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펌] 제자의 죽음에 부쳐

2017.05.18 09:25

윤주 조회 수:1337

"이한빛은 나의 제자였다. 스승과 제자의 관계라는 것은 선택하고 키워가는 것이라기보다는 지정된 주소에서 운명처럼 서로를 발견하게 되는, 느슨하지만 파기할 수 없는 연결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나는 강의실 뒤쪽에 말없이 앉아있던 그 붙임성 없이 키만 컸던 한 청년을, 소식을 듣지 않게 된 지 수년이 지난 후에도 여전히 나의 제자라고 부를 수 있다.

이한빛이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은 작년 10월 말이었다. 대학교 4학년 때 CJ E&M에 입사하여 한결같이 꿈꾸던 드라마 PD가 된 지 채 1년이 되지 않아, 조연출로 작업하던 첫 드라마인 <혼술남녀>가 종영되던 날, 거짓말처럼 일과 가족과 벗들을 뒤로 두고 떠난 것이다. 그가 남긴 유서와 전화기에는 누구나 부러워하는 대기업 정규직의 꿈과 열정이 아니라 끊이지 않는 고통의 흔적이 고스란히 각인되어 있었다. 하루 20시간 이상을 일한 후 두세 시간을 자고 다시 출근해야 하는 삶, 그리고 그것보다 견디기 힘든 상명하복식의 군대문화와 폭언, 특히나 드라마 촬영 과정에서 프리랜서 비정규직들을 해고하고 선지급금을 환수하는 일까지 떠맡게 된 참담함까지 상처에 박힌 모래알처럼 빨갛게 드러나 있었다.

그러나, 무슨 이야기가 새로울 것인가. 이곳은 약육강식의 세상이고, 도태되지 않으려면 타인을 뜯어먹어야 하는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이 이루어지는곳이며, 이 시스템을 움직이는 것은 먹이사슬의 말단에 위치한 이들이 갈아 넣는 시간과 삶과 육신이 아니었던가. 그 말단에조차 가지 못해 고뇌하는 청년들이 부지기수가 아닌가. 진상규명에 협조하던 유족에게 회사가 몇 달이나 걸려 내어놓은 대답은 “근태불량”과 “부적응”, 그리고 방송업계 생태가 “원래 다 그렇다”는 대답이었다. 요컨대 ‘유별난 죽음’이라는 것이다.

너무나도 부적절한 이 대답은 역설적으로 그 죽음을 설명해 줄 열쇠이지 않을까. 그들이 원했던 것은 닳지 않는 톱니바퀴였고, 그들이 만드는 것은 드라마라는 허울 좋은 포장지에 싸인 영혼 없는 공산품이었으며, 그곳은 무리하게 돌려 한시라도 빨리 무언가를 뽑아내는 효율적인 생산라인이었다. 그런 반면, 한빛이 원했던 것은 다만 소박한 한 편의 좋은 드라마를 가꾸는 일이었을 것이다. 학생 때, 영화평론으로 교내 문학상을 수상한 한빛이 한 명의 예술가로 성장하기에는 절망적인 곳이었다. 역설적이게도 <혼술남녀>는 청년들을 ‘위로’하는 드라마였다.

나름의 이유는 있을 것이다. 경쟁은 조여오고, 자본과 시간은 희소하며, 제작공정은 복잡한 곳에서 윗선이 ‘예술’을 한다는 미명에 오히려 무리한 요구를 아래로 내려 보낼 수도 있었을 것이다. 또 억압적 군사문화는 방송사만이 아니라 어느 곳에서나 입사순서, 학번 등으로 팽배하지 않은가. 그러나 나는, 너무나 많은 인생의 가능성이 남아있는 시간에 그가 너무나 성급하고 섣부른 비극적 결정을 내렸다 동의하고 싶은 마음을 억누르며 다음의 질문을 묻는다. 왜 아무도 직장에서 손을 내뻗어 말걸지 않았나? 왜 이런 죽음은 반복되는가?

그 이유는 우리 모두가 타인의 아픔에 둔감하고 쉽게 망각하도록 설계된 세상을 살기 때문이다. 불과 1년 전 구의역 스크린도어 속 19살 청년의 죽음을 우리가 희미하게라도 기억하는 것은 강렬한 컵라면의 이미지 때문이지만, 2008년 과도한 업무와 박봉과 스트레스에 투신자살한 어느 방송작가의 이야기를 당신은 기억하는가. 세상은 ‘원래 그런 곳’이고 방송도 ‘원래 그런 곳’이기 때문에 이런 일들이 일어나고 잊혀지고 다시 일어나도 괜찮은 것인가.

내가 아는 한빛은 적어도 그런 아픔의 진앙에서 멀어지기를 거부했던 청년이었다. 첫 인턴 월급부터 매달 세월호 4·16연대, 빈곤사회연대, KTX 해고 승무원 대책위 등에 그가 뿌듯하게 보내던 후원금을 생각한다면, 그는 타인에게 소박한 체온을 머금은 원죄가 있었던 셈이다. 회사가 그에게 비정규직들을 해고하고 선지급금을 환수하도록 지시한 순간 눈동자는 이미 빛을 잃었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이 글을 쓰게 되었다. 한줄기 빛처럼 스쳐간 한빛의 청춘을 추모하고 그것을 잊지 않는 일이 새로운 대통령을 뽑고 정치를 바로잡는 일만큼이나 우리 공동체의 내일을 위해서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고인이 즐겨 읽었다는 어느 철학자의 말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

“세잔은 무엇 때문에 생트 빅투아르 산을 매순간 그렸겠는가? 그것은 매순간 빛이 하나의 선물이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삶이란 그 모든 비극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아름다울 수 있다. (중략) 나 자신으로서 사랑받지 못했기 때문에 청춘이 없었던 나는 마침내 그 어느 때보다도 지금이 젊게 느껴진다. 미래는 오래 지속되기 때문이다.”"

<박원호 | 서울대 교수·정치학>

http://m.news.naver.com/read.nhn?mode=LSD&mid=sec&sid1=110&oid=032&aid=00027868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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