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올레tv vod로 봤습니다. 스포일러는 없어요. 



 - 때는 '건국이래 최고 무더위'를 자랑했던 여름을 낀 1994년. 우리의 주인공은 서울 대치동 사는 중학교 2학년 학생입니다. 아마 여중이었죠? 부모님은 떡집을 하시는데 대치동 사는 것치곤 그렇게 살림이 여유롭지 않아서 뼈빠지게 일 하시고 바쁠 땐 자식 셋(첫째 고딩 딸, 둘째 중3 아들, 셋째이자 막내가 주인공이구요)을 총동원해서 일 시키고 그래요. 그리고 부모의 인생 목표는 자식들의 대입 성공. 첫째는 이미 글렀지만 둘째가 그나마 공부를 좀 해서 대원외고 입학시키겠다고 고삐를 조이고 성적이 별로인 주인공에게는... 아직은 어려서 가망이 있으니까, 역시 압박이 심합니다.

 하지만 물론 주인공은 대입에는 별 관심이 없구요. 대화도 안 통하는 데다가 폭력적인 아버지, 매일매일 일과 아버지 감당에 지쳐 자식에 신경쓸 여유가 없는 어머니, 주인공과 사이는 괜찮지만 본인 일탈(?)에 바쁜 언니와 아버지보다 더 폭력적인 오빠와 함께 하는 집안 꼬라지가 너무나 힘들 뿐입니다. 그래서 밖에서 몰래 친구랑 담배도 피우고 콜라텍도 다니고 그래요. 그러다 부모 강요로 억지로 다니는 한문 학원에서 딱 봐도 운동권 스피릿 넘쳐나는 강사 선생님을 만나게 되는데...



 - 딱 봐도 감독의 자전적 이야기라는 게 노골적인 영화입니다. 감독의 이전작이나 인터뷰 같은 건 죄다 영화를 본 후에 찾아봤는데, 그냥 영화만 봐도 그런 느낌이 들어요. 뭐랄까... 벌어지는 사건들이나 장면들의 디테일들이 되게 섬세하거든요. 두 시간이 넘는 이야기이고 그렇게 크고 드라마틱한 사건은 별로 없는데도 제가 이 영화를 지루하지 않게 봤던 건 그 섬세한 디테일들 덕분이었습니다. 본인 이야기가 아닌데 이렇게 디테일을 생각해낼 수 있다면 우주 천재겠네... 라는 생각이 들죠. ㅋㅋ 나중에 검색해보니 '94년에 중학생'과 감독의 나이가 대략 맞아떨어지더라구요.



 - 거의 대부분 극찬인 가운데 가끔씩 혹평도 보이는 작품입니다만. 저는 매우 대중적인 사람이라 잘 만든 영화라고 생각하며 재밌게 봤지만 혹평하는 분들 심정(?)도 이해는 할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뭐랄까... 좀 20세기말에 아시아쪽에 종종 나왔던 아트 무비들 스타일의 영향을 많이 받은 게 보여요. 많이들 언급하시던 에드워드 양이라든가. 그리고 스토리 자체가 좀 전형적인 구석도 있죠. 특히 한문 강사님은 그 역할과 의도가 너무 찬란하게 빛나서 좋은 연기와 인상적인 장면들에도 불구하고 살짝 인공적인 느낌이 들어서 좀 아쉬웠네요.



 -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도 좋게 봤습니다. 계속 말하지만 디테일들이 너무 섬세하게 현실적으로 살아 있어서 위에서 말한 인공적인 느낌을 다 덮어주고도 남더라구요. 단짝 친구나 남자 친구와의 일화라든가, 후배와의 썸(...)이라든가, 그리고 그 모든 관계들의 엔딩(?)이 다 그냥 현실의 이야기라는 느낌이었고 부모와의 관계도 그랬구요. 그리고 그게 또 딱 그 시대의 상황과 감성이다 보니 의도적으로 추억팔이 갬성을 배제한 이야기라고 해도 결국 그 시절로 돌아간 느낌이 들며 몰입을 하게 되더라구요. 제작비도 얼마 없이 찍은 영화일 텐데 로케이션은 또 얼마나 잘 했는지 정말 1994년이라고 해도 믿을 것 같은 장소들이 계속 나오고... ㅋㅋㅋㅋ



 - 사실 30분쯤 본 시점에선 살짝 웃음이 나왔습니다. 왜냐면 아, 이거 또 '남자가 잘못했네' 스토리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ㅋㅋㅋ 요즘 제가 넷플릭스 위주로 문화 생활을 하다 보니 워낙 그런 이야기들을 많이 보게 되어서요. 뭐 그게 싫다거나 거부감이 든다는 말은 아니고 그냥. ㅋㅋ 

 그런데 끝까지 보고 나니 그렇게 단순한 구도로 흘러가는 이야기는 아니었더라구요. 그냥 1994년 대한민국, 그것도 서울 대치동에 사는 10대들과 그들의 부모들이라는 시대적 배경에 딱 맞게 평범한 사람들의 이야기였고 그래서 더 마음에 들었습니다. 



 - 대충 정리하자면 저는 요런 느낌으로 봤습니다.

 1994년 한국, 서울, 10대들의 삶과 그들이 숨쉬던 공기의 느낌까지 굉장히 잘 전달해주는 영화였습니다.

 약간의 인공적인 느낌이 없지는 않고 또 열심히 따져보면 단점도 있겠지만 그래도 적절하고 섬세한 디테일들의 생명력이 그걸 덮고도 남았다고 생각하구요.

 그 시절에 대한 기억이 또렷하신 분들이라면 아마 대부분 재밌게 보시지 않을까... 라는 생각입니다.

 뭐 그 시절에 대한 기억이 별로 없어도 영화의 완성도가 괜찮고, 또 주인공과 주변 인물들이 사는 모습이 사실 지금을 사는 사람들과 크게 다르지 않기 때문에 괜찮게 보실 수 있을 거에요. 특히 여성 위주의 영화를 좋아하는 분들이라면 꼭 보시라고 추천해드려요.




 + 이미 많은 분들이 지적하신 것 같지만 이 영화의 가장 큰 단점은 사실 주인공역 배우의 미모입니다. ㅋㅋㅋ 넌 그 얼굴로 태어나서 무슨 고민이 그리 많니... 라고 한 마디 해주고 싶었던. 사실 전 그래서 한문 선생과 주인공 둘이 마주하는 장면들에 잘 몰입이 안 되더라구요. 이 장면들에서 유난히 배우들 얼굴 크로즈업이 자주 나오는데 한문 선생 클로즈업을 잡을 땐 94년 리얼리즘 느낌이다가 (배우 외모 비하 아닙니다. 전 이런 느낌 좋아해요. ㅋㅋ) 주인공 클로즈업만 잡으면 21세기 포카리 스웨트 광고 느낌으로 급전환이(...)

 그래도 뭐. 연기를 잘 하더라구요. 이 정도 예쁜데 연기까지 잘 하는 배우라면 제가 감독이라도 무조건 캐스팅하고 보겠습니다. =ㅅ=



 + 영화를 보면서 돌이켜보니 정말 94년이 정신 산만한 해이긴 했더라구요. 지금은 어째 전설의 무더위가 더 회자되는 것 같지만 월드컵, 지존파, 김일성 사망에 성수대교 붕괴... 영화엔 당연히 안 나오지만 커트 코베인 사망도 이 때였고. 전 자꾸만 삼풍백화점 일을 성수대교와 같은 시기로 묶어서 기억해버리곤 합니다. 사실 그건 이 다음 해였죠.



 + '우리들'의 설혜인이 이 영화에도 분량은 작지만 비중은 작지 않은 역으로 나오더라구요. 근데 뭐랄까... '우리들'의 그 캐릭터가 그냥 그대로 자란 듯한 느낌이었어요. 연기 톤이 비슷해서. ㅋㅋ 연기를 못 했다는 얘기는 아닙니다. 오히려 딱 역할에 어울리고 좋더군요. 특히 그 유명한(?) 마지막 대사가. ㅋㅋㅋㅋㅋ



 + 한문 선생의 캐릭터는... 하하하. 대학 다닐 때 학교에 가득하던 운동권 선배들 모습이 떠올라서 감독과 캐릭터에게 미안도 아니고 죄송할 정도로 자꾸 웃겼어요. 그분들 특징을 되게 잘 잡아 만든 캐릭터이고 배우도 그걸 되게 잘 소화하는데... 그러다보니 주인공의 정신적 멘토라는 기분이 안 들고 요즘 가끔 술자리에서 만나면 "그때 내가 뭘 안다고 그렇게 니들 앞에서 후까시를 잡았는지!!!"라고 참회하는 현실의 선배들 모습이 계속 떠올라서 그만. ㅠㅜ



 + 좀 쌩뚱맞은 얘긴데. 이 영화를 보다가 자꾸만 시선이 꽂히게 되는 게 '바람'이었습니다. 음. 실외 장면에서 바람 때문에 주인공들 머리칼이나 배경의 나뭇잎들이 흔들리는 게 보이는 장면이 많은데 괴상하게 그게 눈에 잘 들어오고 기억에 남더라구요. 왜 그랬는지는 저도 몰라요. 그냥 그게 너무 보기 좋았습니다. 거기에다가 해질녘이나 가로등 빛까지 결합된 장면이면 배우는 안 보고 계속 머리칼과 나무들만 보고 있었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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