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선의 삶>을 보고 (스포없음)

2021.09.12 10:52

Sonny 조회 수:373

평어체로 씁니다. 양해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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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도 우울과 공허와 피로를 구분하기 어려운 까닭은 어린 시절의 잘못된 기억 때문인지도 모른다. 아무리 늦어도 6교시, 어렴풋이 세시나 네시쯤 학교가 끝나면 나는 자유로워지고 말았다. 학원도 가야하고 숙제도 해야했지만 학창시절을 통틀어 단 한번도 책임감을 느끼진 않았다. 그것들은 누군가 시키는 일이었지 내 스스로 해치워야했던 과업은 아니었다. 제도권 안에서 막 길들여지려했던 인간이 야생에 풀려나는 그 찰나의 시간은 늘 막막했다. 다른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그 압박에서 풀려나는 순간 나는 해방감 대신 방황을 배웠다. 무엇을 해야할까. 무엇을 할 수 있을까. 교복을 입어야 하는 곳의 압력과 교복을 벗어야 하는 곳의 압력 사이의 그 틈을 나는 무언가로 채우고 싶은 마음만 컸지 무력했다. 이후 야간자율학습이라는 더 없이 강력한 질서가 자리잡힌 고등학교에 가서야 그 방황은 치유되었다. 그리고 나는 지각을 엄청 자주했다.


그 시간대에는 늘 노을이 지고 있었던 것 같다. 실제로는 이른 시각이고 해가 쨍할 때도 많았겠지만 어쩐지 내 기억은 노을이라는 현상에 점령당한 채로 남았다. 학교에 있을 때는 해가 떠있으니 학교가 끝나면 해도 떨어진다는 단순한 공식 때문일까. 분명히 아무 일도 없었던 그 짧은 순간들이 가라앉는 노을에 젖어 누리끼리하다. 학교에서 그렇게 말수가 많은 편은 아니었지만 집에 혼자 가는 길은 유독 소음 속에서 소외되어있었다. 나를 빼놓고 차들이 어딜 가거나 교복입은 애들이 뭘 떠들면서 나를 스쳐갔다. 자각하지 못해도 감각은 나를 건드렸다. 그럴 때마다 아마 내 눈에 걸리던 건 노을일지도 몰랐다. 해가 슬슬 내려앉을 때 나는 아마 짓눌렸으리라. 무력했던 그날 하루와 별 수 없는 내일 사이에서 절망이 가장 선명해지는 순간이었을테니. 청소년기에는 에너지가 폭주한다고들 하지만 나는 그 해석에 반대한다. 방황으로 터지지 못한 열정은 딱딱히 굳어 오후 언저리마다 사람을 깔아뭉갠다. 해보자! 라고 도전을 할 만한 아무 것도 못찾은 채로 나는 매번 끝이라는 실감만을 했다. 오늘도 이렇게 끝나는구나.


노을을 등에 지고, 혹은 머리에 이고 가는 그 무거운 길은 늘 철도길이었다. 우리 집은 기찻길 근처에 있었다. 걸어서 15분 20분 남짓한 거리에서 나는 늘 기차에 추월당하거나 맞닥트렸다. 그 쇳덩어리들은 나 따위를 신경도 쓰지 않았지만 나는 멀리서부터 그 소리를 들을 때마다 괜히 긴장하곤 했다. 가끔은 반항한답시고 기차가 지나갈 때 일부러 큰 소리로 노래를 부르거나 아무 말이나 떠들곤했다. 기차가 자신의 길을 휩쓸고 가면 나는 미약한 존재감을 느꼈다. 피어오르는 먼지와 다시 시작되는 작은 소음들 속에서 나는 느리고 조그마했다. 수직의 지긋한 압력과 수평의 지독한 속력 사이에서 나는 무엇을 그리 저항하고 싶었을까. 집에 오면 그나마 안심했다. 맞벌이 부모가 없는 집은 잠깐동안 무한의 권력을 안겨줬다. 그러면 나는 베란다에서 또 저물어가는 해를 보았다. 그 타오르던 해가, 나를 집 밖으로 끌어내던 해가 이제 다시 멸망했다. 빛도 소리도 나를 뒤흔들지 않는 안식이 찾아오리라는 게 그리 달갑지 않았다. 나는 세상 속에서 조금 더 당당해지고 싶었을까.


최선을 다해서 살아본 적이 없었다. 그저 잘 지나가겠지 하며 마음만 놓았다. 강이의 그 멍한 눈이, 어쩔 줄 모르고 굴욕적인 친절을 베푸는 그의 손이, 씩씩대며 소리를 지르고 바들대던 그의 몸이 나의 기억을 찌른다. 어쩌면 나도 그처럼 삐끗했을지도 모른다. 스크린 속 그의 삶들이 조각조각 나의 기억과 겹친다. 너무 외로워져버린 그에게 괜히 묻고 싶다. 이제는 그래도 괜찮냐고. 통곡을 배운 것도 성장일까. 조금 더 무뎌지고 무던해졌으면 좋겠다. 그럼에도 어떤 기억은 상처로 남고 나는 내가 다친것 같아 괜히 움찔한다. 나는 왜 강이와 친구가 되고 싶다고 생각하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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