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08.18 14:34
우리나라에서 톰 클랜시는 완전히 잊힌 작가가 된 거 같습니다. 서점에 나와 있는 번역서가 단 한 권도 없어요.
이게 클랜시 소설의 수명과 관련된 것인지, 출판사를 잘못 만나서인지는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개인적인 경험을
말하라면, 전 잭 라이언 시리즈 중반에 벌써 질리긴 했습니다. 라이언이 대통령이 되고 미국을 제외한 전세계 모든
강대국이 세계대전을 일으키지 못해 안달하는 단계에선 "아무리 밀덕 판타지라도 이건 너무하잖아."란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래도 잭 라이언 시리즈의 첫 편인 [붉은 10월]은 제가 여러 가지 이유로 재미있게 읽은 소설이고 존 맥티어난이
감독한 영화도 좋아합니다. 아시다시피 전 잠수함 이야기에 애착이 있어요. 냉전시대 핵잠수함을 소재로 한 영화가
생각만큼 많지 않고요. 아마 실제 전투 장면을 넣기 힘들어서였겠지만요. [붉은 10월]은 여러 모로 그 갈증을 풀어준
작품입니다. 제가 이상으로 삼는 냉전 잠수함 영화의 7,80퍼센트까지는 커버했달까.
붉은 10월은 소련에서 만든 신형 잠수함 이름입니다. 캐터필러 장치로 무음추진이 가능한 이 잠수함을 끌고 마르코
라미우스와 몇몇 장교들이 미국으로 망명을 시도합니다. 당연히 소련과 미국 양쪽에서는 붉은 10월을 격침시키려
하는데, CIA의 정보분석가인 잭 라이언이 라미우스의 의도를 파악하고 사건 해결에 나섭니다.
정말 냉전시대의 마지막 숨을 들이마셨던 영화입니다. 소설은 84년에 나왔고 영화는 90년에 나왔으니 어쩔 수 없이
'고르바초프 이전'의 과거 이야기를 그린 영화가 됐죠. 90년만 해도 서방망명이란 게 낡아빠진 말이 되었으니까요.
그런데도 '옛 소련'을 대상으로 꿋꿋하게 전쟁을 하는 영화이니 좀 뻔뻔스럽습니다.
전 영화 속 마르코 라미우스를 좋아하지 않습니다. 일부는 숀 코너리의 캐스팅 때문이죠. 그는 존재감이 엄청난
배우지만 캐릭터의 깊은 고민을 보여주지는 못해요. 그냥 폼만 남은 존재인데(원래는 클라우스 마리아 브렌다워를
염두에 두었다고 합니다. 성사되었다면 훨씬 잘 했겠죠) 원작의 디테일을 지워버리니 그냥 잠수함 지휘만 잘 할뿐
아주 재수없는 사람이 되어버렸어요. 그리고 망명하고 싶으면 그냥 혼자 할 일이지 조국의 엔지니어들이 피땀흘려
만든 잠수함을 선물로 들고가는 건 또 뭐랍니까. 영화도 그게 신경이 쓰여서 뭐라고 변명을 붙이긴 하지만.
하지만 전 이 영화에서 알렉 볼드윈이 연기한 잭 라이언은 아주 좋아합니다. 다들 해리슨 포드의 라이언을
표준이라고 생각하는 모양인데, 포드의 라이언은 너무 나이가 많고 권위적이죠. [붉은 10월]의 라이언은 비행공포증과
멀미에 시달리면서도 사건 한가운데에 뛰어들어 폭력 대신 (아주 안 쓰는 건 아닙니다만) 논리로 사람들을 설득해
위기를 해결하는, 현장경험없는 책벌레예요. 이후 라이언 시리즈에서 이런 걸 조금 더 보고 싶었는데, 그는 금방
여기서 벗어나더군요. 하여간 전 잭 라이언하면 젊은 시절 알렉 볼드윈이 가장 먼저 떠오르고 이 캐릭터와 설정이
조금 더 활용되지 못한 게 많이 아쉽습니다.
핵잠수함과 관련된 모험담도 아주 잘 되어 있습니다. 물론 원작의 디테일을 살리는 건 불가능했죠. 관객들이 따라갈
수 있게 백전노장인 캐릭터들이 이상할 정도로 천진난만하게 구는 부분도 있고("어뢰를 향해 돌진하다니! 자살행위야!").
하지만 손에 땀을 쥐게 하는 잠수함들의 조용한 추적전은 멋지게 구현되어 있고 한 번도 일어난 적 없는 냉전시대
핵잠수함의 대결, 그 위에서 벌어지는 외교전의 묘사와 같은 것들은 이 소재에 관심이 있는 관객들을 만족시키고
남음이 있습니다. 조금 인위적이고 과장되어 있긴 하지만 그거야 어쩔 수 없죠.
특수효과는 지금 보면 많이 낡았습니다. 아직은 CG가 본격적으로 쓰이기 전에 만들어졌던 영화예요. 대부분 모션 컨트롤
카메라와 모형을 사용한 드라이 포 웻 기법으로 잠수함을 묘사하고 있는데, 이 자체는 별 문제가 없습니다. 광학합성으로
화면에 추가된 어뢰 같은 것들은 환한 빛을 내며 달려드는 게, 향수 돋으면서 은근히 예쁘고요. 하지만 잠수함 주변의
물결을 묘사하는 CG 묘사는 지금 보면 티가 팍 나요.
앞으로도 한 동안 제대로 된 냉전시대 잠수함 영화가 나올 가능성은 없으니 ([팬텀]은 여러 모로 실망스러운 영화였습니다)
[붉은 10월]은 한 동안 이 장르의 탑으로 남겠지요. [크림슨 타이드]를 더 높게 치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그 영화는 실내극에
더 가깝고 결말이 약하잖습니까. 물론 제 의견에 동의하지 않으시는 분들도 많겠지만.
(15/08/18)
★★★☆
기타등등
1. 러시아 관객들은 이 영화에서 소련인으로 나오는 배우들의 서툰 러시아말에 배꼽을 잡겠지요. 다행히도 이들은
[뉘른베르크 재판]식 화면 전환 이후 주로 영어를 합니다.
2. 지금 보면 재미있는 것. 초반에 살해당하는 붉은 10월의 정치장교 이름이 푸틴입니다.
감독: John McTiernan, 배우: Sean Connery, Alec Baldwin, Scott Glenn, Sam Neill, James Earl Jones, Joss Ackland, Richard Jordan, Peter Firth, Tim Curry, Courtney B. Vance, Stellan Skarsgård, Jeffrey Jones
IMDb http://www.imdb.com/title/tt0099810/
Naver http://movie.naver.com/movie/bi/mi/basic.nhn?code=105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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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ST도 좋아서 테마곡(영화 속에 나오는 군가 합창이었던 것 같은데)이 라디오에서 자주 나와 지금도 기억하고 있구요.
그리고 글 말미에 감독 이름을 조 단테로 적으셨네요. 기타등등 1번의 화면 전'한'은 화면 전'환'의 오타일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