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보 저자의 고민

2014.06.14 01:27

dmajor7 조회 수:3951

초보 저자지만 이런 저런 글을 쓸 기회가 생기면서 글쓰기에 대한 고민을 하게 됩니다.

'나에게 책이란' 이라는 주제의 기고 의뢰를 받아 생각나는대로 쓴 초고입니다.

 

운동신경 제로 꼬마에게 방구석에서 허풍선이 남작과 가르강튀아를 따라 대모험을 떠나게 해 주던 날개.

부잣집 도련님 친구의 천정까지 가득찬 멋진 서가 앞에서 리플리의 심정을 느끼게 하던 동경.

세로 글씨의 누렇게 바랜 책장을 넘기며 제갈량, 양산박 호걸들, 오다 노부나가, 사이또 도산을 만나러 가게 해 주던 타임머신.

멀리서 들리는 맹수의 포효에 몸을 떨며 비니키우스의 품속으로 파고드는 작은 새 같은 리기아를 보며 조숙하게 찾아온 사춘기.

나르치스와 골드문트 중에 나는 어느 쪽 인간일까 중2병스런 고민을 하게 하던 자아 찾기.

영어 시간에 교과서 밑에 숨겨놓고 탐독하다가 들켜 선생님에게 그걸로 머리를 얻어맞은 일본전후문학전집이라는 이름의 둔기(鈍器).

대학문에 들어선 후 접한 암호 같은 줄임말로 불리던 모피어스의 빨간 약들.

하지만 어느 이즘보다 먹고살이즘이 중하기에 억지로 머리에 쑤셔넣어야 하던 지식의 파편들.

밥벌이는 하면서도 변하는 세상의 파시스트적 가속도를 감히 따라잡아보려 번지르르한 실용적 지식만 찾아헤맨 어리석음의 증거들.

뒤늦게 아무 써먹을 데 없어도 가슴을 설레게 하던 옛기억을 떠올려 재회하는 고전이라는 이름의 첫사랑들.

하지만 속절 없이 ‘마녀사냥’, ‘썰전’ ‘왕좌의 게임’ 다시보기와 카톡방, 밴드, 페북에 넘쳐나는 석 줄짜리 언어들에 뒷전으로 밀리곤 하는 퇴기(退妓).

언제나 사랑했고,

언제나 쉽게 버렸던 친구.

 

보내기 전에 참고로 '판사유감' 담당 편집자에게 한번 보내어 읽어봐달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의 의견을 들은 후 다시 고쳐 쓴 최종본입니다.

 

“나에게 책이란?”, 첫사랑에 관한 질문만큼이나 나를 감상적이게 만드는 질문이다. 책은 나에게 그런 존재이기 때문이다. 책벌레 꼬마 시절 허풍선이 남작의 대모험을 읽으며 방구석에서 넓은 세상을 꿈꾸었다. 셋방살이 처지였어도 책만 있으면 무엇도 부럽지 않았다. 하지만, 하얀 피부의 부잣집 도련님인 친구 집에 놀러간 날, 천정까지 가득 찬 아름답고 멋진 서가 앞에서 비로소 남의 인생을 빼앗고 싶은 리플리의 심정을 처음 느꼈다. 영어 시간에 교과서 밑에 일본전후문학전집을 숨겨놓고 읽다가 들켜 선생님에게 그걸로 머리를 얻어맞던 고교생 시절에도 책은 감방에서 마당에 핀 꽃을 바라보는 작은 창문이었다. 대학 시절, 책은 매트릭스에서 네오가 선택한 빨간 약이었다. 진짜 현실 세계의 맨얼굴을 대면하는 고통을 선사했다. 이제 나이 먹고 밥벌이는 하면서도 뭐가 그리 불안한지 자꾸 실용적인 지식과 정보가 담긴 책에 먼저 손길이 간다. 뒤늦게 고전이라는 이름의 첫사랑을 재회하고 옛사랑을 떠올려 보지만, 그녀는 속절없이 ‘마녀사냥’, ‘썰전’ ‘왕좌의 게임’ 다시보기와 카톡방, 밴드, 페북에 넘쳐나는 석 줄짜리 언어들에 뒷전으로 밀리곤 하는 슬픈 존재다. 나에게 책이란 그런 존재다. 언제나 사랑했고, 언제나 쉽게 버렸던 친구.

 

차이가 느껴지시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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