다. 보면서 저런 여성 캐릭터가 한, 중에 있었나 생각해봤습니다. 수수한 외모, 작은 키, 묶은 머리, 볼 캡에 트럭커, 플란넬에 청바지, 농구화, 그리고 담배.
마지막에 자동차가 한국 번호판을 달고 있던데, 앞 숫자가 두 자리 수더라고요. 무슨 25루였나? 암튼, 요새 중고차에 번호 받으면 세자리수 아닌가요?
2022.04.30 14:20
마사키 캐릭터 외모나 면면이 좋았죠.
하지만 실제 활동하는 외모는 아래와 같습니다 ㅎㅎ
불행한 과거를 극복하며 연대를 이룬 남녀 주인공 사이에서 로맨스가 싹틀까 걱정했는데, 나이차가 상당한 여주가 딸뻘이라는 걸 확실하게 짚고 넘어가서 좋았습니다. 그리고 당연히 '바냐 아저씨'를 모르고 볼 때랑 연극 각본을 읽고 볼 때랑 느낌도 다르네요. 두번째 관람의 울림도 더 크고요. 다카츠키가 드라마 각본 속 살인을 이야기하는 부분의 전후 상황을 알고 보니 더 쇼킹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