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시절의 종교 체험

2021.12.13 13:26

thoma 조회 수:581

초등(국민)학교 때 살던 집 맞은 편에 골목을 사이에 두고 성당이 있었습니다. 성당 정문은 골목을 벗어나 있었지만 골목 끝에 위치한 집에 오자면 늘 지나가게 되어, 성당 마당과 마당을 가로질러 위치한 성모상을 흘끗 보는 게 익숙했고 동네 친구들과 놀다가 그 마당에 자주 들어가기도 했었습니다. 마당을 자주 출입하다 보니 안면을 트게 된 중학생이 생겼는데 그이가 교리 교실을 소개해서 일주일에 세 번, 한 학기 정도 교리를 듣고 신자가 되었어요. 교리를 듣는 게 좋았어요. 나의 일상에서 만날 수 없는 이색적인, 이국적인 사연들이 좋았던 것 같습니다. 당시 어린이 잡지에서 어떤 연예인이 가장 좋아하는 음식을 '마카로니'라고 했을 때 도대체 그게 뭔진 몰라도 선망하게 되는 심정과 비슷했지 않을까.


다른 가족에겐 특별한 종교가 없었어요. 성사 받을 때 꽃 사들고 엄마가 온 걸 보면 이렇다저렇다 말은 없었지만 알아서 제 발로 찾아가서 천주교 신자가 된 걸 속으론 좋아하신 것 같습니다. 많은 부모가 그렇듯 저의 도덕 및 정서 교육 일부분을 외주 줄 수 있겠다는 생각이 아니었을까 싶어요. 


저는 본당이나 교리실이나 본당 건물 반대 쪽의 수녀님들 거처나 사제관, 마당의 성모상과 그 근처의 화단과 나무와 돌, 심지어 본당 들어가는 몇 단의 계단 조차도 좋았는데 일상적이지 않은 깔끔한 건물로 언제나 열려 있는 공간이고 마주치는 사람들은 대게 미소로 인사를 나누는 곳이어서일까요. 미사를 드리는 본당에 들어가면 높은 천장과 성인들 형상의 색색깔의 창과 거대한 초와 꽃의 은은한 향기와 고즈넉함이 어우러져 제단 뒤 정면에 예수가 큰 십자가에 매달려 있음에도 두려움 보다는 누군가의 품 속인 양 편안함을 느꼈던 것 같습니다. 학교 강당도 이렇게 뻥 뚫린 높은 공간이긴 하지만 먼지 냄새 가득한 무미건조한 적대감이 스민 곳인 반면 미사 하는 이 공간의 너른 폭과 높이는 일종의 문화적 체험으로 경험되었어요. 그곳은 비일상적이고 이국적인 곳인 한편 기도로 만나는 내면의 존재와 연결된 곳이었죠. 낯설면서 동시에 가장 내밀한 공간이었습니다.


저에게 종교 체험은 낯선 곳과 내면의 내밀함이 연결되는 경험이 아니었나 싶어요. 낯선 장소라야 우리는 새로 태어날 수 있을 겁니다. 집구석의 내밀함, 이라는 것은 생각만 해도 지긋지긋하지요. 직장 생활 시작하며 집을 떠나면서 자연스럽게 종교 생활도 멀어진 게 그런 이유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형식으로서의 종교 생활은 멀어졌으나 오르간 반주에 부르던 성가는 뇌세포에 새겨진 듯 평생을 가게 됩니다. 성당에 발길 끊은 기간이 다니던 기간 보다 훨씬 길어졌는데도 그 노래의 가사들은 아직도 문득 흥얼거립니다. 그 노래를 흥얼거릴 땐 그 노래를 부르던 당시의 나를 느낍니다. 선에 대해 생각하고 반성적이고 지향하는 바가 있던, 고양된 자신을 떠올립니다. 어릴 때 종교 체험을 가진다는 것은 자신의 일부가 되어서 좋든 싫든 가족을 버리기 어려운 것이나 비슷한 상황에 처한 사람으로 만듭니다. 그래서 기독교에선 어린이 성경 교실이나 주일학교 같은 걸 중요시하는 거죠. 크리스마스의 행사. 교회 마당에 장식된 트리와 선물 주고 받기. 이런 건 디엔에이에 남게 됩니다. 


요즘은 어쩌다가 천주교 소유 건물이 많은 지역, 그러니까 천주교 재단 학교, 교구청이나 수녀원, 성당 등이 모여 있는 동네를 가게 되면 비위가 조금은 상합니다. 갑자기 인구밀도가 성겨지며 한적해지고 오래된 나무들과 그 사이로 보이는 고풍스런 단단한 건물들이나 지나가는 수도자들의 미소까지도 어릴 때와는 달리 불편한 마음으로 보게 되더군요. 흠, 산중의 절에 가서 왜 스님들은 이렇게 경치 좋은 곳에서 맑은 공기 마시고 사느냐고 시비 거는 마음이 생기진 않는 걸 보면 천주교 종사자들은 세속에 살면서 경계를 나눈 그들만의 울타리 안에 산다는 느낌 때문일까요. 유럽 같은 본고장은 성직자가 하급 공무원 비슷한 처지로, 경제적으로 인격적으로 별로 존중 못 받는다는 걸 읽은 적이 있어요. 우리 가톨릭은 서구적인 것에 대한 외경과 결부된 면이 있는 것 같습니다. 낯선 것에 대한 두려움과 그리움 같은 것, 그것에 신비화를 덧입히기도 하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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