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01.06 00:06
- 1989년작이네요. 무려 두 시간 6분이라 하고요. 스포일러가 없을 필요가 있는 영화일까요? 라는 생각이 들지만 뭐 일단은 안 적겠습니다.
('더 이상의 설명이 필요 없다!!!' 는데 설명이 너무 많습니다)
- 주윤발이 '도신'입니다. 말 그대로 도박의 신이에요. 세상 모든 도박에 다 능하고 다 잘하고 다 짱 먹습니다. 도입부에선 일본 서열 2위라는 도박사를 만나서 가볍게 무찌르는데, 시합 후 상대방에게서 이상한 요청을 받아요. 자기가 집안의 원수를 갚아야할 도박꾼이 있는데 내 실력으론 어렵다. 니가 대신 좀 이겨주겠니? 내가 돈 대주고 더 얹어줄게. 우리 정의의 도신님은 당연히 오케이하구요. 근데 이 양반이 어쩌다 그만 악당들의 습격을 받고, 그 습격에선 말짱하게 잘 살아남았는데 그러고 집에 가는 길에 겁나 허접한 함정에 빠져 언덕을 구르다가 머리를 부딪히고 실신합니다.
그 허접한 함정을 파놓은 것은 바로 유덕화였는데요. 이 놈은 그냥 도박 좋아하는 동네 양아치일 뿐인데, 자기를 기분 나쁘게 한 동네 주민을 골탕먹이려다 그만 사고를 쳐 버린 거죠. 그래서 쓰러진 주윤발을 챙겨서 자기 집으로 데려갔는데 아이고 이 놈이 기억상실. 그것도 정신 연령 10세로 후퇴. 바로 내다 버릴까 하다가 첨엔 주윤발이 들고 있던 돈 때문에 못 버리고, 잠시 후엔 이 바보의 도박 능력을 알아채는 바람에 안 버리구요. 주윤발이 초콜렛에 엄청나게 집착하는 걸 보고는 '넌 이제는 초콜렛이다!'라며 여기저기 끌고 다니며 도박 앵벌이 인생을 시작합니다...
(당시 극장에서 보던 사람들을 경악케 했던 주윤발의 바보행. 아마 저 미키마우스 풍선은 '첩혈쌍웅'의 셀프 패러디... 라고 생각했는데 같은 해에 나온 영화네요)
- 전에 게시판에서도 어느 분이 언급했었는데. 이 시절 홍콩 오락영화들을 보면 특유의 참으로 느슨하고 나이브한 분위기가 있습니다. '참으로'라고 했는데 사실 이 정도 표현으론 한참 부족하죠. 그냥 상식을 뛰어넘게 느슨한 인과로 이어지는 스토리, 현실과 환타지를 아무 맥락 없이 오가는 전개, 그리고 인물들의 실제 행동과는 별개로 '주인공은 착하고 악당은 나쁘다'고 대충 넘어가 버리는 선악 구분... 뭐 이렇게 길게 설명할 것 없이 걍 요즘 기준으로 말하자면 '일관성도 개연성도 없이 장면장면의 재미에 집착'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 영화도 그렇구요.
예를 들어 유덕화는 사실 되게 나쁜 놈입니다. 얘가 홍콩 영화 속 주인공이란 사실을 잊고 그냥 하는 일만 보면 런닝타임의 절반 동안 얘는 하찮은 소악당이에요 그냥. 근데 중반에 진짜 아무 것도 아닌 상황으로 성격 반전을 일으키고 이후론 쭉 용기있고 희생정신 넘치는 정의의 주인공이 되죠. 이유? 주인공이니까요.
주윤발 '도신' 캐릭터의 정신이 오락가락하는 부분은 요즘 기준으로 보면 당황스럽습니다. 이게 머리 한 번 '쿵' 하고 부딪히고 그러는 거면 차라리 괜찮은데, 한 번 부딪히고 피흘리며 쓰러진 후에 진짜 맥락 없는 슬랩스틱으로 서너번을 더 강력하게 부딪힙니다. 되게 진지한 상황인데 그냥 슬랩스틱이 나와요. 나중에 기억 되찾을 때도 똑같은 괴이한 슬랩스틱이 반복되구요. ㅋㅋ
근데 이런 걸 따지면 안됩니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자면, 굳이 20세기 홍콩 오락물을 찾아 보면서 이런 걸 따지면 자기만 손해라는 거죠. 그냥 시대와 장르의 일부라고 생각하고 보는 게 상책이고 전 당연히 그렇게 봤습니다. 전 그 시절 사람이니까요. ㅋ
(우리는 착하다! 왜냐면 착한 역을 맡았기 때문이다!!!)
-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도박 장면들은... 한심합니다. ㅋㅋㅋㅋ 네 정말로 한심해요.
그러니까 명색이 도박 영화인데, 주인공들이 펼치는 대결은 절대로 도박 대결이 아닙니다. 이 '도신'이란 인간은 갬블러라기 보단 절대 무공 무협 지존에 가깝고. 실제로 도박 중에도 머리를 쓰고 트릭을 쓰는 게 아니라 무공을 펼치는 걸로 대부분의 상황을 해결합니다. 막대기로 합을 겨루며 마작 패 쟁탈전을 벌이고, 주사위 게임에서 낮은 숫자를 얻어 승부에서 이기기 위해 주사위를 파괴(...)해버리는 등등. 그런 양반이 언덕에서 구르는 것 하나 못 버텨서 심지어 몇몇 소소한 장면들에선 주인공이 그걸 어떻게 해냈는지 설명을 그냥 생략해 버리기까지 하죠. '도신이니까' 다 된다는 식이니 어떻게 봐도 21세기 기준으로 정상적인 도박 영화는 아닙니다. 그냥 도박하는 무협 영화라고 보시면 될 듯 하구요.
이 어처구니 없는 장면들과 상황들을 합리화하는 건 오직 하나. 당시 최고 스타였던 주윤발의 존재감입니다. 이 분의 여유로운 미소와 그 시절 스타일로 우아한 몸동작들을 보고 있으면 뭐 그냥 그러려니 하는 거죠. 어쨌든 폼 나니까. 우리 윤발이 형이니까!!!! 밀키스!!!!! ㅋㅋㅋ
(도박을 하시는지 초능력 무협 대결을 벌이시는 건지. ㅋㅋ)
- 그리고 그렇게 당시 홍콩 탑스타들을 구경하는 재미는 참으로 좋습니다. 주윤발, 유덕화의 주름 하나 없이 매끈 탱탱한 얼굴과 젊다 못해 풋내까지 느껴지는 연기를 보고 있노라면 무념무상으로 그냥 웃음이 나오구요. 게다가 이 영화에 유덕화 여자 친구역으로 나오는 분은 무려 왕조현님이시란 말이죠. 포스터에 없어서 (그리고 사실 역할도 별 거 없어서) 까먹고 있다가 이 분 얼굴이 화면에 짠! 하고 등장하는 순간 오오... 그저 빛. ㅋㅋㅋㅋ 나름 장민도 나오긴 하지만 이 분 비중은 더욱 하찮아서 패스하구요.
이런 당시 청춘스타들 말고도 오맹달이라든가, 성규안씨도 나오는 것인데요. 이 분들은 모두 근래에 고인이 되셨죠. 그래서 괜히 숙연한 맘이 들기도 했습니다.
(명복을 빕니다.)
- 마지막으로 그렇게 크게 장점 같지는 않은 장점 하나를 들자면...
영화가 되게 종합 선물 셋트 같은 느낌이 강합니다. 일단 도박을 하지요. 그리고 무술 액션을 합니다. 나중에 가면 총격전이 벌어지면서 우리 윤발이 형이 쌍권총 다루는 모습도 볼 수 있구요. 도신이 '초콜렛' 모드일 때는 코미디가 강하고, 그러면서 후반으로 가면 의리와 복수로 뒤엉킨 다크한 드라마도 살짝 나와요. 그러니까 리즈 시절 홍콩 영화를 좋아했던 사람들이 바랄만한 요소들이 영화 한 편에 와장창 때려 박혀 있는 셈입니다. 아마 당시에 이 영화가 그리 인기를 끌었던 것도 그런 요인이 컸겠죠.
그리고 이 요소들이 대부분 평타 정도는 해줘요. 얽혀 있는 모양새가 워낙 느슨해서 요즘 기준으로 볼 땐 영 낙제점입니다만. 어디까지나 당시 기준으로다가. ㅋㅋㅋ
(그러고보면 그 시절 국딩과 중딩들은 한자를 참 잘 읽었어요.)
- 종합하자면 이렇습니다.
2022년(!) 관객들의 기준으로 볼 때 넘나 허술하고 느슨하며 모자란 구석이 많은 영화입니다. 추억팔이 이외의 용도로는 전혀 추천할만한 작품이 못 되구요.
다만 애초에 '추억의 영화 한 편 때린다' 라고 생각하고 본다면 또 썩 괜찮습니다. 모자란 구석들까지도 '허허 당시 홍콩 영화들이 저랬지'라며 웃고 넘길 수 있고.
또 워낙 다양한 스타일을 때려 박아 놓은 데다가 캐스팅도 주윤발, 유덕화, 왕조현에 오맹달, 성규안이면 대략 훌륭하지 않습니까.
고로 두 시간 동안 셀프 추억팔이 잘 했습니다 저는. 다만 당시 홍콩 영화들에 추억이 없으신 분이라면 그냥 안 보시는 게 옳다는 거. ㅋㅋㅋ
(추억은 힘이 매우 세십니다!!!)
+ 왕정 감독 영화들이 대체로 좀 그랬던 것 같은데. 이것저것 유명한 영화들 요소를 짜깁기한 게 노골적으로 눈에 띕니다.
일단 정장 입고 몸 날리며 쌍권총 휘두르는 주윤발은 당연히 '영웅본색'의 셀프 패러디겠고.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는 천재를 데리고 다니며 카지노에서 돈 버는 건 '레인맨'이고요. 주윤발이 초콜렛에 집착하는 건 아마도 '이티'에서 따왔겠죠.
메인 테마 음악처럼 주구장창 흘러나오는 짧은 음악은 'Raindrops Keep Fallin' On My Head'의 후렴구를 그대로 갖다 썼음이 분명하고. 심지어 '전함 포템킨'의 유모차 장면을 베낀 장면도 나오는데... 아마도 직접적인 레퍼런스는 '전함 포템킨'이 아니라 '언터처블'이었을 듯. ㅋㅋㅋ
++ 유덕화의 액션씬 중에 유덕화 본인이 직접 한 스턴트 장면이 두 번 정도 나옵니다. 매번 '봐라! 유덕화 본인이다!!'라는 느낌으로 빡세게 슬로우모션을 걸어줘서 모를 수가 없는 것인데요. 뭐 슬로우모션과 카메라 시점 장난 같은 걸로 위험해 보이게 만든 안 위험한 장면들이었습니다만. 그래도 좀 재밌더라구요. 유덕화가 젊을 때는 이런 것도 했구나... 했네요.
+++ 그러고보면 영웅본색 때문에 성냥개비 물고 다니던 녀석들 천지였듯이, 이 영화 보고 와서 트럼프 섞고 넘기는 묘기 흉내내는 녀석들도 진짜 많았습니다. 참 좋은 시절이었죠. 그런 데 하루 몇 시간씩 투자하면서도 인생 급할 게 없었으니. ㅋㅋ
2022.01.06 00:32
2022.01.06 09:41
유덕화는 자기 관리도 관리고 본인이 그냥 늘 의욕이 넘치는 것 같더라구요. ㅋㅋ 저도 2010년대에 찍은 유덕화 액션 영화들 몇 편 봤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유덕화는 젊을 때보단 나이 먹은 후가 더 비주얼이 낫더군요.
2022.01.06 01:53
2022.01.06 10:14
종횡사해가 분명히 무료 vod였는데 지금 확인해보니 'HD리마스터링' 버전으로 바뀌면서 유료가 되었네요. ㅋㅋ
이것도 언젠간 볼 겁니다! 제가 종초홍도 좋아했던 과거가 있어서요. 하하.
2022.01.06 03:09
2022.01.06 10:42
어찌보면 왕정이 진짜로 '그 시절 홍콩 오락물'의 상징 같은 존재라는 생각도 들어요. 가볍게 가볍게 그냥 시류 따라가는 작품들 왕성하게 쏟아내는 양반이었던 걸로. 근데 말씀대로 너무 가볍기만 하고 뭔가 오리지널리티 같은 게 부족한 느낌이라 팬은 적었구요. 그래도 확인해보니 2021년까지도 신작 내놓으며 활발하게 활동중이군요. 일단 뤼스펙 해드리는 걸로... ㅋㅋ
켄 아저씨 캐릭터 괜찮았죠. 전 그 양반도 좋았고 적룡도 좋았습니다. 소녀팬들 다 잡아간 장국영은 캐릭터가 제 취향이 아니어서...
첩혈쌍웅은 이제와선 사료(?)로서 가치가 더 큰 것 같아요. 쌍권총 & 비둘기 & 발레st. 총격전이라는 오우삼의 인장이 최고퀄로 완성된 영화이니. ㅋㅋ
2022.01.06 16:23
반갑습니다. 저도 장국영은 제 취향이 아니었어요. 단, 백발마녀전에서는 좀 설렜음요 ㅋ
2022.01.06 10:58
레인맨 생각나네요
2022.01.06 11:15
재밌게 봤던 영환데 지금은 거의 기억이 안 나요. ㅋㅋ
2022.01.06 12:27
이거 넷플릭스에 있었는데 지금도 있을지 모르겠네요. 이 시절엔 1년 동안 배우 한 명이 영화를 몇 편씩 찍었다고 하죠. 엉성한 모양새도 그냥 그날 그날 적당히 대본 쓰고 스턴트 기술자들이 대충 만드는 그림에 의존하고 그래서이지 않을까 하는 합리적인 의심이 들어요. 요즘 일일드라마 느낌의 제작 환경이지 않았을지...
2022.01.06 12:37
확인해보니 지금은 없네요. ㅋㅋ 맞아요 그때 정말 홍콩 인기 배우들 영화는 분기마다 하나씩 나오는 게 보통이었죠. 확인해보니 왕정 감독도 1989년에 직접 감독한 영화만 일곱 편이네요. 매우 합리적인 의심이라는 생각을 합니다. 하하하;;
2022.01.06 12:44
이게 원제가 <도신>인데 정전자는 누가 붙인 이름인지 ㅋ 2022년에 갑자기 궁금증이 듭니다. <지존무상>이 한국에서 첫 스타트를 끊고 유덕화 인기가 폭발했는데 한국에 온 알란탐이 자기보다 유덕화를 더 찾아서 매우 당황했었다...당시 기사도 기억나네요
2022.01.06 13:07
그것도 개봉 당시엔 '도신'은 떼어 버리고 그냥 '정전자'였죠. vod에서 검색해보고 '도신: 정전자'라고 나오길래 긴가민가했어요. ㅋㅋ
알란 탐이나 장학우 같은 홍콩 사대천왕 중에 한국에서 인기가 다른 배우들보다 못한 사람들이 있었죠. 특히 장학우는 나중에 홍콩에서 얼마나 인기인인지 알고 깜짝 놀랐던 기억이.
2022.01.06 14:23
정전자의 '전'이 일본식 한자인 걸 보니 아마 일본에서 넘어온 제목 같습니다. 일본 수입사에서 지멋대로 제목 붙이는 경우가 종종 있죠. [그래비티]도 <제로 그라비티>로 바꿔버리고...
이렇게 주인공이 말도 안되는 실력으로 도박을 이기는 작품이 또 뭐가 있나 했더니 최근에 [카케구루이]가 있었네요ㅋㅋ 유행이 돌고 돈다고 사람들 생각이 거기서 거기인 것 같기도 해요. 메타버스란 이름으로 평행세계가 유행하는 것도 개인적으로는 복고풍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2022.01.06 15:45
일본식 한자라니 그런 건 생각도 못했네요. ㅋㅋ 그렇다면 eltee님 추리가 믿음이 가는데요.
카케구루이는 그래도 뭐랄까... 도박을 하긴 하잖아요? 도박 룰들이 다 이상해서 그렇지. 나름 트릭도 나오고 머리 쓰는 것도 나오고 하는데 반해 '도신'이 영화는 그냥 '도신은 다 잘 함. 왜냐면 도신이니까' 이걸로 끝이라서 카케구루이랑도 비교하기 좀 부끄럽습니다. 놀랍게도요. ㅋㅋㅋㅋ
2022.01.06 19:10
'도신'의 일본 제목은 '곳도 걈브라'입니다. 영어 제목에서 'of'만 빼고 썼죠.
워낙에 영어를 사랑하는 사람들이라서 홍콩 영화 제목도 영어 제목을 그대로 읽어서 쓰는 경우가 많고 무협영화나 전통소재 영화까지도 영어로 제목 붙이는 걸 좋아라합니다. '천녀유혼'이 '차이니즈 고스토 스토리'고 '황비홍'은 '완스 아폰 아 타이무 인 차이나'죠. 압권이었던 게 '와호장룡'을 '그린 데스티니'라고 했던거... 도대체 어디서 그런 제목이 나왔다 싶었는데 청명검의 영어 표기인가 보더라구요.
홍콩 배우들도 장국영은 레스리 첸, 유덕화는 안디 라우, 성룡은 쟈키첸...
왕조현의 영어 크레딧 표기가 '왕추셴'이었는데 천녀유혼이 일본 개봉할 무렵부터 '조이 웡'이란 영어 이름이 생겼더라구요ㅋㅋ
2022.01.06 20:03
그렇군요. '전'자를 보고 혹시나 하고 오버게싱을 해봤지만 아니었네요.ㅋㅋㅋ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2022.01.06 23:47
중요한 건 아니지만 장국영은 레슬리 청... 이라고 적다 생각해보니 일본식 발음으로 적으신 거였겠군요. 하하;
어렸을 때 누나가 홍콩 배우들 브로마이드들 집에 쌓아두고 지냈는데 거기 꼭 영어 이름이 적혀 있었어서 저도 저 이름들 기억합니다. ㅋㅋ 근데 희한하게 주윤발은 영어 이름을 본 적이 없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