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와 함께한 저녁식사

2019.07.20 06:07

어디로갈까 조회 수:1526

어젠 dpf(독일 동료)가 굳이 저와 저녁을 같이 먹어야겠다며 바득바득 따라붙었어요. "왜 그래야 하는데?" 물으니 요즘 제 얼굴이 '해골바가지'(이런 표현은 대체 어디서 배우는 건지) 같아서 뭘 좀 먹여야 하겠다는 동정심/의무감이 들기 때문이라더군요. 사실 한달 전쯤부터 거울 볼 때마다 패인 볼이 주는 섬뜩함에 놀라고 있던 터라 말문이 턱 막혔습니다.
콜라겐이 많다는 이유로 그가 선정한 메뉴 '족발'을 먹었어요. 제가 먹는 모양새를 지켜보다가 "오른쪽 어금니로 다 씹었으면 꿀꺽 삼켜야지 왜 왼쪽 어금니에게 토스하는 건데?"라는 지청구를 들어가면서요. 

평소 dpf와 단 둘이 있으면 자주 빈 순간이 생겨납니다. 할 말이 없다기 보다는 지금은 이 말을 할 때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곤 해서요. 그래서 그도 제가 마련한 침묵의 흡인력에 호응하여 혹은 배려하듯, 그 진공의 규격에 맞는 미소만 지어보이곤 하죠. 근데 어제 저녁자리는 그의 잔소리 대잔치였어요. 제 침묵과 그의 침묵이 날카롭게 부딪혀 과도하게 진지한 풍경이 열리던 옛순간들이 절실할 정도였죠. 그래도 당황하지 않고 그의 월권적인 간섭을 다 받아들였습니다. 이만큼 우리가 가까운 사이가 됐나? 짚어보면서.

모든 관계에는 관계를 매개하는 상황이나 의식이 있죠. 대부분의 매개는 자연스러워 자각되지 않지만 매개의 매개성이 황황히 노출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어색하고 불편하지만 그것도 관계의 한 풍경인 거죠. 풍경은 변하기 마련입니다. 어떻게 변할지 알 수 없다는 것도 풍경이 갖는 매력의 한 부분이고요. 혹시 관계가 원치 않는 방향으로 흘러간다 해도 기껏해야 불편하거나 실망하게 될 뿐 아니겠습니까. 저는 그 괴로움의 풍경 속으로 걸어들어갈 준비가 돼 있는 사람입니다. 험험

2. 몇년 전, dpf는 제게 한국어를 일 년 정도 배웠습니다. 그시절 그는 아침마다 머릿속에 떠오르는 서툰 글을 메모지에 적어 제 책상 위에 올려 놓곤 했어요.  삐뚤빼뚤한 글씨로 쓰인 그의 시적인(?) 문장을 음미하는 일이 저의 작은 즐거움이었죠. 
언젠가 아침의 글은 정도가 좀 지나친 것이었습니다. 메모지엔 이렇게 쓰여 있었어요. "너의 얼굴은 싸늘하게 웃는 겨울처럼 차갑다."
한국인이 쓴 글이라면 말할 수 없이 유치하고 상투적인 표현이라고 썩소했겠지만, 이방인에게서 나온 그 수사는 당돌하게 문학적이어서 저를 웃게 만들었어요. 생각에 잠기게도 만들었습니다. 

그 메모를 보고 눈으로 그를 찾아보니, 그는 거리의 소음이 밀려들기 시작하는 창가에 서서 일부러 커피머신을 높이 치켜들고 집중하여 커피를 잔에 따르고 있는 중이었습니다. 마치 시간 밖의 존재인 듯 적요의 극치를 보여주는 모습이었어요. 하여 저는 그의 책상 위에다 이런 답 메모를 남겨 놓았더랬죠. "너의 얼굴은 회의 없는 한 순간처럼 고요하다."

(사전에서 '회의'라는 단어를 찾아 다섯 개의 의미를 정리해 다음날 제시하는 예쁜 짓을 했는데 그날 점심을 제가 샀던가, 아니던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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