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19년작이고 런닝타임은 1시간 50분. 스포일러는 없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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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으로 알기 쉬운 포스터네요. 장르만 빼고.)



 - 때는 19세기 말. 섬이라고 말하기도 민망한 바다 위 초미니 섬에 등대가 하나 있어요. 여기에 윌렘 데포와 로버트 패틴슨이 몇 주간 머물며 등대를 관리하게 됩니다. 바깥으로부터 완전히 고립된 좁아터진, 게다가 구질구질 구리구리하기 그지 없는 공간에 서로 모르는 사이인 아저씨 둘이 뚝 떨어져 있는 것만해도 난감한데 고참인 윌렘 데포의 성질머리가 참 더러워요. 부글부글 끓는 걸 참으며 폭발 직전의 상태로 근근히 버티는 우리 패틴슨씨. 일도 힘들고 상사도 더럽지만 그 늙은이가 근무 수칙을 어기고 지 맘대로 등대 불빛 관리를 독점하는 게 또 서럽고 짜증이 납니다.

 그런데 그렇게 버티고 참고 개고생을 하는 와중에 은근슬쩍 이 섬엔 이상한 것들이 보이고 이상한 일들이 생기기 시작하고. 또 어느 날 몰래 훔쳐 본 불빛 지키는 윌렘 데포의 모습도 뭐라 말로 형용할 수 없이 괴상합니다. 도대체 이게 다 뭔 일이래... 라는 생각 조차 길게 하지 못할만큼 빡세고 서러운 근무를 계속하는 패틴슨씨. 점점 상황은 폭발 직전으로 흘러가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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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작부터 끝까지 아웅대는 두 남자.)



 - 일단 영화를 재생하자마자 당황하게 만드는 점 하나. 이거 흑백 영화입니다. 뭐 거기까진 그렇다 쳐요. 근데 화면비가 1.19:1이에요. 잠깐잠깐 섞여들어가는 게 아니라 그냥 시작해서 끝날 때까지 이 비율을 유지합니다. 선을 넘고 있죠. ㅋㅋㅋ 

 이걸로 끝이 아니에요. 그냥 흑백으로만 찍은 게 아니라 영화의 미장센, 화면 질감, 장면 연출에 사운드 녹음까지 영화의 거의 모든 요소들을 20세기 초의 영화들 스타일대로. 심지어 퀄리티(...)까지 흉내를 냅니다. 예를 들어 많이 어두운 곳에서 찍은 장면들은 정말 빛이 딱 비추는 곳을 제외하곤 그냥 검은색 얼룩들이구요. 뭐가 잘 안 보여요 정말로. 배우들 연기하는 목소리도 옛날 영화들의 살짝 멀리서 들리는 느낌? 뭐 그런 느낌을 살리고 있구요. 당연히 그 시절 장비로 찍은 영화는 아닐 테니 의도적으로 그렇게 처리를 한 거죠. 


 뭐 얼마 전에 나온 데이빗 핀처의 '맹크'도 헐리웃 고전 영화 스타일을 재현하는 식으로 만들어진 영화이긴 했습니다만. 그 영화는 그래도 헐리웃 스튜디오 전성기 시절 영화들 스타일이었잖아요. 대체로 '고전미'가 느껴지는 우아한 느낌이었죠. 이 영화는 그보다 훨씬 전의 영화들을 흉내냅니다. 그래도 뭐 결국 21세기의 실력자 감독이 만든 영화라서 한계(?)는 있습니다만. 그래도 꽤 훌륭하게 투박한 구식 느낌을 살려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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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역사 개론서에 실린 옛날 영화 스틸샷이라고 해도 속을 법한 느낌)



 - 그 와중에 진짜 걸작은 윌렘 데포입니다. 거의 이 영화를 위해 태어난 사람처럼 보일 지경이에요. 칙칙하고 더러울 옛날 육체 노동자 스타일링에다가 입을 헤~ 벌리면서 과장된 표정 한 번 지어주면 그냥 그 시절 영화 그 자체. 물론 연기도 잘 하지만 그냥 생김새에서 끝났습니다. (쿨럭;) 근래 이 양반 나온 영화들 중에서 이 정도로 압도적인 존재감을 뽐낸 작품이 없었던 것 같아요. 로버트 패틴슨도 참 성실하게 괜찮은 연기 보여주는데요, 네. 다시 말하지만 그냥 이건 경쟁이 안 됩니다. 이 영화에서 윌렘 데포는 그냥 이 영화 그 자체에요. ㅋㅋㅋㅋ 윌렘 데포 팬이시라면 이 영화는 꼭 보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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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55년에 태어나 이 영화에 출연하기 위해 60여년을 살아오신 분.)



 - 그런데 그래서 영화는 뭔 내용이냐... 하면요.

 이 감독의 전작이 그 '더 위치'입니다. 안야 테일러 조이가 나오는 마녀사냥극이죠. 그 영화도 비주얼이 참 좋고 음습한 분위기도 좋은 호러였습니다만, 그래도 그쪽은 꽤 알아 먹기 쉬운, 친절한 이야기였거든요. 결말에 대해선 논쟁의 여지가 있겠지만 암튼 따라가기 어려운 이야긴 아니었죠. 근데 이 영화는 굉장히 모호합니다. 시작하고 40분동안은 꼭 좁은 공간에 갇혀서 미쳐가는 두 남자의 이야기를 다루는 심리 스릴러 같은 느낌인데, 그때쯤에 갑자기 초현실적인 요소가 튀어나오구요. 아 뭐 괴물 나오는 이야긴가? 싶었는데 다시 또 한참을 두 남자 이야기로 흘러가고. 그러면서 두 남자 모두 좀 정상이 아니라는 느낌을 팍팍 심어줘서 이후로 벌어지는 사건들을 다 관객들이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하게 만들어요.


 특히 클라이막스가 그렇습니다. 이건 너무나도 노골적으로 '이거 다 꿈 환상 그리고 착각임!'이라는 떡밥을 들이대는데 그렇다면 도대체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환상이고 꿈이고 착각인지를 알 수가 없어서 당황스럽죠. 또 이 때쯤부턴 '그게 뭔진 모르겠지만 이건 상징인 듯!?' 싶은 장면들, 소재들이 줄줄이 이어져서 제 머릿속은 혼돈의 도가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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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좌우 대칭! 센터 수직!!)



 - 근데 뭐. 항상 이야기하듯이 전 그런 상징이나 비유 같은 거 분석은 별로 취미도 없고 할 능력도 없구요.

 제가 얘기할 수 있는 거라면 그저 이 영화의 그런 모호하고 혼란스런 분위기가 상당히 매력적이라는 겁니다. 앞서 언급했던 그 '옛날 영화 스타일' 에다가 화면비의 특징을 살리기 위해 집요하게 반복되는 좌우 대칭 구도, 정중앙에 세워지는 수직적 이미지. 배우들이 (특히 윌렘 데포가) 읊어대는 고풍스런 대사들. 그리고 (역시 화면비 덕에) 어두컴컴해지면 확장되고 밝아지면 갑갑하도록 좁아지는 화면 속 세상. 강렬하기 짝이 없어서 흑백인데도 가끔은 눈이 아프단 착각이 드는 빛과 그림자의 대조들. 뭐 그냥 보고 있노라면 무슨 최면이라도 걸리는 듯한 기분이에요. 당신은 곧 깊은 잠에  칙칙하고 갑갑하며 불쾌하게 매혹적입니다. 옛날 옛적 무슨 신화에서 대략 빌려온 듯한 느낌의 결말 장면도 그 쌩뚱맞음에도 불구하고 근사한 느낌이었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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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꾸 윌렘 데포 칭찬만 했는데 패틴슨도 분명히 잘 했습니다. 좋은 배우가 이미 되었군요.)



 - 제가 능력이 안 되어서 더 길게는 할 말이 없네요.

 당연히 취향을 격렬하게 탈 수밖에 없는 아트하우스 호러 무비입니다. 보면서 내내 '도대체 감독은 이걸로 제작비는 어떻게 회수하려고 한 거임?'이라는 생각을 하게 될 정도로 돈 벌 생각을 포기하고 본인 맘대로 막 만든 영화구요. 그게 취향에 맞으면 저처럼 즐겁게 보는 거고, 아니면 마는 거고. 모 아니면 도라는 느낌이었네요.

 저는 원래 이런 식의 형식 실험 같은 거 좋아하고, 또 뭔 소린지 모르겠어도 비주얼 근사하고 독특하면 일단 다 좋게 보는 성격이라 아주 만족스럽게 봤습니다만.

 막 스릴 넘치는 뭔가가 계속 벌어지거나 무서워서 얼굴을 가리게 되는 그런 이야기는 절대 아니라는 거.

 그리고 이렇게 호평하고 있는 저도 새벽녘에 불 끄고 보니 한 번은 졸았다는 거. ㅋㅋㅋ 말씀드리면서 마무리합니다.



 + 며칠 뒤에 넷플릭스에서 내려갑니다. 보실 분들은 빨리 보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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