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12.26 15:41
제 직종 사람들은 언제나 연말을 학교생활기록부 점검과 함께 하죠.
정확히는 그냥 담임 교사들만 하는 일이긴 한데 뭐 전 지금껏 거의 담임을 해와서. ㅋㅋ
제가 학생이었던 시절의 생활기록부는 정말 아무 것도 아니었죠.
그냥 좀 두꺼운 종이 쪼가리 한 장에 3년치 내용이 다 담겨 있었는데 담긴 내용이 뭐가 있었더라...
이름, 주소, 1, 2, 3학년의 소속 학급과 담임 이름, 출석 통계, 과목별 성적, 그리고 담임 교사 의견란 한 칸씩 정도?
3년 동안 쓰는 종이 한 장 양식에 매년 담임들이 수기로 적어주는 식이었는데 그나마도 담임이 뭔가 생각해서 적어줘야할 부분은 의견란 뿐이었죠.
그리고 이거 어디다가 제출하고 쓸 데도 없으니 다들 그냥 짧고 굵고 솔직하게 적어줬던 걸로 기억합니다.
저는 '주의가 산만하다'는 표현을 생기부를 통해 배웠.... (쿨럭;)
그에 비해 요즘 학교생활기록부는 어마어마해요.
중3이 되어 졸업할 때 쯤이면 보통 A4 10페이지 이상 분량이 나오는데 그 중 거의 절반은 담임과 교과 담당 교사들이 적어주거든요.
그리고 이걸 입시에 써야 하니 적으면 안 될 내용, 적어줘야만 하는 내용이 정해져 있는데 그 규칙이 해마다 계속 수정되고 추가됩니다.
예를 들어 이제는 생기부의 어디에라도 '대회'라는 단어를 적으면 안 돼요. 큰일 납니다. ㅋㅋ 그래서 학교 행사들 이름에서 '대회'가 죄다 빠졌죠.
영어, 그러니까 알파벳은 책 제목과 저자명에만 쓸 수 있습니다.
책 제목 외엔 유명한 사람이나 캐릭터 이름을 적으면 안 되는데 역사적 인물이나 고전 예술 작품 제목은 또 괜찮아요.
그러니까 링컨은 되고 뽀로로는 안 되는데 앤디 워홀은 애매하고 뭐 그렇습니다. ㅋㅋㅋ
대학교 이름이나 구체적인 무슨 기관 이름을 적어도 안 돼요.
그러니까 말하자면
"아주대에서 실시한 진로체험 프로그램에 참가해서 뽀로로 캐릭터를 활용한 영상을 제작해 유튜브에 업로드했다"
는 내용을 적고 싶으면
"대학교에서 실시한 진로체험 프로그램에 참가해서 유명 캐릭터를 활용한 영상을 제작해 사람들과 공유했다"
라고 써야 하는, 뭐 그런 식이죠.
그런데 사실 가장 피곤한 건 이런 규칙들이 아니라 남이 쓴 문장을 들여다보며 오류를 찾는 일입니다.
다른 반의 학교생활기록부를 넘겨 받아서 점검하고 돌려주는 일인데, 그 학급 담임은 물론 그 학급에 수업을 들어가는 모든 교사들이 다 몇 문장씩 적어주게 되어 있기 때문에 십수명이 쓴 글들을 읽게 되는데... 교사라고 해도 딱히 작문 교육을 받는 것도 아니고 그냥 평범한 동네 아줌마 아저씨들이라 다들 말은 잘 해도 그걸 문장으로 적으면 맞춤법 오류 같은 건 둘째 쳐도 비문이 난무하거든요. 사소하게 한 두 군데 고쳐주면 될만한 문장이면 그냥 체크하면 되지만 문장 자체가 총체적 난국일 때는 참말로 난감합니다(...) 그리고 이런 경우에는 고쳐달라고 알려드려도 '아 뭐 이런 것까지' 라면서 기분 나빠하시는 경우가 많아서 더욱 난감.
하지만 그래도 할 일이니까... 라고 눈에 초점이 안 맞을 지경이 될 때까지 죽어라고 그 종이쪼가리들을 들여다보다보면 문득문득 찾아오는 슬픔이 있죠. 그게 뭐냐면,
아무도 이걸 안 읽을 거라는 겁니다.
제가 일 하는 곳이 고등학교가 아니다 보니 언젠가 이걸 읽을 사람은 어차피 교육청의 생기부 점검 담당자들 밖에 없고 (학생들 본인에게 보여주는 건 금지입니다) 그나마 그 양반들도 대충 스크롤하면서 눈에 띄는 오류만 찾지 이걸 그렇게 하나하나 다 읽지 않아요.
뭐 극소수의 특목고나 예고 같은 데 갈 아이들 같은 경우엔 그 학교 입시 담당자들이 읽게 되겠죠. 근데 그럴 학생은 대략 200명 좀 안 되는 한 학년 학생들 중에 많아야 너댓명이고 사실 그 입시 담당자들도 이런 거 문장 하나하나 다 읽지 않아요. 몇 군데 좀 중요해 보이는 부분만 발췌해서 보죠.
결국 나머지 학생들의 학교생활기록부는 이렇게 죽어라고 담임과 교과 담당들이 쓰고, 죽어라고 그 사람들이 점검하고, 그걸 또 교육청측 점검자가 훑어본 다음에, 교육청 서버 스토리지를 낭비하는 바이트 덩어리가 되어 영원히 숙성됩니다. 그야말로 진정한 [바이트 낭비]라고 할 수 있겠죠.
어쨌든 이것도 일이니 매년 열심히 하긴 합니다만.
그래도 뭔가 개선이나 변화가 필요한 게 아닌가... 라는 생각을 늘 합니다.
한 마디로 '이 일 하기 싫어 죽겠어요'라는 내용의 글이었습니다.
끄읕.
+ 시국이 시국(?)이다 보니 덩달아 생각났는데. 조국네 딸 생기부 유출건은 왜 아직도 해결이 안 되고 있는지 모르겠네요. 요즘 생기부는 조회해서 출력하면 거기에 몇년 몇월 며칠 몇시 몇분 몇초에 이용자 누구가 출력했다고 생기부 하단에 찍혀 나오고 그 기록도 교육청 서버에 다 남는데 말입니다. 2~3일이면 해결될 일이 영원한 미제 사건이 될 기세네요.
2019.12.26 18:47
2019.12.26 22:01
초등학교 생기부는 정말로 내신의 의미 조차 없으니까 더하겠죠.
그리고 초등학교 같은 경우엔 워낙 학부모들과 담임이 이 얘기 저 얘기 주고 받는 일이 많아서 굳이 생기부에다가 아이들 단점까지 적을 필요가 없기도 하구요.
게다가 학교생활기록부 기재 가이드라인 중에 그게 있어요. 부정적인 면을 적을 수는 있으나 적을 경우 반드시 '긍정적 변화 가능성'을 함께 적으라구요. ㅋㅋ
저같은 경우에는 뭐 일단 생기부에는 최대한 미화해서 적어놓고 솔직한 이야기는 성적 통지표의 가정통신문란에 구체적으로 (물론 수위 조절과 예의 챙기는 건 필수지만) 적어 보냅니다. 성적통지표는 학부모들이 꼭 읽는 문서니까 오히려 이 쪽이 나아요.
2019.12.27 00:56
2019.12.26 18:56
미국 제도를 입시 제도에 반영했는데 미국에서도 이렇게 할까요???? 전세계에서 이런 짓을 하는건 우리나라 밖에 없겠죠.
촌철살인하던 옛날 옛적 생기부의 한 줄 평도 다시금 떠오르네요. 저는 정말 불친절하고 마음에 안들게도
"과묵하다"고 써있어요. "과묵한" 사람을 도대체 어디에 써먹는단 말이냐!!!! 싶어서 생기부 볼 일이 생길 때마다
왜 이렇게 적으셨을까 싶은데 그저 선생님들께는 제가 말없는 아이였나봐요.
2019.12.26 22:03
요즘 보면 아시아권 다수의 나라가 대한민국 스타일로 대입에 목숨을 거는 분위기더라구요. 다른 나라도 비슷한 사정인 동네가 있지 않을까... 싶은데 확인해볼 길은 없네요. ㅋㅋ
그래도 '주의가 산만' 보다는 낫지 않습니까!! 과묵은 그냥 특성이지 나쁜 건 아니잖아요. '주의가 산만'은 좋게 해석할 여지가 전혀 없... ㅠㅜ
2019.12.27 10:11
아시아권이 극성인건 알아요. 중국, 일본, 싱가포르까지요. 싱가포르는 석차 공개도 하고 우리나라보다 더 적극적으로 정부 차원에서까지 가세해서 학업 성적 압박을 줘서 자살한 애들이 엄청 많다고 들었어요. 한국 사람이 듣기에도 살벌하달까요. 그러나 생활기록부를 이렇게 기록하고 관리하는 시스템은 도대체 어디서 왔는지 궁금해져요.
전 요즘같은 시대에는 "과묵"보다는 "주의 산만"이 낫지 싶지 말입니다^^;;
2019.12.26 19:17
2019.12.26 22:04
그렇죠.
점검만 당하지 않는다면요. ㅋㅋㅋ
언젠가 다른 지역에서 같은 일 하는 친구들이랑 얘길 해보니 전국에서 유독 경기도가 독하게 점검하고 난리를 친다고 하더라구요. 근데 전 하필 그 동네라... orz
2019.12.27 00:19
기업의 다면 평가 같은 느낌일 거 같아요.
매년 반복되는 루틴이다보니 비슷비슷한 문장, 문단 템플릿 복붙이 될 거 같기도 하고요.
2019.12.27 11:21
맞아요 매년 수십(담임교사)에서 수백명(교과 담당 교사)에게 글을 적어줘야 하니 비슷비슷하지 않게 적는 게 이상한 일인데,
문제는 '같은 문장 복붙 금지'라는 교육청 룰이 또 있어서 죄다 비슷비슷하면서도 절대로 똑같지는 않게 적어줘야 합니다.
학생 개인 특성에 대한 이야기야 그게 맞겠지만 수업 중 태도나 성취도에 대한 평가도 다 다르게 적으라고 하니 환장해요. ㅋㅋㅋ
2019.12.27 00:54
2019.12.27 11:21
남의 비문 신나게 바로잡아준 후에 남이 지적한 제 비문을 보며 민망해하는 재미가 있습니다. ㅋㅋㅋ
2019.12.27 16:14
혹시 배우나 아이돌 지망해서 연극영화과 가려는 학생들은 광고출연 경력도 까다롭게 적어야 할 것 같네요.
2019.12.27 19:26
저희 때는 성적도 그렇고 선생님 의견도 그렇고 꽤 솔직한 feedback을 받았다고 기억됩니다. 안 좋은 말도 당연히 있고, 못한 과목은 못한대로 잘한 과목은 잘한 대로 성적이 나갔던 것 같은데..
요새는 초등학교의 경우 거의 대부분의 학생들에게 좋은 말만, 좋은 성적만 주는 것 같아서, 이런 식으로 하는 게 의미가 있나 하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아이가 초등학교에 들어가서 받아온 의견에 안 좋은 말이 전혀 없고 실제 아이의 생활 모습이랑은 거리가 많이 먼 칭찬만 있던데, 이게 담임 선생님 관찰력에 문제가 있거나 신경을 덜 써서 그런 문제가 아니라 (주변에 물어보니까) 안 좋은 얘기를 쓰면 전화 오고 난리가 나서 요새는 다 그렇게 좋은 얘기만 해요..라는 반응이더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