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09.11 10:57
본 지는 꽤 오래 되었는데 후기는 이제야 씁니다. 생업이 끝나고 집에 오면 감상이고 뭐고 아무 것도 쓸 기력이 안남아요.
일단 이 영화의 가장 핵심적인 캐릭터인 할리 퀸은 우려와 다르게 꽤 잘 뽑혔다고 느꼈습니다. 아무리 쎈 여자, 강한 여자를 그려도 결국 남자주인공의 팔짱을 끼워주는 역할로 전락시키고 마는 제임스 건의 전력이 있으니까요. 할리 퀸은 무사할 수 있을지 좀 걱정이었는데 <더 수어사이드 스쿼드2>에서 할리 퀸은 자유로운 '미친 여자'로 나옵니다. 하이라이트 액션씬을 독점하기도 하고요. 할리 퀸의 독무대는 굉장히 유려했고 전작보다 훨씬 더 매력적이었습니다. 할리 퀸의 반동을 위해 깔려있던 전제들, 고문씬 같은 것들이 너무 가학적으로 나오지 않을까 긴장도 했지만 생각보다 무난하게 흘러갔습니다. 그의 학살 씬은 이 시리즈만이 가지는 "광기"라는 개성을 가감없이 보여줬던 것 같아 흡족했습니다. 그는 춤을 추듯이 사람들을 지나치면서 찌르고 쏘고 죽여버립니다.
다만 아쉬운 점은 있었죠. 제임스 건이 할리 퀸이라는 캐릭터를 잘 해석하고 제대로 활용할 각오가 있던 것 같진 않습니다. 오히려 서사 주변부로 치워놓고 적당히 건든 다음에 활약하게 만든다는 점에서 이 캐릭터를 감독이 감당하지 못하는 느낌이 좀 있었습니다. 워낙에 독립적인 캐릭터이니 혼자 놀아도 상관없지 않겠냐는 마인드는 좀 배짱이 없어보였어요. 할리 퀸은 수어사이드 스쿼드가 본래의 미션을 수행할 때 혼자 납치되서 중심서사에서 아무 것도 활약을 못하거든요. 그의 광기가 일으키는 파국이나 우연한 승리가 더 재미를 줄 것도 같았는데 영화는 안전한 재미를 위해 할리 퀸을 다른 무대로 격리시켜놓았습니다. 전작에서의 "연애중독"이라는 소재가 또 나와서 이 역시도 반전이 있다지만 신선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를 꼬마 여자아이처럼 그려놓는 게 그를 가장 폭넓게 활용할 수 있는 방법이 아닐까 개인적으로 생각하는데, 작품들은 언제나 그를 성인 여성의 욕망에서 탈착시키지 못하는 인상이 있더라구요.
그리고, 이 작품을 보면서 장르적인 질문에 맞닥트렸습니다. 히어로 영화 장르는 과연 B급이 가능할까요.
제가 이 영화를 보면서 가장 큰 가능성을 느꼈던 캐릭터는 폴카도트입니다. 그는 음침하고, 괴상한 소리를 하고, 혼자만의 환영을 봅니다. 그의 초능력은 자신이 원해서 가졌다거나 온전히 통제가 가능한 게 아니라 환자가 앓고 있는 병처럼 묘사됩니다. 이런 캐릭터야말로 바로 메이저 히어로 장르에서 공식적으로 내세우는 '커다란 힘과 그 힘을 이용한 악당 퇴치'에 정면으로 대치되는 B급 정서를 담고 있는 캐릭터가 아닐까요. 애초에 이 시리즈가 내세운 컨셉은 사회에서 격리된 geek들을 무대로 끌어올려서 괴상한 걸 보여주겠다는 것이었으니까요.
그런데 영화는 이 캐릭터의 매력을 전혀 활용하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영화가 BADASS를 주인공으로 내세우고 폴카도트는 머리 좀 이상한 동네 친구 정도로만 써먹기 때문입니다. 이 캐릭터가 이 영화의 주인공이 되었어야 한다는 말이 아니라, B급 정서를 내세우는 이 영화가 결국 A급 정서에 함몰되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이 영화는 괴짜를 다루지 않습니다. 어찌됐거나 멋있어보이고 주류층들의 인정을 받을 법한 근육마초맨들을 따라갑니다. 그래서 헐리웃에서 제일 섹시하다는 이드리스 엘바와 프로레슬러 슈퍼스타인 존 시나가 주인공으로 이야기를 끌어가고 있죠. 그들은 메인스트림에 딱 걸맞는 터프하고 결단력있는 캐릭터들로서 화끈하고 멋있는 액션을 보여줍니다. 이 영화의 중심이 마초 헬스남들로 맞춰져있고 그들이 아주 위험한 괴물을 쓰러트린다는 것이 주목적으로 설정되어있는데 이 이야기가 어떻게 B급 정서가 되겠습니까. 그건 이미 아놀드 슈왈츠제너거와 실베스타 스탤론이 주구장창 하던 건데요.
제임스 건은 이 영화를 B급으로 포장하기 위해 고어한 폭력씬들로 발라놓습니다. 영화의 오프닝에서 나오는 새를 돌로 쳐죽이기라든가, 아군들이 몽땅 총에 맞아 죽는다거나, 잘못된 사람들을 죽인다거나 하는 씬들로요. 그래서 이 영화는 더 위악스러워집니다. 어떻게든 나쁜 놈인 척하고 싶어하고 고루하지 않은 척 하지만 결국은 다수의 타인을 위한, 그리고 자신의 신념을 위한 익숙한 권선징악 구도로 가니까요. 그래서 이 영화의 폭력적인 씬들은 불쾌하다기보다는 의미값이 0인 씬들이 되고 결국 선을 넘지 않으면서도 쎄보이고 싶어하는 어설픈 불량함만을 보입니다. 험악하고 잔인하다는 건 B급 정서의 핵심이 아닙니다. 히어로가 히어로답지 않아야한다는 게 B급 영화의 핵심이죠.
이 영화가 다루고 있는 정서는 제임스 건의 가오갤 시리즈에 나오는 것들만큼이나 보편적입니다. 가족주의, 좋은 아빠가 되지 못한/좋은 아빠였던 기억, 우정놀음, 약자로서의 소외감과 좋은 세상에 대한 고민... 그들은 게으르고 무책임하지만 좋은 세상에 민감하고 자신의 도덕적 성패로부터 자유롭지 못합니다. 뭘 놓지 못한 채로 계속 신경 안쓴다는 흉내를 내는데 그게 별로 멋있지가 않아요. 이 영화는 전체적으로 고루합니다. 미국의 위선을 고발한다고는 하지만 그 자체가 영화의 '정의를 놓을 수 없는' 강박을 보여주는 것 같기도 하구요.
데드풀부터 더 수어사이드 스쿼드까지, B급을 표방하는 영화들은 결국 A급의 환영에 사로잡혀있다는 인상을 받습니다. 더 넓혀서 생각을 해보면 킹스맨이나 킥애스도 그랬었죠. 히어로가 아니되, 히어로 워너비들을 포진시켜놓고 히어로랑 똑같은 임무를 시키는 건 이제 좀 지겹기도 합니다. 나도 나쁜 놈이지만 너네들같은 나쁜 놈들은 못참겠다? 히어로 장르에서 이런 이야기를 하는 건 크게 의미가 있는지 모르겠어요. 그걸 이미 오만상 찌푸리며 하고 있는 게 배트맨이잖아요. 저는 수어사이드 스쿼드 시리즈가 조금 더 발랄한 freak 쇼가 되길 바라지만 영화사들이 보편적 감성에 업혀가려고 하는 성향상 그건 좀 요원한 일일 것 같습니다.
@ 저는 폴카도트 캐릭터가 너무 아까워요. 이 캐릭터가 어머니의 환영에 사로잡힌 걸 왜 구해주지 못한 걸까요? 고통받는 괴짜를 총알받이로 쓰고 버린 것 같아 기분이 별로 좋지 않았습니다. 그냥 괴짜들이 행복한 이야기로 하면 안될려나요. 아웃사이더고 괴팍해서 신경이 쓰여서 영웅답지는 못한 인간들이지만 나름대로 행복할 수 있다는 이야기를 한다면 그게 정말 B급 정서에 맞는 이야기가 될 것 같은데.
@ 피스메이커를 비판하던 블러드 스포트가 과연 할 말이 있을까요. 미국의 정보 은폐를 비판하던 그가 결국 한 선택은 "우리의 안위"를 위해 정보를 은폐하는 것이었고 그건 결국 미국의 행동과 다를 게 없어보이던데요.
2021.09.11 13:24
2021.09.12 18:56
제가 제일 갑갑한 게 그런 거죠...
2021.09.11 15:34
영화 글 오랜만에 올리셨네요. 잘 읽었습니다.
히어로 영화들은 잘 모르고 이 영화도 안 봤는데 글을 읽으니 이 영화의 특징을 알 것 같고 착각일지 몰라도 아쉬워 하시는 지점에 동의도 되네요. 핵심을 잘 짚어 쓰셔서 그런 것 같습니다. 포장만 b급이고 괴짜들 가지고 새로운 척하는 면이 있는가봐요. 히어로들은 평범한 사람들의 가치를 대신 지켜주는 이들 아닌가요? 진정한 b급, 진정한 괴짜가 나오긴 어려울 것 같긴 합니다.
2021.09.12 18:57
히어로 장르의 한계에 계속 부딪히는 느낌이기도 합니다...
2021.09.11 17:40
아무리 악당이라도 정말 나쁜짓을 시켜버리면 관객들이 응원하면서 보기 거시기하다고 생각하는 것이겠죠. 뭐 당연히 에이어의 수스쿼보다는 훨씬 나았지만 마지막에 갑자기 전부 착하고 정의로운 히어로가 되는 건 보기 좀 그렇더군요.
2021.09.12 18:57
위악으로 계속 센 척을 해댔으니 당연히 나중가서는 좀 시시해보이는;;;
2021.09.11 19:08
B급 영화, B급 정서라는 표현이 좀 모호하긴 하지만,
애초에 추구하였던 방향이나 결과물이 엄밀한 의미의 B급영화, 정서와는 거리가 있지 싶어요.
B급영화의 방향으로 볼 만큼 저예산도, 만듦새가 엉성하지도, 일부러 못만든 것도 아니고
그런 과정의 조악함, 키치함을 매력으로 활용한 것도 아니고..
오히려 어느 메이저영화보다도 매끄럽게 만들었는데..
비주류 캐릭터가 중심인물이 되고, 표현이 매니악하다고 해서 B급을 지향했다고(적어도 의도는 그렇다고) 평가할 수 있는가..
장난기 많고 짓궂은 유머를 추구한다..는 면에서 마블의 데드풀과 비슷한 방향인데 그게 B급 정서인가....는 잘 모르겠어요. (물론 데드풀에도 B급 영화라는 수식어를 붙이는 사람들이 꽤 있긴 하지만 저는 그것도 불만이었어서..ㅎ)
물론 요새는 이렇게까지 따박따박 따지는 사람이 오히려 더 적을 것 같긴 합니다..ㅎ
전 평소 제임스건이 즐겨하는 개그 스타일이 마블의 제약을 벗어나서 좀 자유롭게 풀어진 면이 좋았어요ㅎ 물론 고삐가 없으니 좀 들쑥날쑥하는 느낌도 있긴 했지만요ㅎ
2021.09.12 19:00
음 그러네요. 일단 대자본이 들어갔은 절대로 진짜 '삐급"은 될 수 없겠죠. 다만 비주류를 선언하고 그 비주류로서의 가능성을 탐색할 수 있는 영화들이 왜 장르의 한계에 이렇게 갇혀서 재미를 놓쳐버리는지 아쉬워요. 그리고 타란티노도 삐급 정서를 늘 표방하지만 그가 영화를 매끄럽게 만들었다 해서 그 정서가 완전히 사라지지 않잖아요? 그런데 제임스 건의 영화들은 늘 껄렁거리고 마는 데서 좀 답답합니다.
2021.09.13 01:24
"히어로가 히어로답지 않아야한다는 게 B급 영화의 핵심이죠." 이걸 마치 무슨 정답인양 적어두셨는데 각자의 퍼스펙티브가 있는거죠....뭐 일단 알겠어요
괴짜들의 행복한 일탈! 뭐 이런걸 기대하신거 같은데 이것 자체가 너무 A급 정서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