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울레이터 전시회 후기

2022.03.20 17:15

Sonny 조회 수:671

* 코로나 확진 훨씬 이 전에 다녀온 전시회입니다!! 


지인의 추천으로 사울레이터 전시회를 다녀왔습니다. 저는 그림을 보는 건 좋아하는데 사진을 보는 건 그렇게 좋아하진 않습니다. 아마 창조라는 개념을 굉장히 낡은 방식으로 이해하고 있어서 그런지도 모르죠. 아직까지도 사진은 현실을 그대로 옮겨올 뿐이라서 붓과 물감을 이용한 그림이라는 창조보다는 제게 보는 재미가 좀 덜합니다. 아마 사진전을 더 많이 보고 저 자신도 사진을 이리저리 찍어보면 사진의 예술성을 더 실감하게 될 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별 기대를 안하고 사울레이터 전시회에 갔습니다. 한 2층까지 돌 때는 좀 심드렁했는데, 사울레이터의 전시회를 보면서 색다른 느낌을 받았습니다. 사진과 회화의 차이는 무엇인지, 사울레이터의 사진만이 가진 특징은 무엇인지 좀 곱씹어보면서 보니 재미있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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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울레이터의 사진들은 이렇게 피사체가 한겹의 불투명한 레이어를 통해 찍혀있는 작품들이 많았습니다. 이건 어떻게 보면 실패한 사진일수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사진의 가장 기본적인 목적은 피사체를 프레임 안에 담는 것이니까요. 그런데 사울 레이터의 사진들 안에는 피사체가 명확히 보이는 경우가 많지 않습니다. 물론 자신의 여동생이나 고양이나 연인을 찍은 사진들은 피사체가 명확하지만, 저렇게 흐릿하게 어떤 장벽이 피사체를 못보게 만들고 있습니다. 어딘가 인상파의 회화같다는 생각도 좀 들더군요. 형체는 뭉개지고, 대상들의 색도 서로 섞이고, 주관적인 시야의 잔상만이 남은 것을 그대로 담으려한 게 아닌가 하는 추측을 해보았습니다. 


그래서 이런 사진들이 어딘지 좀 겸허하게 느껴지기도 했습니다. 본다는 행위는, 한편으로는 상대를 내 시야 안에 가둬놓고 꿰뚫어본다는 지배적 행위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회화들은 계속해서 그런 질문을 했죠. 그것이 과연 가능한가. 혹은 그래도 되는 것인가. 피사체를 정면에서 혹은 측면에서 보고 완전히 명확한 선과 형체를 정지된 상태로 놔두는 이 행위는 어쩌면 오만인지도 모릅니다. 왜냐하면 피사체의 어느 순간이 박제되어버리면서 그 순간을 자신의 정체성인것처럼 굳히게 되니까요. (그래서 반대로 회화들은 피사체의 가장 위대하고 잘나보이는 순간들을 초상화에 박제하려고 노력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사울 레이터는 볼 수 없는 상태를 그대로 인정하고 그 장벽들마저 사진 안에 담았습니다. 그래서 제대로 보이지 않는 피사체를, 사울 레이터 본인이 제대로 볼 수 없던 그 상태 그대로 보게 됩니다. 그 풍경 자체가 그의 눈에 담겼던 것일테니까요. 우리의 눈을 스쳐가는 수많은 풍경들이 그렇게 흐릿한 피사체 상태로 그냥 스쳐지나가기도 하죠.


피사체를 정확히 볼 수 없을 때, 그 한 겹의 레이어는 우리에게 따스한 감각을 일으키기도 합니다. 사울 레이터의 사진들은 오히려 그 레이어를 제대로 통과하지 못하는 상태에서 보는 사람이 인간적인 상상을 하게 만든다고나 할까요. 어딘가에서 멍하니 서있는 사람들, 혹은 발걸음을 서두르는 사람들, 얼굴이 보이지 않는 사람들의 그 뭉툭한 흔적들에서 우리는 구별되지 않는 동질점만을 찾아냅니다. 집에서 기다리는 누군가를 향해 간다거나, 아니면 추위 속에서 투덜대고 있을 거라거나 하는 아주 일상적인 반응들이요. 섬뜩할 정도로 정확한 시선이 피사체에 꽂힐 때 우리는 속속들이 한 사람을 흝어내면서 그의 고통 혹은 아주 극적인 무언가를 탐색하려 합니다. 하지만 그 시선이 희뿌여지는 렌즈 뒤에 감춰질 때, 우리는 프라이버시를 존중하며 막연한 추측만을 그에게 투영하죠. 어떤 면에서 사울 레이터의 사진들은 존중 그 자체일지도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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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울 레이터가 자신을 찍은 사진 중 하나입니다. 이 사진을 보면서 회화와 사진의 근본적인 차이를 자문하게 되더군요. 대부분의 회화에서는 반사라는 개념이 없습니다. 하이퍼 리얼리즘 같은 경우에는 저 반사된 이미지까지도 포함해서 그리긴 하지만 일반적인 그림에는 그저 피사체를 드러내는데 방해가 되는 저런 반사된 이미지를 굳이 그릴 이유가 없죠. 저렇게 반사된 이미지 때문에 피사체를 향한 집중력이 흐트러집니다. 렌즈를 피사체에 맞추고, 가장 정확하게 피사체를 담아야 할 사진이라는 작품 안에서 그가 저렇게 사진을 찍었다는 건 정말 보이는 그대로를 담고 싶어해서 그런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있는 그대로의 세상이란 하나의 피사체에 집중하면서 다른 모든 걸 아웃포커싱 하는 게 아니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르죠. 단 하나만이 집중되거나 부각되는 것은 그의 카메라의 세계 속에서는 또 다른 왜곡이었을지도 모릅니다. 그에게는 저런 반사되는 이미지도 포함된 세계가 하나의 진실이 아니었을지.


사울 레이터는 패션잡지의 화보들도 저런 식으로 찍었습니다. 모델 혹은 제품이 선명하게 도드라져야 하는 작품들까지도 저런 반사된 이미지를 중첩시키면서 찍었다는 게 그의 일관된 사진 철학, 혹은 그가 추구하는 아름다움인 것 같기도 했습니다. 인물은 언제나 세계와 겹쳐있습니다. 세계는 언제나 인물을 품고 있습니다. 그의 사진을 보면 자세히 들여다보아야 알 수 있는 아름다움 같은 것이 있습니다. 숨겨져있는 아름다움은 무언가를 확 들춰내고 그것만을 발견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숨기고 있는 세계와 그 세계의 틈새로 나온 피사체의 조합된 아름다움이 아닐까 싶군요. 피사체만 있다면, 혹은 레이어만 있다면 사울 레이터의 사진은 성립하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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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일 유명한 작품 중 하나입니다. 이 사진 역시도 눈이 내리는 가운데의 피사체를 담고 있습니다. 이상하게도 눈이 뭔가를 가린다는 생각은 잘 들지 않습니다. 그저 그 안에 피사체들이 자연스레 녹아있거나 혹은 눈이 세계를 완성하는 구도처럼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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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작품 중 또다른 유명한 작품입니다. 빨간 우산 때문에 우리는 저 행인이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없습니다. 도로는 눈에 덮혀있구요. 그럼에도 그가 걸어간다는 사실은 분명합니다. 눈을 맞지 않으려고 우산을 쓰고 걷는 저 사람이 어쩐지 앙증맞아 보입니다. 사울 레이터의 사진 속 사람들은 언제나 귀여워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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