숙명적 연대

2020.02.07 21:19

Sonny 조회 수:2389

 인간은 반드시 실패합니다. 그렇기에 평등과 자유를 구하고자 하는 정치적 움직임이 모순을 일으킨다고 해서 그 자체를 종말이라 규정할 필요는 없을 것입니다. 불완전하게나마 발명되고 내려오던 수많은 정치철학들, 그것들이 완벽하게 구현되던 때가 오히려 극히 드뭅니다. 언제는 생산수단을 완벽하게 공유했고 언제는 모든 시민의 의견을 고루 반영했으며 언제는 개개인의 자유가 완벽하게 보장이 되었습니까? -ism으로 호명되는 어떤 주의들은 그 주의가 흔들릴 때 다시 한번 뿌리를 다잡고 근저에 깔린 인간다움을 되새겨야 할 때일지도 모릅니다. 실패가 필연이라는 것은 빠르게 체념하고 손가락질하라는 것이 아니라 어려운 싸움을 진득하게 해야 한다는 각오일 것입니다.


숙명여대 예비합격생의 입학을 포기하게 만든 주체는 분명히 숙명여대(생)입니다. 트랜스젠더 입학에 반대한다는 공동성명에 다른 여대생들도 참여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한번도 트렌스젠더를 혐오하지 않은 사람처럼 이들을 비판하며 혀를 차면 되는 것입니까. 이들이 옳지 못하다며 비판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이를 페미니즘, 혹은 페미니스트의 밑바닥 혹은 속내라고 편하게 결론짓는 것에는 동의하지 않습니다. 혐오는 쉽고 연대는 어렵습니다. 그 과정에서 생기는 배제의 정치는 집단의 본능에 가깝습니다. 페미니즘은 페미니즘의 이름으로 한 학생을 몰아내면서도 수많은 다른 페미니즘이 팔짱을 끼고 같은 방향으로 걷고자 했습니다. 숙명여대 안의 얼라이들과 수많은 페미니즘 단체들의 연대 성명서를 저는 기억합니다. 왜냐하면 어떤 신체적 특징으로 여자를 여자아니라 할 수 없다는 그 말은 페미니스트들에게서 제가 들은 말이기 떄문입니다. 제가 트랜스젠더에 대한 낯설음을 많이 떨칠 수 있던 것은 페미니즘을 실천하고자 하는 이들의 말과 연대였습니다. 


페미니즘을 악, 이기주의로 매도하는 남자들의 의견을 경계합니다. 이 사람들은 페미니즘이 어떻게 여자들을 구원하고 어떻게 현실의 남성성이 페미니즘을 잉태시키는지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이 없습니다. 남성의 폭력은 남"페미"의 실패가 되고 여성의 실패는 의례 그렇듯 여성의 특성이 되며 페미니스트의 실패는 페미니즘의 민낯이 까발려진 것이라 주장하는 이들에게, 저는 늘 묻고 싶습니다. 워마드 혹은 다른 페미니즘의 얼룩을 그토록 눈여겨보는 남자들의 시야는 얼마나 시커멓게 물들어있는가. 그 주장을 하는 본인들이 머무르는 곳의 남자들은 여자를 어떻게 보고 얼마나 고결한가. 이들이 얻고자 하는 것은 딱 하나입니다. 페미니스트를 비판함으로써 페미니스트를 비판할 수 있는 본인들의 무결함 도덕적 위치입니다. 세상 만물을 까고 모든 비판에서 자유로울 수 있다는 그 허상을 실현하기 위해 이들은 또다시 페미니즘을 단두대로 끌고 가고 싶어합니다. 세상 모든 이즘과 사회운동이 다 죽고 없어졌을 때 만물을 까고 놀며 낄낄대는 본인들의 야만이 비로소 구속받지 않을 수 있을테니까요.


또 묻고 싶은 것은, 과연 이 트랜스젠더 혐오가 여자들 그리고 페미니스트들에게만 만연한 것이냐는 것입니다. 공교롭게도 우리 사회는 트랜스젠더가 존재를 걸고 던지는 질문에 대답해야했습니다. 트랜스젠더 여성이 군임무를 다하고 싶다면서 기자회견을 했을 때, 남자들은 뭐라고 했나요. 그렇게나 여자도 군대를 가야한다고 국민청원을 걸고 본인들만 독박쓴다고 억울해하던 이들이 여성의 군복무에는 회의적인 태도를 비췄습니다. 꼭 저래야하나, 규정이 그런데 어떡할 것이냐, 군대는 오로지 신체적으로 "완벽한" 남자들만의 것이라며 군 독점주의를 내세우던 이들은 자동으로 트랜스젠더 여성을 소외시켰습니다. 이것이 다른 것이라면 그저 흔한 거부감으로도 비춰질 수 있겟지만, 여자도 기어이 해야한다는 "군대"의 임무였기에 트랜스젠더에 대한 남자들의 태도는 더욱 극명히 조명되었습니다. 그런 남자들이, 과연 페미니스트들을 욕할 수 있을까요. 트랜스젠더 바와 술집들의 고객들은 어떤 성별이며, 하리수를 괴물취급하고 각종 매체에서 FTM을 "괴물"로 감상하던 것은 누구였던가요. 왜 트랜스젠더 혐오가 페미니스트들 사이에서 발발할 때만 남자들은 이토록 고고해질 수 있는 것인가요.


남자로서 감히 비판할 수 없는 부분도 있습니다. 어쩌면 이번 트랜스젠더 입학 거부 사태야말로 남자들이 쉽게 말을 얹을 수 없는 "페미니즘"의 또 다른 면일지도 모릅니다. 페미니스트들은 무엇을 근거로 주장했습니까. 여자들의 안전을 이유로 그 입학을 거부했습니다. 이것은 분명히 인과관계가 한없이 약한 주장입니다. 그러나, 여자들이 여대에서 안전하지 못하다는 현실만큼은 아주 선명한 현실입니다. 제가 개인적으로 정리했던 여대의 남자들 침입 사건을 검색해보았습니다. 알몸남도 있었고 화장실에서 도촬하다 잡힌 남자도 있었습니다. 숙명여대라고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모 남자중학생들이 견학을 왔다가 탈코르셋 대자보를 찢은 사건이 있었고 어떤 남자가 화장실에 무단침입했다 발각되자 도주한 사건이 있었습니다. 여대, 그리고 여자들의 안전을 남자가 어지럽히는 것이 확연한 이 상황에서, 여자들의 주장이 틀렸다 한들 그 근거는 어쩔 수 없이 "옳고"마는 이 상황을 남자들은 손가락질 할 수 있습니까. 저는 그것이 공론장에 심취한 방구석 토론가의 모습이라 생각합니다. 여자들의 불안을 자아내는 주체가 여자들의 불안이 부정확하다 비웃고 지적하는 것은 조금 뻔뻔한 일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럼에도 슬픈 것은 슬픈 일입니다. 한 개인의 자유가 집단의 폭력에 굴복한 것은 현실입니다. 그의 존재와 연대하고 싶습니다. 페미니즘이 한 존재의 특수성과 동등함을 가리키고 있기에, 그것을 실천하는 것이 이처럼 적기일 수가 없습니다. 그의 서러운 좌절을 어쩔 수 없이 배움의 기회로 삼으며 같은 소외감을 겪고 있는 친구들에게 더 관심을 가지고 싶습니다. 자본주의의 거대한 폭력 앞에서 개개인이 연대하는 것은 숙명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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