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획

2020.01.17 10:22

어제부터익명 조회 수:366

2019년 내내 영화 기생충의 '아들아 넌 계획이 다 있구나'라는 송강호 대사를 반복해서 들은 거 같아요. 유행어는 여기저기를 떠돌다가 팔도 왕뚜껑 공중파 광고에도 나오기도 했었죠. 기생충을 보면 유산 계급과 무산 계급에 따라 '계획'할 수 있는 삶과 그렇지 못한 삶이 나눠지는 거 같기도 해요. 



하지만 '아무것도 계획대로 되지 않음'이 삶의 유일한 속성 같다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군대에 있던 시절에 저보다 한 살 더 많았던 동기와 외박을 나갔던 적이 있어요. 오랜만에 만끽하는 자유라 시간과 분 단위로 계획을 잡았더랬죠. 뻔하지만 계획대로 된 건 아무것도 없었고 이리저리 망가진 계획으로 터벅터벅 부대로 복귀했습니다. 억울해하는 나를 가만히 보면서 그 동기가 한 말이 아직도 기억에 남아요. 


"계획대로 안 되는 게 살아가는 묘미야."



영화라는 장르야말로 정교한 계획이 전제되는 작업이에요. 시나리오를 쓰고 스토리보드를 그리는 것 이외에도 온갖 프리 프로덕션 과정이 패스츄리 반죽처럼 켜켜이 얹혀있죠. 그런데 신기한 건 아무리 완벽한 플랜을 갖고 있더라도 촬영 현장에 가면 아무것도 계획대로 되지 않을 때가 많아요. 그런 알 수 없는 우연과 화학 작용으로 어떤 영화는 마스터피스가 되고 어떤 영화는 망하기도 하죠. 이번 스타워즈의 시퀄도 처음 계획 당시에는 완벽했을 거 같아요. 처음 계획되었을 10년 전쯤에는 9편이 이렇게 나올지 아무도 상상하지 못했겠죠. 캐리 피셔의 죽음을 포함해서 말이죠. 



여행 준비를 하고 여행에 나서면서 계획의 속성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되었어요. 이질적인 낯선 곳에 가는 여정이라 제법 여러 가지 계획을 세우고 준비했음에도 불구하고 여정은 전혀 알 수 없는 맥락으로 흐르더라고요. 내가 어떤 의지를 가지고 힘이 들어갈수록 그에 반해 여정은 전혀 다른 궤도로 튕겨가는 느낌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획은 필요하겠죠. 여행도 사랑도 재물도 모든 게 계획대로는 안 되기 마련이지만 모든 게 끝나고 망했을 때 처음 시작했던 계획의 초심을 떠올려보는 건 중요한 의식 같아요. 이런 끝 맛을 제대로 만끽할 수 있어야 어떤 어른의 영역에 이르게 되겠고요.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공지 제 트위터 부계입니다. [3] DJUNA 2023.04.01 30081
공지 [공지] 게시판 관리 원칙. 엔시블 2019.12.31 49088
공지 [공지] 게시판 규칙, FAQ, 기타등등 DJUNA 2013.01.31 359401
111150 캐리 멀리건이 오스카 심사위원들 영화 봤다는 인증샷 찍어라 [5] 가끔영화 2020.01.26 1255
111149 2020 Directors Guild Awards Winners [1] 조성용 2020.01.26 484
111148 "주키퍼스 와이프" "다운폴" 추천 [4] 산호초2010 2020.01.26 501
111147 "쉰들러 리스트" 등....떠오르는대로 잡담 [6] 산호초2010 2020.01.26 546
111146 이제 이 나이가 되니까... 장국영이... [4] 동글이배 2020.01.26 1228
111145 옛날 맛있게 사먹었던거 같은 옛날영화 워리어1979 [3] 가끔영화 2020.01.25 500
111144 트루 로맨스, 요즘 다큐멘터리들, 카산드라 크로싱 [3] 양자고양이 2020.01.25 797
111143 남산의 부장들 [3] 메피스토 2020.01.25 1448
111142 그레타 거윅 연출의 작은 아씨들을 보고 [5] 예정수 2020.01.25 1393
111141 우한 폐렴과 공항 풍경 [6] 어제부터익명 2020.01.25 1595
111140 로저 페더러 호주오픈 100승 달성! 영화처럼 2020.01.24 436
111139 이동진이 나온 라디오스타, 김혜리님의 쾌유를 빌며 [6] 예정수 2020.01.24 1875
111138 이런저런 일기...(잠, 딸기빙수, 샤워) [1] 안유미 2020.01.24 490
111137 [넷플릭스바낭] 폴란드제 동네 탐정 드라마 '울트라 바이올렛'을 봤어요 [4] 로이배티 2020.01.24 1686
111136 테레지엔슈타트의 아이들 [18] 어디로갈까 2020.01.24 879
111135 2020.01.19. 퀸 내한공연 후기 [6] 샌드맨 2020.01.23 1066
111134 [당신의 명절 주제가로 삼아보세요-스압] 밤의 여왕 아리아 <지옥의 복수심이 내 마음에 끓어오르고> [4] 스누피커피 2020.01.23 846
111133 아 기부니 몹시 조아요 ㅋ. 서지현 검사가 법무부로 발령난 게.. [4] 무도 2020.01.23 1168
111132 cica plast baume B5 입술에 발라보신 분 있으신가요? [2] 산호초2010 2020.01.23 520
111131 [게임바낭] 울펜슈타인: 뉴 콜로서스... 라는 게임 엔딩을 봤어요 [2] 로이배티 2020.01.23 711
XE Log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