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04.17 22:06
오늘 밤 10시 50분 EBS1 영화는 왕가위 감독의 <화양연화>입니다.
아마 듀게분들 거의 다 보셨을 것 같고 저도 봤습니다만...
이상하게 저는 <화양연화>를 본 후 가슴 아프게 기억되는 장면이나 대사가 없어요.
<아비정전>에서는 장만옥이 아비의 집에 자기 물건을 찾으러 갔다가 (사실은 아비가 보고싶어 물건 핑계로 찾아갔다가)
다른 여자와 함께 있는 걸 목격하는 장면, 장대비가 쏟아지는데도 자꾸 아비의 집 근처를 서성이다가 경찰로 나오는
유덕화와 대화하는 장면 같은 자신의 마음을 어쩔 수 없어 괴로워하는 장면이나 대사가 많았고
<중경삼림>에서는 금성무가 운동장을 뛰고 또 뛰며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을 때까지 자신을 지치게 하는 장면이나
임청하와 아슬아슬하게 스쳐지나가는 장면 등 외로운 주인공이 미지의 여인에게 빠져가는 장면들이 있었고
(저는 양조위가 나오는 후반부보다 임청하와 금성무가 나오는 전반부를 좋아해요.)
<동사서독>에서는 장만옥이 장국영을 보는 표정이라든가 물가에서 양가휘가 사랑하는 여인과 마주친 장면 등
잃어버린 사랑,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의 비극적인 정서를 담은 장면들이 있었고
<타락천사>에서는 한밤중에 지나가는 기차와 함께 나오는 주인공의 독백에서 느껴지는 고독의 정서가 있었고
<해피 투게더>에서는 두 손을 다치고 만신창이가 된 장국영이 양조위를 찾아오고 양조위가 말 없이 받아주는
스스로를 괴롭히고 상대방에게도 상처를 주는 고통을 담은 장면들이 있었는데
이상하게 <화양연화>에서는 제 가슴을 울린 장면이 기억나질 않아요.
(장만옥이 무슨 도시락통 같은 걸 들고 양조위와 스쳐 지나가던 장면이 기억나긴 하는데 별로 마음이 아프진 않아서...)
제가 혈기왕성하던 시절에 봐서 뭔가 화끈하게 고통스럽지 않았던 영화에는 마음이 움직이지 않았던 건지...
세련된 화면에 멋진 음악이 흘러나오지만 왜 제 마음을 울리는 '내용'은 없었던 영화로 기억되고 있는 건지...
오늘 다시 한 번 보면서 확인해 봐야겠습니다.
듀게분들은 왕가위 감독의 영화 중에서 어떤 영화를 좋아하시는지 궁금하네요.
(<화양연화>가 제일 많을 것 같은 불길한 예감 ^^)
저는 <아비정전>입니다. (마우스로 긁으면 나와요. ^^)
다시 보고 싶으신 분들 같이 봐요.
2021.04.17 23:21
2021.04.18 00:52
영화 다 보고 기억에 남는 건 장만옥과 양조위가 연극처럼 연습할 때의 장만옥의 표정이네요.
첫 번째는 장만옥이 남편(양조위 대역)에게 "당신 여자 있지?"라고 몇 번 채근하며 묻자
양조위가 그렇다고 대답하는 순간 마치 붙잡고 있던 마지막 줄이 끊어진 것 같은 장만옥의 표정인데
남편이 바람 피웠다는 것을 정직하게 인정해도, 아니면 끝까지 부정해도, 고통스러울 수밖에 없는
마음이 고스란히 전달되더군요. 아, 저는 이런 표정 때문에 장만옥을 좋아해요.
두 번째는 LadyBird 님이 말씀하신 이별 연습에서 양조위가 더 이상 만나지 않겠다고 하고 뚜벅뚜벅
걸어갈 때 마치 순식간에 소중한 것을 잃어버린 듯한 두려움에 사로잡힌 장만옥의 표정이고요.
그리곤 마치 길을 잃은 어린아이처럼 울음을 터뜨리더군요. 이 두 장면이 기억에 남아요.
<중경삼림>에서 양조위가 나온 후반부는 여배우가 너무 발랄했던 게 아쉬웠어요. ^^
2021.04.17 23:31
2021.04.18 01:29
20년의 세월이 흐르니 옛날에 멋져 보였던 화면과 반복해 나오는 주제음악이 어쩔 수 없이 낡은 것으로 느껴지네요.
영화의 스타일은 시간 속에서 버티지 못하는 것이 아닐까, 결국 영화에 대한 평가는 인간에 대해 무엇을
얼마나 더 보여줄 수 있었느냐로 판가름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게 돼요.
<화양연화>를 보면서 저는 장만옥과 양조위가 각자의 배우자에 대한 배신감과 고통과 복수심을 별로
드러내지 않는 게 참 이상했어요. 장만옥에게서는 그나마 조금은 고통의 모습이 보이는데 양조위에게서는
거의 보이지 않죠. 사실 두 배우자의 얼굴조차 드러내지 않는 영화의 설정에서 두 주인공이 보여줄 수 있는
감정의 스펙트럼은 절반으로 줄었다고 할 수밖에 없을 것 같아요.
두 주인공은 배우자에게 진실을 묻지도 않고 그들에게서 떠나지도 않죠. 고통의 대상에서 눈을 돌릴 뿐...
이 영화에서 카메라는 끊임없이 장만옥의 몸을 훑어내리고 그 몸의 선을 그대로 드러내며 설레이게 해요.
저에게 이 영화는 새로운 대상에 대한 설렘과 갈망으로 지금 마주한 고통을 잊는 영화,
상실감과 그리움을 제대로 보여주기보다는 그야말로 '아름다웠고 설레었던 한 때'를 그린 영화 같아요.
그래서 이 영화를 그렇게 좋아하진 못하겠어요. 고통을 고통스럽게 그린 <아비정전>이 더 좋아요. ^^
2021.04.17 23:38
2021.04.17 23:40
2021.04.17 23:43
2021.04.17 23:57
2021.04.18 01:54
결제 축하드립니다. ^^ 재미있게 보시길...
저는 20대 때 항상 외롭고 사람에 대한 갈증에 허덕이던 사람이어서
저랑 비슷하게 외로워하고 그리워하고 자학하는 캐릭터가 나오는 왕가위 영화를
참 좋아했는데 이제는... ^^
2021.04.17 23:42
저는 왕가위 영화는 특별히 좋아하지 않지만 그중 화양연화가 좋아요. 듀나 님이 어디선가 화양연화에 대해 한 얘기가 생각납니다. 네 사람이 만나서 대화하면(교통정리하면) 그렇게 슬플일이 아닌데..ㅎㅎㅎ 이런 비슷한 얘기였습니다.
2021.04.18 02:27
말씀하신 대로 네 사람이 만나서 제대로 대화하면 슬픈 영화가 될 수 없을 것 같아요. ^^
진정한 사랑 영화라면 생략되는 사람이 있어야 할 것 같기도 하네요.
사랑에 빠졌을 때는 주위 사람이 안 보이고 딱 그 사람만 보이는 게 사실이니까요.
왕가위 감독이 두 주인공의 배우자를 투명인간으로 만든 이유도 어쩌면 두 주인공만 존재했던
사랑의 순간을 충실하게 그리기 위해서일지도 모르겠어요.
그런데 저는 이 영화에서 양조위의 연기가 2% 부족했다는 느낌 때문인지,
결말로 가면서 휙휙 시간을 뛰어넘는 영화의 전개가 어색해서인지
한 사람만으로 온 세상이 가득했던 순간과 한 사람이 사라져서 온 세상이 텅 비어버린 순간이
그렇게 절절하게 표현된 것 같지는 않아요. ^^
2021.04.18 01:37
2021.04.18 02:58
아, <중경삼림>에서 양조위의 상대역으로 나온 그 여배우가 페이 왕이군요.
노래도 직접 부른 가수였네요!! (제가 그 분에게 별로 관심이 없어서 이제 알았어요. ^^)
갑자기 제가 왜 <중경삼림>에서 금성무-임청하 편을 더 좋아했는지 궁금해서 찾아봤는데
제 마음에 드는 대사가 많았던 것 같아요. 유통기한 지난 통조림 대사도 그렇고...
왜 사랑이 지속되지 않는지 절망하던 제 가슴을 파고드는 대사였죠. ^^
화양연화에서 이별연습을 하는데 장만옥이 너무 서럽게 엉엉우는 장면은 볼 때마다 가슴 아프더라구요. 저는 중경삼림 제일 좋아합니다. 전반부도 분명히 훌륭한데 다 보고나면 양조위 눈빛이랑 캘리포니아 드리밍, 몽중인 노래만 생각나요 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