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12.08 21:53
엄마가 결혼해서 처음으로 지방에 있는 시댁에 설날에 갔던 아침의 일입니다.
엄마는 나이가 27살이셨어요. 그 때는 빠른 나이도 아니죠.
배경은 70년대이고 여성들의 명절음식 노동이 엄청나던 시절이었죠.
할아버지는 장손이시지만 아버지는 둘째아들이고 그 때 설날 아침이니까 친할머니와 큰 어머니는 부지런히 설날 음식장만을 하고 계셨겠지요.
엄마는 왠일인지 아침에 일어나서 집안을 탐색하다가 “피겨 스케이트”(아빠꺼)를 발견하고 너무 기뻐서 이걸 타고 어디서 스케이트를 탈지 집에서 나와서 찾아다녔다고 해요.
아빠 스케이트지만 엄마발에 꼭 맞았다고 하네요. 동네에 나와서 아이들에게 “스케이트를 어디서 타니?” 물어보니 얼마 걸어가서 “밤골”이라는 곳으로 몰려든 아이들이 엄마를 끌고 갔다고 하네요.
“밤골”에 도착하니 서울에 스케이트장보다 훨씬 더 빙질이 우수한 스케이트 타기에 최고인 스케이트장(얼어있는 논)이 넓게 펼쳐져 있어서 엄마는 너무 기뻐하며,
거기서 본인의 최고의 스케이트 실력을 유감없이 발휘했다고 하네요. 김연아처럼 회전을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뭔가 화려한 기교가 있지 않았을까 싶어요.
엄마가 신나게 스케이트를 타는동안 동네 어린이들은 엄마한테 박수를 막쳐주고 환호를 했다고 해요.
그리고 엄마는 즐거운 스케이트 타기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왔죠. 엄마는 “내가 스케이트 타러간거 아무도 몰랐겠지”라고 생각했는데 이미 밤골에서 우리 친가로 소식이 쫙~~~~퍼진거죠.
친가가 나름 마을 유지인 동네에서 영향력있는 집안에, 처음으로 새색시가 시집을 왔으니 어떤 사람인지 무척 궁금했을텐데 설날 아침 스케이트를 탔다는 소문은 삽시간에 온동네에 다 퍼진거죠.
엄마: “어떻게 사람들이 그렇게 빨리 알았는 몰라. 이미 내가 집에 오니까 너희 할머니랑 큰 엄마가 다 아시더라구”
시어머니도 큰 동서도 엄마에게 뭐라고 질책하는 말 한마디 안하셨대요. 그 후의 상황은 어떻게 펼쳐졌는지 모르지만 친가분들이 무척이나 과묵하고 감정표현이 없으시거든요.
40년이 지나서 저는 물었죠.
“엄마, 지금 아무리 눈치안보는 며느리라도 그래도 첫 명절에 가면 하다못해 설거지라도 도우려고 해”
“엄마는 시어머니와 큰엄마가 일할거라는 생각은 안했어????? 다들 명절 음식 만들잖아. 그러면 옆에서 잔심부름이라도 해야하는거 아냐?"
”아니 생각이 안떠올랐어. 스케이트 보는 순간 너무 타고 싶었어. 돌아와서 일하면 되지 않을까?“
지금에야 가족들이 다같이 모여서 간소하게 식사하거나 아예 그냥 스케이트장에 다같이 가서 스케이트를 타면서 즐긴다면야 그건 좋겠지만
그 전기불도 안들어오는 보수적인 시골마을에 간 서울 며느리의 충격 행보에 다들 말만 안하셨지 엄청난 문화충격을 느끼셨을거에요.
2. 덧붙인 에피소드
시할머니가 상당히 카리스마가 대단하시고 시할머니 앞에서는 나이가 많이 드셨을 때도 할머니는 늘 똑바른 자세로 무릎꿇고 앉으시고 엄청나게 엄하신 분이십니다.
그러나 새로 들어온 둘째 손주 며느리한테는 퍽 관대하셨던 듯 해요. 저를 낳고 명절에 가서 모유수유를 하는데 ”얘야, 따듯한 아랫목에서 편하게 누워서 먹이렴“이라고 하셔서
엄마는 시할머니 앞에서 누워서 저한테 모유 수유를 하신거죠. 그 때!!!! 문을 열고 들어오던 큰 엄마는 큰 충격을 받고 문을 열다가 너무 놀라 문을 닫고 나가버리셨다고 하네요.
그 집에서 시할머니 앞에서 누워있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던거죠. 엄마는"난 그냥 할머니가 말씀하신대로 한거뿐이야”
3. 할아버지와 수다떨기
요즘도 그런지 모르지만 “며느리 사랑은 시아버지”라고 다들 과묵한 여인들만 있는 집안에서
재잘재잘 수다떠는 나이어린(철없는) 며느리가 퍽 귀여우셨던 것같아요. 역시 다른 분들 일하고 있을 시간에 할어버지 옆에 붙어서 엄마는 수다를 떨면
할아버지는 기분이 좋아지셔서 엄마더러 나가서 일을 도우라든가 그런 말씀 안하시고 그 시간을 꽤 행복해 하셨다고 해요.
“너희 할어버지가 날 참 귀여워하셨어” 어떨 때는 다른 가족들에게는 안주는 음식도 엄마한테만 주시기도 하고 말이에요.
할아버지가 동생 낳고 나서 엄마한테 돈주라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할머니가 그 돈 끝내 안주셨다고 거의 평생 원망하셨는데 전 친할머니의 마음이 나이가 드니까 이해가 되더군요
평생 뼈빠지게 일해왔고 엄격한 시집살이를 하신 종갓집 며느리로 사셨는데 그닥 처음부터 달가워한 며느리도 아닌데 명절날 오면
일하는 시간보다 수다떨면서 안방의 가장 편한 자리에 있는 며느리에게 얼마나 화가 나셨겠어요. 대놓고 그렇게 야단은 안치셨더라도 말이에요.
엄마: “그래도 내가 나중에 일하긴 했지. 내가 음식 잘만들어서 어른들한테 칭찬도 많이 받았어”
엄마가 여러 가지로 친가를 놀래킨 경우가 이외에도 몇 개 있어요. 집에서 너무나 귀한 외동딸로 귀여움을 독차지하고 살았던 엄마는 여자들은 일만 하고 식사할 때는 밥을 상아래에 놓고 먹는다는 것에 너무 화가 나서 시어머니며 큰 엄마 밥까지 밥상 위로 다 올리고 여자도 밥을 같이 먹어야 한다고 주장했대요. “여자는 사람도 아니에요!”
포도같은 과일은 원래는 여러 식구가 나눠먹는 귀한 과일인데(그것도 남자우선) 엄마는 아예 포도 한 송이를 혼자서 손에 들고 다 먹는 모습에 시동생이 멈칫하며 놀라길래 왜 그러냐고 했더니 “아,,,,,아니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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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이게 빵빵 터지는 재밌는 에피는 아닐지 모르지만 전 이 이야기만 떠올리면 철없고 제멋대로였지만 사랑스러웠던 엄마의 모습이 떠올라서 항상 웃게 되요. 제 며느리라면 음,,,,그건 좀;;;
팟캐스트에 그래도 메일 보내면 혹시 아나요? 이보다 재미없는 얘기도 때로는 뽑히더라구요.
팟캐스트에 뽑혀서 김치선물받고 싶어요^^
이거 팟캐스트나 라디오에 보내서 뽑힐 가능성이 보이시나요? 여러분의 간단한 평을 듣고 싶어요.
사실 한 편 더 있기는 한데요. 이게 먹혀야 그것도 먹힐듯.
2020.12.09 07:30
2020.12.09 08:00
흐뭇한 사건이 아니라 엽기발랄한 이야기지만 따뜻하게 읽어주셔서 고마워요^^
2020.12.09 08:59
2020.12.09 12:02
어떤 면에서요? 약간만 구체적으로 설명을 해주신다면요? 자유로운 영혼?
미소를 띄워주셔서 감사해요. 역시 답글은 가영님, 근데 이거 사연으로 보내도 될까요?
2020.12.09 13:10
시대를 감안하면 진짜 자유로운 영혼이시네요. 재미있는 이야기 잘 봤습니다.
2020.12.09 13:29
시대를 뛰어넘어서 전무후무한 며느리라고 생각했어요. "자유로운 영혼"이라서 전통적인 결혼생활이랑
참 안맞는 분이 그래도 40여년 결혼 생활을 하고 지금은 "내게도 사위가 있지(제 여동생 남편)"라고 위로하시면서
살아가시죠.
2020.12.09 13:32
결국 과감하게 제가 보내고 싶은 팟캐스트에 사연을 보냈어요. 이상한게 몇 년을 그냥 청취만 했지 "사연방송이라도 나한테 무슨 사연이 있어,
그냥 듣는게 더 좋아, 피곤하게 무슨 사연을 보내냐." 그랬다가 한번 보내니까 이상한 승부욕이 생기네요. "나에겐 시간이 많다. 그리고 찾아보면
사연감도 꽤 있을껄. 한번 물량공세로 나가서 그래도 이름이라도 한번 불려봐? 전국에 나가면 모든 지인이 다 알겠지만 상관없어. 내 사연 소개되고 싶어!!!!"
여기가 익명보다는 실명이 소개될 확률이 훨씬 높거든요. 내 이름이 흔하지 않아서 이 방송듣는 지인들은 다 내 얘기인줄 알게 되는거죠.
2020.12.09 15:14
2020.12.09 15:16
다른 사람의 시선따위~ 눈치보지 않는 인생, 항상 부럽죠.
2020.12.09 18:44
저도 요즘 남 눈치 잘 안보고 하고싶은대로 하는데 그게 조울증의 조증 증상인지 약덕분에 정상이 된건지 알수가 없습니다.
주치의도 별로 자신감있어보이지도 않아요.
2020.12.09 21:47
저도 그냥 우울증이 아니라 양극성 장애 2형(긴 우울증 기간, +경조증)으로 나오는데 원래는 그냥 우울증으로 분류되던 것이
바뀐 것입니다. 의사분도 그저 신경이 좀더 날카롭고 불안정한데 우울증이 주증상일 뿐 양극성 장애라해서 내가 조증인가하고
신경쓰면 더 안좋다고 하시더군요.
전 이렇게 수다떨고 글써대는건 조증인가? 내가 유투브보고 노래하고 춤추는건 조증인가? 생각하다가
내가 밤에 뛰쳐나가서 길거리에서 밤새도록 춤을 추는 것도 아니고 동해바다로 떠나는 것도 아니고(이것도 솔직히 문제될 것도 아니지만)
뭘하든 내가 하고 싶은거 하고 살꺼야!!!! 왜 내가 자기 검열까지 하면서 가뜩이나 죽겠구만 스트레스를 더 받아야 하나 싶어요.
엄마랑 숨도 안쉬고 수다떨면서 엎어지게 웃고, "남행열차"부르면서 춤추는 맛이라도 없으면 뭐, 얌전히 앉아서 양서나 읽으라는건지.
아, 몰라, 몰라요. 남한테 피해안주고 미친 X처럼 날뛰고 화내는것만 아니면 남은 인생 나하고 싶은대로 하면서 살거에요.
그래봐야 얼마나 소극적인데요. 기껏해야 내 방에 여전히 갇혀있구만. 어쩌라구.
-오늘 훌륭한 의사분 때문에 내가 왜 이런 모욕을 받으면서 사는지 정신줄 더 꽉잡고 잘살자. 잘사는게 뭔지 복잡하다만
그래도 오늘 하루 잘살자 싶어요.
2020.12.09 21:53
가능하면 너무 눈치보지 마세요. 구체적인 예를 말해주시면 좋겠지만 남한테 피해만 안주면 내가 하고 싶은대로 하는게
당연한거 아니에요? 직장이야 간도 쓸개도 없다는 곳이지만 말이에요. 남이 원하는대로만 살면 그건 내 인생도 아니죠.
읽는내내 저절로 미소가 얼굴에서 떠나지 않았습니다. 오늘 아침은 행복하게 시작할수 있을거같아요. 감사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