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09.12 10:46
많은 분들이 이미 <모가디슈>의 장점과 높은 완성도를 이야기하셨고 저 역시도 그런 평들에 공감합니다. 그래서 저는 조금 다른 이야기를 해볼까 합니다. 그것은 <모가디슈>를 비롯해 몇몇 영화에서 보이는 공포의 외주화입니다. <랑종>이나 <다만 악에서 구하소서>같은 작품들을 보면서도 조금 움찔한 부분들이 있었거든요. 이 영화들은 사건이 일어나는 공간적 배경으로 특정한 공포를 자아내고 있기 때문입니다.
<모가디슈>는 소말리아 모가디슈에서 벌어지는 쿠데타와 민간인 약탈을 소재로 그리고 있습니다. 저는 이 영화가 큰 과장은 하지 않았을거라 생각합니다. 혼란 속에서 사람들은 굉장히 난폭해지고 흥분상태가 되니까요. 저 역시도 다수의 군중이 걷잡을 수 없이 과격해지는 걸 본 적이 있습니다. 직접 눈 앞에서 본 광경은, 어마어마한 에너지를 저 개인이 말릴 수가 없겠다는 그런 공포심을 안겨줬습니다. 총이 쥐어지고, 사악한 위정자를 몰아내고, 모든 치안이 마비되었는데 자기 편 아닌 사람들이 자신을 두려워한다면 아마 쿠데타 세력은 자신들의 세력에 충분히 도취되었을 수 있습니다. 그걸 현장에서 본 사람들은 정말 무서웠겠죠.
그럼에도 <모가디슈>에서는 이런 묘사가 과연 필요했던 것인지 묻게 되는 장면들이 있었습니다. 예를 들어 안전한 곳으로 피신하려는 림용수 대사 일행이 총을 들고 있는 소년병들을 마주쳤던 장면입니다. 그 소년병들은 너무나 어려보이지만 그들은 총을 가지고 림용수 일행을 위협하며 히죽거립니다. 아이들의 천진난만함이 언제든지 발사될 수 있는 총기와 대비되면서 대단히 위험하고 무언가가 완전히 무너진 사회상태를 실감하게 합니다. 이 장면을 통해 모가디슈라는 공간은 지옥으로서 더 강한 설득력을 갖게 됩니다. 당시의 모가디슈는 그 누구도 믿을 수 없고 생존을 보장할 수 없는 아수라장으로서의 의미를 완성하게 됩니다.
여기서 갖는 이 공포심이 과연 모가디슈라는 외부의 공간과 당시의 시간, 그리고 소말리아라는 한 국가에 대한 편견과 분리될 수 있는지 좀 걱정이 되더군요. 아프리카 대륙의 국가를 두고 우리는 서구적 편견에서 자유롭지 못한 게 사실이니까요. 류승완은 <모가디슈>의 몇몇 장면을 통해 소말리아인들은 "악마적"으로 그렸습니다. 어떤 상황에서 사람들은 충분히 "악마적"으로 돌변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게까지 자신의 힘에 도취되고 그 폭력은 마치 정치적 유혈사태를 초월한 비정치적인 것으로까지 묘사할 필요가 있었는지는 조금 의문입니다. 그 소년병들은 딱히 정치적인 사람들이 아니니까요. 그들의 등장과 그 힘의 과시는 분명히 류승완 감독의 신중한 선택일 것입니다. 그런 일이 없었을 거라고 말하는 게 아니라, 그 장면을 굳이 세세하게 묘사해서 지옥도의 인상을 심어놓는 것이 필수적이었는지 묻게 됩니다. 그 장면에서 아동들을 성년으로 바꿔놓으면 어떤 효과는 완전히 사라져버립니다.
폭력은 늘 야만과 직결됩니다. 그리고 야만은 "미개함"이라는 제국주의적인 단어와 맞물리며 계급적인 경멸을 투사합니다. 이 때 한국인으로서 우리는 "흑인", "아프리카", "개발도상국", "세계 경제 몇위 국가"등의 일차적인 스캐닝을 벗어날 수 있을지 잘 모르겠습니다. 그건 아무리 의식한다해도 뿌리깊이 남아있는 편견이거든요. (샘 오취리가 한창 인기를 끌 때, 해피투게더에서 가나도 라면이 있냐는 유재석의 말에 울컥해서 반응했던 게 생각납니다) <모가디슈>를 보고 나서 기억에 남는 소말리아인들의 얼굴은 어떤 것일까요. 그들은 희번덕거리는 눈으로 노려보거나 잔인하게 미소를 짓거나 인정사정없이 찡그러트린 얼굴들만 보여줍니다. 이 영화를 보면서 우리는 한신성과 강대진에 이입하느라, 림용수와 태준기와 가까워지려 애쓰다가 소말리아인들의 다른 표정은 전혀 얻어내지 못합니다. 그건 그냥 남과 북 한국인들을 위협하는 완전한 외부세계이고 닫혀진 세계입니다.
영화 초반 남한 대사관들을 공격한 소말리아 청년이 나오죠. 하지만 그는 그 강도질로 획득한 결과물을 자기 가족과 다른 사람들에게 나눠줍니다. 그리고 그의 그런 행동은 순수한 약탈이 아니라 북쪽 대사관으로부터 사주를 받았다는 것이 나옵니다. 이런 것이 바로 '인간적'인 묘사겠지요. 누군가에게 꼭 공감을 하거나 동조할 필요는 없지만 어떤 인간들의 집단적인 폭력조차도 그 이면에는 자신들만의 유대나 자신들만의 사회적인 무언가가 있을 것입니다. 소말리아 정부군과 반군들에게도 그런 게 있지 않았을까, 혹은 그런 것들을 포함해도 한국인 입장에서의 공포는 희석될 수 없을만큼 압도적이지 않았을까, 그런 생각을 합니다. 저 혼자만의 소잃고 외양간 고치기이지만 이탈리아 대사관으로 탈출할 때 소말리아 무슬림들이 모두 무기를 내려놓고 기도를 하는 장면에서, 이들의 종교적 의식과 엄수를 이들만의 문명과 질서로 보기 위해 그 순간 이들의 엄숙한 얼굴을 더 가까이에서 오래 들여다봤으면 어떘을지 하는 생각도 드는군요.
번호 | 제목 | 글쓴이 | 날짜 | 조회 수 |
---|---|---|---|---|
공지 | 제 트위터 부계입니다. [3] | DJUNA | 2023.04.01 | 34000 |
공지 | [공지] 게시판 관리 원칙. | 엔시블 | 2019.12.31 | 53286 |
공지 | [공지] 게시판 규칙, FAQ, 기타등등 | DJUNA | 2013.01.31 | 363685 |
117372 | 오징어 게임, 후기 말고 트리비아 (일부 스포는 표시했음) [7] | tom_of | 2021.10.08 | 607 |
117371 | [회사완전바낭] 공상력의 결과 [5] | 가라 | 2021.10.08 | 590 |
117370 | 내각제 망령 [10] | 사팍 | 2021.10.08 | 497 |
117369 | [핵뻘글] 올레티비에 vod 영화가 뭐 있나 찾아보기 귀찮아서 그만... [4] | 로이배티 | 2021.10.08 | 441 |
117368 | 10억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2] | 사팍 | 2021.10.08 | 665 |
117367 | 오징어 게임 전문가 평론들 (스포없음) [10] | 양자고양이 | 2021.10.08 | 1175 |
117366 | 졸업 (1967) | catgotmy | 2021.10.08 | 279 |
117365 | 아무말 대잔치 [10] | thoma | 2021.10.08 | 576 |
117364 | [월간안철수] 국민의당 대선기획단 출범 소식 [2] | 가라 | 2021.10.08 | 495 |
117363 | 위근우의 몽니 [39] | 사팍 | 2021.10.08 | 1277 |
117362 | 축구 바낭 | daviddain | 2021.10.07 | 252 |
117361 | 상영 중도 퇴장 [8] | 예상수 | 2021.10.07 | 863 |
117360 | 변희수 하사 전역 취소 판결이 내려졌군요. [13] | 적당히살자 | 2021.10.07 | 799 |
117359 | 평론가란 무엇일까? [15] | 사팍 | 2021.10.07 | 819 |
117358 | 바다가 들린다 (사투리 더빙 ver.) [3] | skelington | 2021.10.07 | 1348 |
117357 | 넷플릭스 시상식 누가 런칭 좀 했으면 / 극장 아닌 스트리밍의 시대 [9] | tom_of | 2021.10.07 | 669 |
117356 | 이런저런 일상잡담 [1] | 메피스토 | 2021.10.06 | 353 |
117355 | 오징어게임을 둘러싼 논쟁들 [55] | Sonny | 2021.10.06 | 1994 |
117354 | [넷플릭스바낭] 여러가지 의미로 황혼의 웨스턴, '렛 힘 고'를 봤네요 [18] | 로이배티 | 2021.10.06 | 760 |
117353 | 오지랖 [4] | 채찬 | 2021.10.06 | 439 |
사실과 같네 다르네 하고 싶어도 소말리아에 대해 아는게 거의 없다는게 각자의 의견 개진에서 허술한 근거가 될 수밖에 없는 문제네요. 지금까지 읽어본 책 중에 소말리아 저자는 [이슬람에서 여자로 산다는 것]의 이얀 하르시 알리 뿐이고. 제가 다큐멘타리로 본 소년병들은, 그렇게 쾌활하게 웃지도 않고 실제 마주했다면 문답무용 사망했을꺼라고 보지만, 어쩌면 저 컷이 실화에 기반하여 구성되었다면 할 말이 없을 것 같습니다. 총체적으로 국가폭력이 잘 묘사되어서 억압된 사람들이 치고 일어나는 것에 감정이입이 더 되더군요. 타락한 정부(입맛대로 원조를 사익으로 챙기는 씬), 경찰들의 몽둥이 찜질을 민주화 운동에 겹쳐 볼 수밖에 없으니까요. 그런 묘사가 반군 묘사 등의 나머지 공백을 자동적으로 메꾸게 하더라구요. 평을 읽고나서 이얀 하르시 알리의 신간을 희망도서 신청 했네요. 휴. (그리고 그 곳의 한국인들이 알 수 있는 수준의 외적 정보들만을 제공하는 느낌도 있었습니다. 정보 부족으로의 답답함이 긴장의 주 요소였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