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11.03 14:02
니트족을 위한 영화같습니다.
주인공은 수동적, 맨 처음 찬물세례받고 깨어나는 장면에서 시작하고,
"Christ is born"이라고 말하며 그를 깨우는 것은 여친. 깨어나는 곳은 매음굴이죠. r그 다음 여친이 "you a knight?"라고 묻자 주인공은 "not yet"이럽니다. 그리고 I’ve got time. I’ve got lots of time. 전에 <반지의 제왕>팬픽에서 아라곤이 맨날 "still not a king"이라고 투덜대는 것과 비슷하다고 할까요. 노오력은 안 하며 허세로 가득 찬 주인공입니다. 여친뿐만 아니라 어머니가 수동적인 주인공을 움직입니다. 그리스도가 태어났다는 데서 시간적 배경이 성탄절임을 알 수 있지만 예수 그리스도는 일대기를 남긴 인물이기도 하죠. 어머니가 빠져서 간 자리에서 왕은 이야기를 해 보라고 하지만 주인공은 니트족이라 할 이야기가 없다고 하고 왕비가 "아직은(yet)"이라고 하면서 주인공을 움직입니다.이 때 녹색 기사가 등장합니다. 화면과 교차되는 게 어머니가 다른 여인들과 함께 기도하고 뭔가를 쓰는 장면,그리고 녹색기사가 편지를 읽는데 마치 어머니가 준 편지가 아닌가 싶다는 생각이 듭니다.
영화 시작하고 성문을 나가는 두 남녀가 트로이 전쟁의 파리스와 헬렌이라고 하네요. 이 둘의 트로이 전쟁 후의 이야기는 잘 알려져 있지 않죠,영웅들의 이야기 대신. 저는 이게 영웅들의 전설의 시대가 끝나고 평범한 사람들의 시대로 넘어가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네요. 왕과 왕비 역시 자식이 없고 쇄락해 가는 모습이죠.
어쨌든 허송세월하던 남주는 녹색기사를 만나러 가기 위해 떠나는데,이게 다 본인의 적극적인 추진이 아니라 떠밀림에 의해 이루어집니다. 날 좋아하느냐고 물어 보는 것도 여친입니다. 그 사이에 남주의 이름은 유명해지고 꼬마 팬들도 따라다니는데 이 꼬맹이들을 무시합니다. 한 꼬맹이가 시무룩해져서 한동안 서 있는 장면이 있더군요.
"친절"이라고 제목이 붙은 장에서 낯선 이가 길을 가르쳐 주지만 그 친절함에 대한 보답을 제대로 하지 않죠. 낯선이에게 친절함을 베풀 정도의 아량도 없는 인간입니다. 그 낯선 이와의 대화에서 전쟁이 있었고 왕은 혼자 960명을 죽였다는 신화가 떠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바로 그 신화, 전설을 만들기 위해 어머니가 계획을 짜고 상황에 떠밀려 니트족 주인공이 나선 겁니다. 어머니가 널 보호해 줄 거라고 준 녹색 허리띠를 강탈당하고 여자 귀신을 만납니다. 여자 귀신이 머리를 건져 달라고 부탁하자 그 보답으로 뭘 줄 거냐고 묻습니다. 그러자 귀신 반응이 "why do you ever ask that?" 궁지에 빠진 사람에게 도움을 준다같은 기사도의 미덕(virtues)따위는 남주에게 없습니다. 실제로 길을 떠나기 전 왕비가 축복하면서 기사도의 미덕을 말합니다("And the five virtues of a knight light your way").
그런데 이런 성격이 계속 갑니다. 저는 이게 영화 마지막까지도 계속 된다고 봅니다. 영웅담은 바라지만 그에 맞는 덕성은 갖추지 못 한 인물이고 중간에 만난 성주의 아내 - 알리시아 비칸더가 1인 2역- 는 그가 마음에 둔 사람이 있는데도 자신의 유혹에 넘어가자 당신은 기사가 아니라고 하죠.
여차저차해 녹색 기사를 만나지만 도망가고 성으로 돌아와 왕이 죽으니 자연적으로 왕이 되고 창녀인 여친이 낳은 아이를 마치 교환이라도 하듯이 돈 몇 푼 던져 주고 빼앗고 정략 결혼을 하고 전쟁을 일으켜 그 아들은 죽고 말고 온 백성의 증오와 멸시를 받고 적이 쳐들어 오자 그제서야 그를 지켜 주던 녹색 허리띠를 뺍니다. 그런데 이게 전부 다 환상이었던 것입니다. 녹색 기사에게 잠깐 이라고 외치고 녹색 허리띠를 벗고 그의 일격을 받죠. 이 때서야 어머니의 보호 안에서 내내 수동적이었던 그가 자신의 한계마저 인식하고 스스로의 결단을 내린 것입니다.
어머니의 존재와 손길은 내내 느껴집니다. 초반에 어머니가 모임에 가지 않을 테니 네가 가서 보고 온 것을 들려 주라(tell me what you've seen)고 하는 데서 아들의 영웅담을 만들기 위한 세심한 손길이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기독교와 이교가 같이 공존하는 시대이며 어머니 역시 강한 마법을 구사하는 여성입니다. 어머니는 바느질을 하는 모습으로 나오는데 이게 어떤 계획을 짜는 것과 관련있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아들이 왕이 될 수 밖에 없긴 했지만 아들의 도량이 부족해 비극을 일으키는 것을 어머니는 옆에서 보게 됩니다. 여친이 했던 " 왜 꼭 위대해져야 해? 좋은 사람이 되는 것만으로 안 돼"?라는 말은 주인공의 이런 허세와 부족함을 찌르는 말이라고 할 수 있죠. 영웅담은 전해지지만 진실은 모릅니다. 과연 영웅이었는지, 그 과정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희생시켰는지 등등. 성주의 아내 역시 어떤 이야기들은 더해지고 편집되고 그런다고 하죠. 성주 역시 묻습니다. 모험 마치면 사람이 변하느냐고?
중간에 동행하는 여우는 성주의 집 안에는 없지만 성주의 사냥 그림 안에 나옵니다. 여우는 나중에 녹색기사를 만나러 강을 건너기 전 사람의 말로 "행복한 결말은 없다"라고 경고를 하고 주인공은 창을 던져 그를 쫓아 버립니다. 그리고 나중에 주인공이 왕이 된 다음 보는 그림에 남자의 얼굴을 한 여우가 있죠. 저는 이걸 여자의 얼굴을 한 표범으로 잘못 봤더군요.
주말에 세 번을 보고 자꾸 의미를 곰씹게 되는 좋은 영화였습니다. 한 공간 내에 고대, 중세, 근대가 겹쳐져 있다는 생각이 들게 하네요. 어머니 캐릭터는 감독의 어머니에게 왔다고 합니다. 실제로 감독이 어머니와 오래 살았는데 어머니가 자신을 쫓아냈다네요.
음악이 <더 위치>음악 담당한 사람이었다고 합니다.
2021.11.03 14:39
2021.11.03 15:03
2021.11.04 15:54
영화 엄청 좋았지요. 데브파텔 정말 이런 연기 참 잘하는 것 같아요. 저도 언젠가 그린나이트와 약속한 그날이 오면 용감하게 녹색띠를 풀어버릴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정말 잔상이 긴 영화였습니다.
2021.11.04 17:04
내내 수동적이고 찌질하고 별볼일없는 인간 역을 잘 하더군요. 성주로 나온 조엘 에저튼은 하는 역마다 잘 녹아드는 것 같고요.
<브라운 신부 전집>의 <부러진 칼>이라는 단편에 어떤 장군의 무용담과 동상이 나옵니다. 하지만 실상은 다르고 한 개인의 과오를 덮기 위해 엄청난 희생을 한 게 진실이었지요. 저는 이 영화 보는 내내 그 단편을 떠올렸어요.
<듄>과 <라스트 듀얼>은 패스해도 아쉽지 않지만 이 영화를 왓챠에서라도 본 것은 횡재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 영화 무척 좋으셨나봅니다.
왓챠에서 보셨다고 하신 것 같은데 극장이 아니라 아쉽진 않으셨나 궁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