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07.29 23:45
이상하게도 마블 영화는 정이 안갑니다. 그래서 여성영화의 결을 띈다 해도 그게 크게 정이 가거나 마음이 움직이지 않네요. 어쩌면 서사 속에서 히어로다움을 추구하는 그 모습이 단독자로서의 또 다른 남성주의의 결을 강하게 띄고 있어서 그런 건 아닐까 혼자 추정해봅니다만, 잘 모르겠어요. 쿨시크 유머 가이의 그 마블 기조 전체를 싫어하는 탓일지도요.
재미있게 보고 싶었지만, 별로 재미는 없었습니다. 일단 영화 전체가 <캡틴 아메리카: 윈터 솔져>의 재탕 느낌이 너무 강합니다. 도로에서의 추격전 이후 새로운 원군을 얻어 하늘 위에 숨겨진 기지를 침공해 추락시킨다는 이야기 자체가 아예 윈터 솔져의 그것입니다. 악당인 태스크마스터가 주인공의 과거의 인연과 속죄 대상인 것도 비슷하죠. 이 부분에서는 본 시리즈의 느낌이 너무 강하게 나는데 사실 속죄 드라마가 그렇게 진하게 진행되지도 않아서 큰 감흥은 없습니다. 종으로의 액션과 횡으로의 액션을 다 수행하려는 목적에서 도로 추격전이나 레드룸에서의 활공 액션을 넣어놨지만 오히려 이 영화의 컨셉이 흐릿하기 때문에 일단 액션 영화라면 다 할법한 장면들을 끼워넣은 인상이 강합니다. 톰 크루즈가 미션 임파서블을 찍을 때 맨날 이렇게 하잖아요. 주인공의 스턴트와 눈요깃거리 제공이 최우선인 엔터테인먼트 영화니까. 마블 내 수많은 히어로들과 차별점을 가져야 하는 블랙 위도우라면 조금 더 구분되는 액션을 할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큽니다. 태스크마스터가 타인의 액션을 똑같이 흉내내는 부분이 블랙위도우에게 드라마적으로 갈등을 줬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도 드는데, 소잃고 외양간 고치기니 뭐...
이 영화의 여성주의적인 측면도 좀 갸우뚱한 부분은 있습니다. 그러니까 레드룸의 지배자인 드레이코프는 일종의 남성주의적 독재자이자 가부장제의 권위자를 상징한다는 걸 알겠습니다. 그러나 이야기가 너무 상징적으로 흘러간단 생각을 안할 수가 없네요. 힘이 세고 여자를 괴롭히는 나이든 남자를 쓰러트리는 구도 자체가 너무 명료해서 오히려 추상적이라는 느낌이 듭니다. 사실 이 영화를 채우고 있는 건 레드룸의 지배자인 드레이코프와 나타샤의 관계라기보다는, 잃어버린 나타샤의 가족과 그 자신의 과거에 대한 속죄가 더 중요하게 다뤄집니다. 물론 상업영화니까 이 정도만 해도 충분할지도 모르죠. 하지만 장면 장면은 정치적 구호를 담고 있는데 그게 정치적 드라마로서 서사를 담고 있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이런 고민은 <캡틴 마블>을 봤을 때도 동일하게 했던 것이구요.
남성 제국의 몰락과 여성의 해방이라는 장면은 도식적으로는 메시지를 전달하지만 그게 이 영화 전체의 서사에서 어떤 감정적인 카타르시스로 이어지진 않았습니다. 여성은 이렇게 자유를 박탈당한다는, 그 어떤 위기감이나 긴장감이 없었던 것 같아요. 아마 그것은 이 영화의 주인공인 나타샤나 엘리나가 금새 각성을 하고 관찰자이자 일종의 고발자로서 사건을 해결하는 입장이라 그랬던 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이 때 가장 중요한 인물이 아마 태스크마스터일텐데 가장 큰 피해자로서의 고통이나 억압을 캐릭터로서 효과적으로 전달했는지도 잘 모르겠습니다. 여성억압의 고통이 생략된 채 구원자의 멋만이 더 중요하게 빛나서 제가 좀 거부감을 느꼈던 것 같기도 하구요.
또 하나 이상한 부분이라면 영화 전체가 결국 가족주의로 함몰된다는 점입니다. 나타샤는 가짜가족에게 버림받고 지금의 신세가 되었죠. 그렇다면 이 영화가 나아갈 길은 "진짜 가족" 찾기인가, 그런 고민을 하게 되더군요. 가부장제 자체가 어떻게 보면 가족이라는 시스템에서 생기는 문제이고 그것으로부터 여성이 개인의 독립을 도모할 수 밖에 없는 구조적인 문제가 있습니다. 그러나 <블랙 위도우>는 잃어버린 가족을 되찾아준뒤, 나쁜 가족과 나쁜 아버지를 혼내주면서 끝납니다. 특히나 이 과정에서 무책임했던 멜리나와 알렉세이를 흐리멍텅하게 용서합니다. 그들은 가장 적극적인 배신자이고 어린 여자를 나쁜 가족에 팔아넘긴 일원들이 아니었던가요. 이 부분에서 영화는 이상하게 과감해지질 못합니다. 그리고 더 황당한 건? 나쁜 남자의 가부장제를 물리친 다음에 좋은 남자들의 가족인 어벤져스로 나타샤가 귀환한다는 거죠. 여성 개인의 독립과 연대는 가족 혹은 (좋은) 남성적 가족으로 흡수된다는 결론이 되어버립니다. 물론 어벤져스 이 전의 이야기이니 어쩔 수 없는 시간적 구조가 있긴 하지만, 그래도 이상했어요.
여러모로 마음에 들지 않았던 영화입니다. 강하고 센 여자, 남자를 고발하는 여자, 남자들 두들겨패는 여자들이 나온다고 과연 그게 다 정치적 메시지로 전달이 되는지 혹은 정치적 소재가 경제적 착취를 당하는 건 아닌지 그런 고민이 들었습니다. 상업영화에 너무 큰 기대를 하는 건 아닌가 싶기도 하지만, <블랙 위도우>가 일종의 교본으로 삼았던 <한나>조차도 훨씬 더 근사하고 매력적인 여자 스파이 영화를 그리지 않았나요. 이 영화에서 좋았던 건 인물 자체가 영화적인 플로렌스 퓨밖에는 없었던 것 같습니다. 배우의 아우라가 너무 강해서 영화 안에서 더 튀어보이기까지 할 정도였으니까요. 전 아직도 그의 데뷔작을 한국 극장에서 봤던 몇안되는 관객이었던 걸 자랑스레 생각하고 있습니다....
@ 원더우먼은 참 좋았는데... 별 수 없이 비교를 하게 되더라구요
2021.07.30 00:07
2021.07.30 21:46
별로 뭐가 없었네요...
2021.07.30 08:54
[블랙 위도우]를 비여성이 평가한다는건, [블랙 팬서]를 비흑인이 이렇다 저렇다 하는 것만큼이나 어려운 일이지 않나 싶습니다. 저 지인 중엔 [벌새]를 가혹하게 평가하는 지인이 있는데, 들을 때마다 갸우뚱합니다. 주변 당사자(?) 분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평가가 꽤 좋고, 멜리나 보스토코프 팬층이 상당해서 의외였습니다. 남성 악당이 강해지거나 지지부진한 백 스토리가 있기 이전에, 사망조차 의미 있지 않게 다뤄지는걸 선호했습니다. 마블 영화 중 절반 이상은 자기들이 만든 문제를 수습하는 내용인데, ( 그들이 누구를 구하길 하는가? 라는 질문이 몇 번 있었습니다 ) 이 영화에서는 구하는 주체가 또렷했고, 누구와 이기느냐 지느냐보단 연대에 훨씬 많은 관심을 두더군요. 자매애나... 어머니를 포섭해서 문제를 해결하게 되는 딸들.
개인적으로는 플롯의 재사용, 가족주의의 개입(그런데 미국영화들의 특징이 아닌가 싶습니다. DC도 악명높은 몇몇 밈을 가지고 있을 정도지 않습니까.)은 동의하지만 약한 악당이라는 단점, 착취당하는 사상은 공감하기 어렵네요. 최근에 [아이언맨 2]를 보는데 이런 장면이 있었나 싶을 정도로 마블이 성장하긴 했더라구요. 꼭 그래야할 필요는 없지만 같은 무대에 다른 배우들로 비슷한 작품을 안 찍어야할 이유도 없는 것 같습니다. 그보다 더 해낼 수 있다면 좋겠지만.
2021.07.30 21:48
그 부분은 저도 좀 날림으로 쓴 거라서 다시 써야할 필요를 느끼네요. <블랙 팬서>도 과격과 급진을 혼용해서 쓰며 억압된 피해자들의 쿠데타를 너무 쉽게 악으로 표현한 것은 아닌지 하는 감상들은 있었습니다. 아무튼 다시 자세하게 써봐야겠습니다.
기존 나타샤에겐 PTSD수준은 아니지만 뭔가 애들이세뇌-학대당해가며 요원이 되었단 설정의 딥다크한 맛이 캐릭터에게 있었는데, 이번 영화덕분에 그게 희석이 되었죠.
그 희석이 좋을지 나쁠지는 별개의 문제겠지만요. 전 물론 후자입니다(참고로 박훈정의 마녀를 좋아합니다).
아..그리고 페미니즘은...이거 가지고 투덜거리는 남자가 많진 않은거보니 메시지적으론 그닥인가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