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07.30 00:02
자기 자신에게 스포일러를 당해본 적이 있으십니까. 저는 <피닉스>라는 영화를 그렇게 잃어버렸습니다. 그러니까 몇년 전 영자원에서 <피닉스>를 틀어준 적이 있습니다. 그 때 이 영화는 한국에서 개봉할 확률이 극히 적고 이번 영자원 상영이 마지막일 수 있으니 꼭 보라고 누군가 추천을 해서 보러 갔었죠. 듀나님이 이 영화를 참으로 바람직한 복수의 사례로 뽑은 적이 있는 것 같은데, 그것도 기억이 나고 해서 보러갔었습니다. 그런데 영자원 가는 길에 너무 뛰어서 그랬는지 아니면 전날 잠을 못자서 그랬는지 영화를 보다가 한 이십분만에 잠들어버렸습니다. 영화가 아주 동적이고 사건이 터지는 영화도 아니어서 그랬겠습니다만.
저는 이 영화의 주인공인 넬리와 조니가 딱 만나게 되는 지점에서 잠들었습니다. 이제 막 사건이 진행될려는 찰나에 잠이 든거죠. 순간순간 눈을 떴다가 정신을 차려보니 영화의 클라이맥스에 와있었습니다. 조니가 피아노를 치고 있었고 넬리는 서성이면서 노래를 부를 준비를 하고 있더군요. 아마 이 영화를 보신 분들이라면 이게 무슨 장면인지 아실 겁니다. 정말이지 영화의 도우 한복판과 토핑들은 싹 흘리고 빵조가리 도우끄트머리만 남은 상황이었습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결말 장면만 보게 되었습니다. 비밀에 도달하기 위한 미로를 뛰어넘어서 출입구에 도달해버렸을 때의 그 허탈감이란!!
어제 이 영화를 다시 보았습니다. 그런데 결말을 알고 보니 감흥을 느끼기가 너무 어렵더군요. 보면서 하염없이 아 그때 이렇게 했었구나, 사실은 이렇게 된거였구나, 하고 흘린 영화조각들을 주워먹는 기분만 들었습니다. 그래서 제일 놀라고 소름돋아야할 그 장면에서 너무나 평온하게 고개만 끄덕이고 있었습니다. 과거의 저는 그 결말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거든요. 이제 바로 그 장면이야, 그 둘이 마침내 진실을 밝히는 시간... 저 자신에게 스포일러를 당하면서 참으로 속이 상했습니다. 제가 영자원 GV에서 어느 평론가님한테 잘난 척 하듯이 떠들었던 그 말이 생각이 났습니다. 저는 영화를 볼 수 있는 기회는 딱 한번, 아직 보지 않은 채 처음으로 그 영화를 마주하게 되는 그 시간뿐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니까 그 첫대면을 망치면 두번 세번 봐도 감동이란 건 있을 수가 없는 거죠. 이 걸작을 그렇게 흘리다니 통탄할 노릇입니다. 그래도 그 흘렸던 부분들을 기가 막혀하면서 즐길 수 있는 것만으로도 다행이라고 생각해요. 아직 쓸 거리는 많이 있는 영화니까요.
이제 공부하듯이 뜯어볼 것밖에 남지 않았어도, 교훈을 삼아서 다른 영화들은 놓치지 않으려 해야죠. 세상에는 브루스 윌리스가 귀신이고 내가 네 애비이고 절름발이가 어쩌구 저쩌구라는 걸 알아버린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알고 나면 끝나버리는 비밀과 달린 <피닉스>에는 여전히 감미로운 음성이 떠돌고 있습니다.
Speak low, when you speak love
2021.07.30 00:42
2021.07.30 22:22
크리스티안 펫졸트 좀 찾아봐야겠습니다 함부로 표현하기 어려운 분위기 같은 게 있어서... 재탕하는데도 그 부분은 온몸으로 다가오더라구요
2021.07.30 12:57
여주가 남주가 생각하는 인물이 아니다라는 건 마지막 장면에서 반전 처럼 나오진 않죠. 기억엔 초반 20분 정도만 봐도 어떻게 돌아갈지 알게 되죠 다만 마지막 장면 연출이 '우와 이렇게?'하는 부분이 있었던거 같습니다. 저도 영상자료원에서 할때 처음 봤고 다시 볼려고 했는데 시간표도, 현 상황도 그렇고 해서 포기 했습니다. 9월에 펫졸트 감독전이 있다고 하더군요. 시간과 체력만 되면 다 볼 생각입니다. ㅎㅎㅎ
이 영화를 두고 어떤 평론가가 "볼 수 있을 때 꼭 봐야한다"라고 했다죠 볼 수 있을 실때 꼭들 보시길 강권합니다.
2021.07.30 22:23
아니 9월에 펫졸트 감독전이 있따구요...?? 띠용!! 감사합니다
2021.07.30 16:46
보려고 마음먹고 있는 영화입니다. 어디선가 하고 있는데 과연 내리기 전에 이 더위와 코시국을 뚫고 극장에서 볼 수 있을지...
2021.07.30 22:23
꼭 보시길 바랍니다 아주 섬세한 영화였어요 ㅠ
펫졸트 감독과 언제나 잘 맞는 조합이지만 니나 호스는 여기서 정말 절정이었어요. 이젠 같이 할 거 다 해봐서인지 다음 작품부터는 2연속으로 뮤즈가 폴라 베어라는 신예로 바뀌었더군요.
전작 바바라에서 똑같이 남주 역할을 맡았던 배우와 이번에 관계도 참 흥미롭게 바뀌었구요. 엔딩씬은 정말 자리에서 한참 일어나지 못하게 만드는 그런 힘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여기 회원분이신 조성용님이 작성하신 이 작품 리뷰가 로저 이버트 닷컴에 올라왔더군요.
https://www.rogerebert.com/far-flung-correspondents/the-curtain-rises-on-the-power-of-christian-petzolds-phoenix