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저녁, 무대예술하는 분들과 밥을 먹었는데,  책 한권  소개를 바라시더군요. 이상하죠. 의식에서 까막득히 밀려나 있던 듀나님의 작품을 권했습니다. 제목을 입에 올리고도 스스로 살큼 놀랐답니다. 
듀나님의 글은 시간여행이든, 가상역사든, 평행우주이든, 로봇세계이든, 그것을 끌개 삼아 두세 걸음 더 다음 걸음을 내딛죠.  더 활보해 나가서 장편이 돼도 좋겠다 싶은데 그쯤에서 그치시더군요. 하지만 재미있고 능수능란하게 쓰신다는 건 인정합니다.

제가 처음 읽은 작품이 <태평양 횡단 특급>이에요. 기차여행의 흥미와 재미를 갈파한 작품. 19세기 증기기관이 비대해진 세계, 오토모 가츠히로의 <스팀보이> 같은 상상력을 제가 좋아했던 나이 때였죠. 정상과학에 패한 이면의 맥 끊어진 세계를 밀고 나아가는 -  피터 하만의 <에너지, 힘, 물질>을 읽던 무렵이었습니다. 비록 이해에는 실패했지만요.

<첼로>의 로봇 페티시즘과 인간의 결함도 흥미로웠습니다. 기계이기에 매혹되는 자는 미래주의자로 지칭되는데, 이 단편은 그 낙관의 얼개를 설명하는 선에서 그친 것이 다소 아쉽긴했어요. 분량 때문이었을까요.
하지만 <스퀘어댄스>. 미지의 공간에서 다른 생명체의 빙의를 겪으며 외계 기억을 춤추는 장면 묘사는 참 인상적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기억의 완강한 틀을 깨고 나오기 위해 은밀하게 '거꾸로 되먹임 negative feedback' 하는 생존자들의 시도 역시 관심이 갔습니다. 어느 선에서 그치는 부분은 아쉬웠어요. 오토모 가츠히로의 <메모리즈>를 연상시키는 모티브인 것도요.
<허깨비 사냥>은 타르코프스키의 <행성 솔라리스>의 '바다'를 '안개'로 바꾼 것인데, 설정 다음의 전개는 듀나님의 아이디어 결합이 있었습니다. 약간 장르추수적인 느낌이 있긴 했지만.

듀나님은 기존의 SF적 통념을 나름대로 비트는 재주가 뛰어나다는 느낌이에요.  <얼어붙은 삶>은 시간여행을 다루면서도 평행우주론이나 진동우주론 같은 설명을 취하지 않고도 역사의 변경을 거부하는 이상한 결정론의 세계를 그려냈습니다. 과거를 바꾸려도 해도 바꿀 수 없는 채, 움쭉달싹 못하는 시간여행이라니... 다소 정합적이지 않은 듯한 느낌도 들지만, 그 나름 골똘해지는 데가 있는 아이디어이죠.
그런가 하면, <꼭두각시들>은 다른 사람의 마음을 기계적으로 조종하는 자가 다시 누군가의 조종을 받고 있음을 자각하는 걸 그려냈어요. 조종-메타 조종이란 이러한 결합이 두 사람 사이의 문제가 아니라 실은 만인과 만인의 조종이란 차원으로 활짝 열려졌을 때의 문제로 확대된다는 점을요. 나는 누군가를 조종하지만, 나 역시 다른 누군가의 조종을 받고 있고, 그는 또 다른 누군가의 조종을 받는 등 복잡하게 얽히고 설켜 있다는 것을요. 

듀나의 소설은 마치 하이퍼텍스트처럼 촘촘하게 겹쳐있어요. 어디서 시작되는지, 최종적으로 누가 조종하는지 알 수 없는 조종의 세계. 이런 직조술이 아주 독창적인 것은 아니지만, 색다른 재현으로 흥미를 끌기에 충분합니다.
그런데 지인들에게 이 단편집을 영업하고 나니, 피터 정의 <이온 플럭스>를 보고 싶다는 갈증이 생겨나는군요.. 어디서 볼 수 있는지 검색해보고 있는 중입니다.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공지 제 트위터 부계입니다. [3] DJUNA 2023.04.01 28680
공지 [공지] 게시판 관리 원칙. 엔시블 2019.12.31 47214
공지 [공지] 게시판 규칙, FAQ, 기타등등 DJUNA 2013.01.31 357393
115245 (바낭)어떻게 했었을까?(미스트롯2 스포) [1] 왜냐하면 2021.03.25 282
115244 You are not alone [10] daviddain 2021.03.25 734
115243 2021 Producers Guild Awards Winners [1] 조성용 2021.03.25 260
115242 구로사와 기요시의 스파이의 아내를 보고(스포많음) 예상수 2021.03.25 642
115241 추호 김종인 할배 "안철수 내년 정권교체 걸림돌 될 수 있어" [4] 가라 2021.03.25 847
115240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 (2014) [2] catgotmy 2021.03.25 330
115239 안철수의 정치 [15] Sonny 2021.03.25 1088
115238 文대통령 백신 접종 간호사 "양심선언하라" 전화로 욕설·협박 받아(종합) [13] Lunagazer 2021.03.24 1365
115237 3세 여아 사망사건은 대체.... [8] 가라 2021.03.24 1477
115236 [주간안철수] LH의 최대 피해자 [19] 가라 2021.03.24 1215
115235 카페에서 보글부글 [11] 어디로갈까 2021.03.24 906
115234 요즘 피곤합니다. [3] 왜냐하면 2021.03.24 466
115233 조선구마사와 관련한 논란들을 보며. [35] 나보코프 2021.03.24 1848
115232 George Segal 1934-2021 R.I.P. [2] 조성용 2021.03.24 262
115231 바보처럼 살았군요 [4] 예상수 2021.03.24 490
115230 소셜 미디어... 좋아하세요? [11] 예상수 2021.03.24 527
115229 요즘 영화들에 대한 짧은 잡담... [3] 조성용 2021.03.23 672
115228 ‘사라지는 것들에 대한 예의’ [3] soboo 2021.03.23 723
115227 [게임바낭] 소소하게 웃기고 소소하게 재밌는 소소한 게임 '피쿠니쿠'를 소개합니다 [10] 로이배티 2021.03.23 681
115226 개구즉화(최근의 정치이슈) [4] 왜냐하면 2021.03.23 628
XE Log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