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잃어버린 영화 - <피닉스>

2021.07.30 00:02

Sonny 조회 수:587

6cef55e4fe5f332d666c5f59f0182245.jpg


자기 자신에게 스포일러를 당해본 적이 있으십니까. 저는 <피닉스>라는 영화를 그렇게 잃어버렸습니다. 그러니까 몇년 전 영자원에서 <피닉스>를 틀어준 적이 있습니다. 그 때 이 영화는 한국에서 개봉할 확률이 극히 적고 이번 영자원 상영이 마지막일 수 있으니 꼭 보라고 누군가 추천을 해서 보러 갔었죠. 듀나님이 이 영화를 참으로 바람직한 복수의 사례로 뽑은 적이 있는 것 같은데, 그것도 기억이 나고 해서 보러갔었습니다. 그런데 영자원 가는 길에 너무 뛰어서 그랬는지 아니면 전날 잠을 못자서 그랬는지 영화를 보다가 한 이십분만에 잠들어버렸습니다. 영화가 아주 동적이고 사건이 터지는 영화도 아니어서 그랬겠습니다만.


저는 이 영화의 주인공인 넬리와 조니가 딱 만나게 되는 지점에서 잠들었습니다. 이제 막 사건이 진행될려는 찰나에 잠이 든거죠. 순간순간 눈을 떴다가 정신을 차려보니 영화의 클라이맥스에 와있었습니다. 조니가 피아노를 치고 있었고 넬리는 서성이면서 노래를 부를 준비를 하고 있더군요. 아마 이 영화를 보신 분들이라면 이게 무슨 장면인지 아실 겁니다. 정말이지 영화의 도우 한복판과 토핑들은 싹 흘리고 빵조가리 도우끄트머리만 남은 상황이었습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결말 장면만 보게 되었습니다. 비밀에 도달하기 위한 미로를 뛰어넘어서 출입구에 도달해버렸을 때의 그 허탈감이란!! 


어제 이 영화를 다시 보았습니다. 그런데 결말을 알고 보니 감흥을 느끼기가 너무 어렵더군요. 보면서 하염없이 아 그때 이렇게 했었구나, 사실은 이렇게 된거였구나, 하고 흘린 영화조각들을 주워먹는 기분만 들었습니다. 그래서 제일 놀라고 소름돋아야할 그 장면에서 너무나 평온하게 고개만 끄덕이고 있었습니다. 과거의 저는 그 결말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거든요. 이제 바로 그 장면이야, 그 둘이 마침내 진실을 밝히는 시간... 저 자신에게 스포일러를 당하면서 참으로 속이 상했습니다. 제가 영자원 GV에서 어느 평론가님한테 잘난 척 하듯이 떠들었던 그 말이 생각이 났습니다. 저는 영화를 볼 수 있는 기회는 딱 한번, 아직 보지 않은 채 처음으로 그 영화를 마주하게 되는 그 시간뿐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니까 그 첫대면을 망치면 두번 세번 봐도 감동이란 건 있을 수가 없는 거죠. 이 걸작을 그렇게 흘리다니 통탄할 노릇입니다. 그래도 그 흘렸던 부분들을 기가 막혀하면서 즐길 수 있는 것만으로도 다행이라고 생각해요. 아직 쓸 거리는 많이 있는 영화니까요.


이제 공부하듯이 뜯어볼 것밖에 남지 않았어도, 교훈을 삼아서 다른 영화들은 놓치지 않으려 해야죠. 세상에는 브루스 윌리스가 귀신이고 내가 네 애비이고 절름발이가 어쩌구 저쩌구라는 걸 알아버린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알고 나면 끝나버리는 비밀과 달린 <피닉스>에는 여전히 감미로운 음성이 떠돌고 있습니다. 

Speak low, when you speak love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공지 제 트위터 부계입니다. [3] DJUNA 2023.04.01 34374
공지 [공지] 게시판 관리 원칙. 엔시블 2019.12.31 53655
공지 [공지] 게시판 규칙, FAQ, 기타등등 DJUNA 2013.01.31 364109
116991 이재오 “젊은이들 한나라 그냥 싫어하니… 이유 찾기도 쉽지 않아” [19] 라곱순 2011.04.29 4446
116990 [듀나in] 백팩 예쁜 거 추천해 주실 분 안계실까요(30대가 쓸꺼랍니다-_-) [9] 러브귤 2010.12.01 4446
116989 '눈이 즐겁다'라는 표현이 싫어요. [12] nishi 2010.09.12 4446
116988 여러 가지... [21] DJUNA 2010.07.13 4446
116987 아래 이석기 녹취록 관련 [25] svetlanov 2013.08.30 4445
116986 12대 주요 커뮤니티 [10] 남산교장 2013.05.10 4445
116985 할머니가 되는게 두려워요. [16] 스위트블랙 2013.07.05 4445
116984 오케이 캐시백 모으는 법에 대해 이야기해 봅시다 [23] 안녕하세요 2012.10.25 4445
116983 과연 박정희 보다 더 잘할 수 있을까? [50] 샤또프 2012.07.19 4445
116982 살면서 가장 힘이 되었던 말은 무엇인가요 [33] 스웨터 2011.05.09 4445
116981 소셜 네트워크의 평가가 대단하네요 [10] 샤유 2010.09.30 4445
116980 "고대에 김연아가 있으면 연대에는 ***이 없다" [5] windlike 2010.09.17 4445
116979 슈퍼스타K2 이번 주 방송에서 기억에 남는 사람들. [14] S.S.S. 2010.09.04 4445
116978 꼬박꼬박 만화책 사서보는 사람의 불만 [24] zaru 2010.08.24 4445
116977 최근에 읽은 책들 [10] 귀검사 2010.06.15 4445
116976 이 와중에 또 한 분 성추행으로 한방에 훅~~~가시네요. [7] 경대낭인 2016.12.04 4444
116975 한윤형은 천재군요. [4] 완수 2013.07.13 4444
116974 '런닝맨'이 영화로도 만들어지는군요. [14] 자본주의의돼지 2012.08.06 4444
116973 나경원 [33] 렌즈맨 2011.10.24 4444
116972 18시 현재 22.1% -> 19시 현재 23.5%입니다. [50] 로이배티 2011.08.24 4444
XE Log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