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여행 이런저런 단상들

2010.11.10 11:38

Thule 조회 수:2348

 

1. 

 제가 갔을 즈음 일본도 뭔 국제회의를 열고 있었습니다. 뉴스에 패널들이 나와 회담에 대한 몇 가지 포인트를 진단하더군요.

 중국, 러시아에 연일 까이느라 좀 우울해보이는 일본이라는 인상이었습니다.  

 한국의 G20 얘기는 뉴스 한 꼭지도 안 나오더군요.  

 "한국이 G20을 맞아 국가적 차원에서 국민들 '매너'교육을 대대적으로 벌이고 있다"는 기사를 일본신문에서 한 번 발견했네요.  ;;;;

 

  

 2. 

 영화 프로그램들을 취급하는 진보초의 헌책 가게를 처음으로 가보았습니다.  

 일본의 영화 프로그램북은 그 공들인 표지며, 영화 스틸컷이며 자료며, 인터뷰며...  정말 한 권의 책이더군요. 

 깨끗한 상태로 비닐 포장되어 있는 프로그램들이 년도별, 작품별로 일별되어 있는데, 장관이었습니다.

 한 권에 우리 돈으로 만 오천원 꼴인데, 좋아하는 영화를 발견하면 아까운 생각이 안듭니다.  거기다 히치콕 영화제 프로그램들을 100엔 특가로 구하는 행운을.    

 

 '여행자'를 상영하고 있던 진보초 이와나미 홀에서도, 예전에 개봉했던 영화의 프로그램을 싼 값에 팔더군요. 

 

 

3.

 하네다 신공항은 아주 편리했습니다. 에도 시대를 테마로 삼았다는 공항의 몰은 외국인보다는 자국인 취향에 맞춘 인상이라 가격이나 분위기에서 뭔가 위화감이 느껴졌지만, 전반적인 수속 절차나 중심부로의 이동 절차 등이 대폭 간소화되어 이전보다 피로감이 훨씬 덜 했습니다.  이제 과연 누가 나리타로 갈까 싶더군요. 인천과의 경쟁은 아직 잘 모르겠습니다. 면세점은 여전히 인천 쪽이 확실히 우월할 것 같던데..  

 

 

4.

 호텔 빌라 폰테누의 아침 시스템이 바뀐 것 같더군요. 아시는 분들은 아시겠지만, 빌라 폰테누의 단점 중 하나가, 매일 똑같은, 지나치게 간소한 아침식사였죠.  

 다른 지점도 그런 지 모르겠지만, 제가 간 지점은 샌드위치 도시락 셋트로 아침식사 메뉴가 바뀌었더군요.

 샌드위치 종류는 매일 같았고, 함께 먹는 에그 스크램블이나 고기, 샐러드 종류가 매일 조금씩 달라졌습니다.  

물론 저는 도시락을 카운터에서 받아 예전처럼 로비에서 먹었지만, 방으로 배달해주기도 하더군요.  그럴 경우 쥬스나 커피까지 배달해주는지는 모르겠지만.

 저는 아침식사에는 큰 집착이 없는 편이라, 이전이나 바뀐 메뉴나 뭐 다 그냥저냥 무난하게 받아먹었지만, 이전의 그 요상한 스프;;가 없어진 것만으로도 개선되었다는 인상을 받았습니다. 약간은 어색한 '로비 아침식사'의 진풍경도 사라져서 호텔이 훨씬 더 차분해진 인상이고요.  빌라 폰테누 특유의 합리성, 경제성이 발휘된 변화랄까요. 점점 이 호텔 체인의 '인간냄새 제거' 프로젝트가 완성형 단계에 이르는 것 같습니다.  언젠가 이 호텔은 사람 한 명 없이 오로지 기계화와 자동화로 호텔 운영이 이루어지는, 완전한 싸이보그 호텔이 될 것 같다, 라고 처음 이 호텔을 이용했을 때부터 생각했는데,  뭔가 정나미떨어지는 면도 없지 않지만, 그런 이유로 전 이 호텔이 묘하게 편해요.

 

 

5.

 제가 일본 갈 때마다, 꼭 들르는 진보초의 재즈 바가 하나 있습니다.  밤에 가본 적은 없고, 낮에 까페를 겸할 때만 가본 곳입니다.

 재즈 매니아인 노부부가 하는 곳인데, 아주 작고 밝고 모던한 바입니다. 양복입은 직장인들이 점심시간에 아무 말없이 바에 앉아서 재즈 들으며 쉬다 가는 곳이기도 하고,

 주인장과 이런저런 재즈 얘기를 나누는 그런 바인 것 같아요.  저는 바가 아닌 테이블에 앉아 주로 모르츠 맥주 한 병 마시며 지친 다리도 쉬고 수확물도 구경하고, 또 주인장과 손님들도 훔쳐보며 한 두 세 곡 듣다 나오는데요. 그러고 있다보면, 잡지나 책 편집자로 보이는 양반들이 종종 옆에 보입니다. 교정쇄를 잔뜩 들고 재즈 드럼비트에 신들린 듯이 펜을 놀리는 그들을 보고 있자면, 관광객인 내가 좀 미안해지는, 그들만의 아지트를 침범한 것 같은 그런 기분이 들어요.

 이번에 밤에 한 번 그 재즈바를 지나친 적이 있었는데, 낮과는 분위기가 사뭇 다르더군요.  주인장 얼굴도 한층 밝아보이고, 손님들도 많이 떠들고 있고, 멋스런 여성들도 한 두명 보이고,  음악은 더 큰 소리로 새어나오고...  관광객인 제가 섣불리 들어가기 망설여지는 아우라가 있더군요.    다음에 또, 라고 혼자 인사하고 발길을 돌렸습니다.

 

 

6.

 신주쿠의 기노쿠니야에 갔다가 그 옆 도큐핸즈를 삼십 분 정도 구경했습니다.

 도큐핸즈에 가면 살 게 그렇게 많다는데, 저는 고작 고른 게 제 이름 석 자 중 하나를 찍을 수 있는 작은 도장과 금색 인주였습니다.  

 귀여운 도시락 셋트를 조카 선물로 사갈까 하다가, 이번 일본 여행은 지인이나 가족 아무도 모르게 온 거라는 걸 상기하고 도로 내려놓았습니다.

 이 많은 필요와 편리 중에 왜 난 이렇게 사고싶은 것, 필요한 게 없을까 조금 우울하더군요.  인테리어, 주방, DIY, 장난감, 취미, 사무용품, 시즌 상품, 그 어떤 섹션에서도 갈 곳 잃은 양처럼 멍하니 배회만 하다가 나왔습니다. 백화점과 달리 도큐핸즈에서는 묘한 죄책감마저 들더군요. 난 정말 '인간적 생활'이라는 것과는 담쌓은 인간인건가... 예전에 유럽 여행 중에  이케아에 갔을 때도 비슷한 감정을 느꼈었죠.  이런저런 생활용품들을 고르는 가족들, 연인들이 왠지 모르게 부러워서, 샤워 커튼을 괜히 골라보는 시늉을 했던 기억이 나는군요.  

 

 

7.

 돌아오니, 역시 집이 좋습니다.  허나, 조만간 또  여행가고 싶군요.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공지 제 트위터 부계입니다. [3] DJUNA 2023.04.01 32389
공지 [공지] 게시판 관리 원칙. 엔시블 2019.12.31 51431
공지 [공지] 게시판 규칙, FAQ, 기타등등 DJUNA 2013.01.31 361763
114676 이런게 자기검열인가요? '굿바이 삼성' 강연이 갑자기 취소됐다네요 아나똘리 2010.11.10 1498
114675 동성애와 종교글의 차이는... [15] 늦달 2010.11.10 2400
114674 밥 벌어먹기 쉽.. 구나... [26] 01410 2010.11.10 6527
114673 태어나 dvdrip 처음 해보네요. [8] 무비스타 2010.11.10 2213
114672 나이를 먹는 다는 것... (가벼운 이야기에요, 듀게가 무거워져서) [12] 늦달 2010.11.10 2861
114671 [듀나in] 왜 입술에서 피가 나면 잘 안 멈출까요. 왜 입술은 이렇게 약한가요 [6] clutter 2010.11.10 5290
114670 하드디스크 교환 후기, 묻지마 교환에서 살짝 달라진 느낌? [1] chobo 2010.11.10 1978
114669 이마무라 쇼헤이 감독의 복수는 나의것 보신 분 계신가요? [6] chato 2010.11.10 2088
» 일본 여행 이런저런 단상들 [11] Thule 2010.11.10 2348
114667 명랑성性생활백서 2탄도. [6] kkokkam 2010.11.10 3177
114666 극중 결혼식 [3] 가끔영화 2010.11.10 1676
114665 치유되었다는 느낌 [1] gatsby 2010.11.10 1444
114664 고대 교수 자살 사건의 이면에 이런 내용이 있었군요. [5] 푸른새벽 2010.11.10 4798
114663 듀나를 비롯한 작가분들은요 [6] Kaffe 2010.11.10 2282
114662 문근영 매리 [6] ewf 2010.11.10 3270
114661 종교, 문화, 동성애, 천안함, 4대강., G20...등등...잡소리들.. [8] SykesWylde 2010.11.10 1754
114660 킨들 3 관련 질문 세 가지. [3] 케이 2010.11.10 2184
114659 아내님이 변했어요! [25] 남자간호사 2010.11.10 4527
114658 [점심먹고 바낭] "너구리" 는 어떤 이미지? [17] bap 2010.11.10 4350
114657 소 표정 읽기 [3] 가끔영화 2010.11.10 2076
XE Log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