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도 웨이브에서 왓치맨 봤어요.

2021.12.01 01:36

woxn3 조회 수:449

내용도 기억나지 않는 영화판은 매체에서의 호들갑에 비해 좀 지루하게 봤던 기억입니다. 그 세계관을 그대로 가져온 드라마를 보니까 왜 그랬는지 알겠네요. 이걸 수퍼히어로물이라고 부를 수 있다면 엄청난 변종이라는 수식이 붙어야겠어요. 수퍼히어로물이라기보다는 흑인 수난에 관한 사회비판 드라마군요. 대체 역사물스럽게도 했구요. 수퍼히어로물에 흑인 수난을 끼얹었다기보다는 흑인 수난물에 수퍼히어로물을 끼얹었다고 봐야겠네요. 덕분에 히어로물이라기보다는 '나르코스' 같이 다큐실화에 가까운 밀도를 가진 멜로 드라마 같은 뉘앙스가 훨씬 강해요. 히어로물이 다른 장르를 섞는 건 보편적인 방식이긴 하지만서도 이건 굳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그 외적인 성격이 훨씬 강하네요. 그래서 그 뉘앙스가 막강해지는 중반 이전에는 좀 지루하기도 했어요. 그래도 그렇게 섞여 있어서 재밌는 지점들이 많았고 마지막에는 비행선에 레이저광선에 이런 것들이 잔뜩 나와서 수퍼히어로물스럽게 마무리를 한 것이 만족스러웠습니다. 


흑인 수난물과 더불어 자경단과 익명성, 강대한 힘을 가진 엘리트의 일방적인 실력행사에 의한 질서 유지에 관한 이야기이도 하구요. 이렇게 장르물인척 하면서 하고 싶은 얘기에 더 한눈이 팔려있다는 점에서는 얼마전에 아주 재밌게 본 '어둠의 미사'와 비슷한 면이 있네요. 그래도 어둠의 미사는 장르적 장치들도 꽤 잘 심어둔 편이었거둔요. 왓치맨은 장르적 재미보다는 작가가 하고 싶은 걸 하는 데 무게가 훨씬 실려있었습니다. 저는 노골적으로 치고 박고 생각 없이 활극이 벌어지는 걸 더 좋아해서인지 시리즈 전체를 온전히 즐기기에는 너무 고상한 느낌이기는 했어요.


사회고발 수사물마냥 진중하고 현실적인 뉘앙스가 워낙 강해서인지 초현실적인 장치들이 나올 때는 오히려 당황스럽더군요. 좋게 보면 주제와 호응하는 요소겠지만 장르적으로는 감질나서 못마땅입니다. 익명성에 대한 지적은 요즘 인터넷 세상의 난장이 떠오르는 대목이었어요. 장르적으로는 안티 '히어로물'이기도 하더군요. '안티 히어로'물 말구요. 이점에선 '수퍼히어로물'이라는 게 굉장히 미국적인 장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기타 등등 정치적인 상징이라든가 이런저런 기호들이 수없이 많으면서도 자연스럽게 섞여 있다는 점이 말 할 거리가 많은 드라마인 것 같습니다. 그래서 분석하면서 지식 자랑하기도 딱 좋구요. 스토리텔링 측면에서도 상당한 고수의 냄새가 나죠. 기본 줄기는 고전적인 정도로 평범할 수 있는 이야기인데 수많은 복선과 서브 스토리를 현란하게 짜넣는 솜씨가 상당하네요. 그걸 또 영화적으로 풀어낸 것도 그렇고 누가 봐도 못만들었다고 하기는 어렵겠네요. 그리고 상당한 분노가 느껴졌습니다.


이걸 보고 나니까 한국발 컨텐츠같이 계층이나 계급 얘기를 하는 영상물이 서구권에 왜 없는지 알겠더라구요. 일단 인종문제가 너무 심각하고 급해서 거기까지 들어가기엔 여력이 없겠다 싶구요. 이것만 건드려도 사실 계급문제가 자연스럽게 나오는 거니까요. 미국만이 아니라 유럽권에도 계층 위기가 없는 건 아니지만 다른 급한 문제들이 더 많아서 그렇겠구나 싶었어요. 그렇다고 없는 것도 아니고 안심각한 것도 아니니 한국발 컨텐츠가 나름 틈새시장을 공략한 꼴이 된건가봐요. 한국은 명시적인 계급이나 계층 구분이 그래도 아직은 없어서 이런 걸 다룰 때도 정서가 좀 다르기도 하구요. 


제레미 아이언스가 맡은 캐릭터 같은 사람을 작가가 굉장히 싫어하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잔인하게 다루어지더군요. 동시에 사랑하는 것 같기도 하구요. 어쨌든 후반부에 멘탈이 탈탈 털리는 모습을 보니 통쾌하면서도 나쁜 놈인데 짠하기도 하더라구요.  


로이배티님 초강추작이라 안볼수가 없었네요. 히어로물이라 더 그렇구요. 굉장한 밀도를 자랑하는 드라마로 저도 재밌게 봤습니다. 이걸 보니까 영화판 왓치맨이 궁금해지네요. 예전보다 재밌게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웨이브 100원 주고 가입했는데 HBO컨텐츠를 쌓아두고 있었군요. 디즈니 플러스보다는 이쪽이 더 보물창고 같던걸요. HBO 정식 입성 격하게 기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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