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93년작입니다. '양들의 침묵'보다 2년 뒤에요!! 영화 느낌상 80년대 영화 같았는데. 하하. 암튼 런닝타임 101분이구요. 스포일러 따지는 게 웃기지만 디테일은 최대한 언급 안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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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1세기엔 상상도 할 수 없을 깜찍한 포스터!)



 - 우리의 빌 머레이, 최근 표기로는 빌 '머리'가 되셨으나 인정하기 힘든 그 분이 주인공이죠. 지역 방송 기상 캐스터구요. 나름 시니컬한 드립과 말빨, 쇼맨십 덕에 인기도 살짝 있고, 좀 더 나은 곳으로 옮겨가겠다는 야심을 품고 계십니다. 다만 성격이 더럽죠. 자기만 알고 주변 사람들 다 무시하는데 그걸 굳이 숨기려고 하지도 않고 다 드러낸다는 게 문제.

 암튼 이 양반이 '성촉절'을 맞아 겨울의 길이를 예언해준다는 마못을 데리고 축제를 여는 '펑서토니'라는 시골 마을로 갔다가 그만 아무 이유도 까닭도 없이 끝없이 반복되는 2월 2일 하루에 갇혀 버린다... 는 내용입니다. 글 적는 김에 적긴 적었지만 참 새삼스럽네요. 이걸 누가 몰라. ㅋ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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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인공의 이름도 필. 마못의 이름도 필입니다. 둘 다 날씨를 예보하죠.)



 - 그러니까 타임루프물의 원조죠. 역시 엄밀히 따지고 들면 진짜로 원조일 리는 없겠습니다만. 사람들이 원조로 인식하고 원조로 언급하는 영화라는 거. 그게 중요한 거죠 뭐 지금 제가 논문 쓰는 것도 아닌데. 그리고 마침 제가 타임루프물 좋아하는 한 마리 덕후인 것인데요.

 놀라운 사실이지만? 사실은 제가 이 영화를 이번에 처음 봤습니다? ㅋㅋㅋㅋ 말하자면 티비에서 해주는 걸 조각조각 여러 번 보긴 했어요. 그래서 다 본 듯한 기분에 빠져 평생을 살았지만 제대로 처음부터 끝까지 완주한 건 이번이 처음입니다. 밀린 숙제들이 만든 거대한 퇴적층에서 드디어 한 조각을 걷어낸 셈이네요. 고마워요 웨이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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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직이 무려 America's Sweetheart 이었던 그 분의 리즈 시절. 이젠 앤디 '맥다월'인 건 다들 아시죠? ㅋㅋ)



 - 원조 내지는 원조격의 영화. 게다가 30년 묵은 영화. 게다가 장르가 말랑말랑 로맨스가 주가 되는 코미디에요. 

 당연히 이야기의 템포는 아아주 여유롭고요. 특별히 자극적인 사건이나 긴박한 상황이 벌어지지도 않겠죠. 앞뒤가 치밀하게 맞아떨어지며 벌어지는 반전이나 숨겨진 진상 이딴 것도 없습니다. 그냥 타임루프에 갇힌 스크루지 이야기일 뿐이고 그래서 내내 동화급의 나이브함과 느긋함을 보여줘요.


 무려 2022년에 이런 걸 보고 있으면 당연히 싱겁다든가 좀 늘어진다든가 그런 느낌을 받는 게 인지상정 아니겠습니까? 제가 제대로 감상할 생각을 하염 없이 미루며 오랜 세월 살아온 것도 그런 이유였구요. 근데 놀랍게도 안 그렇더라구요. 비교적 안 그런 것도 아니고 전혀 안 그랬습니다. 충분히 재밌었고 심지어 신선하다(!)는 느낌까지 좀 받았어요. 왜 그랬냐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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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단 것을 쌓아 놓고 먹으며 커피는 주전자째 들이키기. 어차피 내일이면 이 칼로리 다 리셋이니까!!)



 - 말하자면 구닥다리 원조이다 보니 요즘의 최신 타임 루프물이 거의 다루지 않는 쪽 이야기를 주제 삼아 느긋하게 탐구하는 영화였기 때문입니다.

 21세기의 최신 타임루프물들은 대부분 이 장르의 공식을 관객들이 다 알고 있다는 걸 가정하고 만들어지잖아요. 그래서 영화마다 나름의 튀는 컨셉과 소재가 있고 타임루프가 시작되면 기본적인 묘사는 최대한 빨리, 몽타주 같은 걸로 해치워버린 후에 다른 이야기로 넘어가죠. 그걸로 지구를 구하든가 연쇄 살인마를 잡든가 뭐 거대하고 강렬한 미션들이 다 있으니 그 얘기에 집중하거든요.


 근데 이 영화는 정말 태연자약하게 '니가 타임루프에 갇히면 뭐 할래?'에만 집중합니다. 시작해서 끝날 때까지 그래요. 타임루프 그 자체가 문제이지 그걸로 뭐 다른 걸 해결할 생각이 없죠. 결국 요즘의 다른 영화들이 5분 안에 해치울 이야기를 100분 가까이 늘어놓는 셈인데. 다행히도 이 영화엔 디테일한 아이디어들이 풍부합니다. 예를 들어 '어차피 리셋 될 테니 다이어트 걱정 없이 단 걸 맘껏 먹을 수 있다'라는 아이디어 같은 거? ㅋㅋㅋㅋ 


 그리고 또 그 타임루프 안에 갇힌 주인공의 심사를 아주 자연스러우면서도 설득력 있게 보여줘요. 놀라고, 현실 부정하다가 받아들이고, 안 좋은 방향으로 즐기고, 그러다 질리고, 지치고 절망했다가 결국 득도(...)하고, 그러면서 거지 같은 자기 성격도 고치고... 뭐 이런 단계들을 정성들여 보여주는데. 역시 요즘 타임루프물에선 거의 찾기 힘든 이야기라 오히려 신선하고 좋더라구요. 쫓아야할 살인마도 없고 구해야할 지구도 없으니 타임루프물로 이런 이야기도 만들 수 있구나. 라는 느낌. 사실 이게 먼저인데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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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겹고 갑갑해 미치겠다!! 가 타임루프의 핵심 문제였던 영화가 얼마만인지... ㅋㅋㅋ)



 - 타임루프가 그렇게 흘러가는 가운데 일단 메인 스토리는 스크루지 개심 이야기였죠. 

 이것 역시 괜찮습니다. 고색창연하게 옛날 생각 나는 '못된 도시놈이 착하고 순수한 시골 사람들 만나 개심하는 이야기'의 전형을 충실하게 따르지만 거기에 타임루프라는 설정이 얹히니 식상하지 않게 재밌고 웃기는 이야기가 만들어지구요. 또 앞서 말했던 주인공이 타임루프에 적응하는 과정이 이 못된 주인공놈의 개심 과정과 상당히 잘 맞아떨어집니다. 그래서 억지나 급전개라는 생각 없이 주인공의 변화를 되게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게 돼요. 리즈 시절 해롤드 래미스가 참 능력 좋았구나... 라는 생각을 새삼 다시 하게 됐네요.



 - 결정적으로 캐스팅이 정말 끝내주죠. 완벽 그 이상이랄까요. 

 근데... 이 캐스팅에 대해선 별로 할 말이 없어요. 너무 완벽해서 설명을 붙이는 게 식상한. ㅋㅋ 빌 머레이가 맡은 캐릭터는 너무나 빌 머레이구요. 앤디 맥도웰이 맡은 캐릭터는 또 너무나 앤디 맥도웰입니다. 이 분들의 커리어를 정의하는 대표 캐릭터들을 맡아서 보여주는 느낌? 이 두 배우가 대충 어떤 사람인지 알고 싶으면 이 영화를 봐라! 라고 해도 될 것 같아요.

 뚱한 표정으로 쉴 새 없이 드립을 쳐대는 못되게 재밌는 남자. 그리고 참 세상 말도 안 되게 선량하고 순수하게 사랑스러운데 그게 그냥 원래 그 사람인 것처럼 느껴지는 여자. 대략 이런 느낌인데 두 배우 다 이런 방향으로 리즈 시절에 이 영화를 만났구나... 이런 생각이 들어요.


 그냥 배우 자체가 개연성이고 연기가 연기가 아닌 것 같고. 아무리 잘 쓴 각본이라고 해도 막판에 제가 흐뭇한 얼굴로 내내 실실 웃고 있었던 건 최소 절반 이상은 배우들 파워 덕분이었던 것 같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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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냥 둘을 딱 세워 놓기만 해도 뭔가 스토리가 만들어지는 것 같지 않습니까.)



 - 더 길게 말할 건 없을 것 같구요. 그냥 저처럼 아직도 안 보신 분들은 보세요.

 원조격이 아니라 그냥 원조라고 불러줘도 될 정도로 타임루프와 거기에 빠진 사람이라는 설정을 성실하게 판 이야기구요.

 그런 설정의 힘으로 식상 진부한 교훈담이 되기 쉬운 이야기를 재치있고 재미나게 잘 살려냈구요. 심지어 살짝 깊이까지 느껴집니다!? ㅋㅋ

 더할 나위 없이 완벽하게 캐스팅 된 배우들의 좋은 연기 덕에 이야기가 몇 배로 더 살아나는 느낌입니다.

 심지어 막판 로맨스도 의외로 설득력 있고 좋아요. '타임루프 원조' 간판 떼고 그냥 로맨틱 코미디로 승부해도 고전 명작 소리 들어도 괜찮을 영화였네요. 정말 재밌게 잘 봤습니다.




 - 해롤드 래미스와 빌 머레이가 이 영화 찍다 갈라서서 평생 연락 끊고 살았다는 건 오늘 처음 알았네요. 그래도 래미스가 세상 떠나기 전에 한 번은 만나서 풀었다고 하고. 찾아간 쪽이 내내 더 격하게 거부해왔던 빌 머레이였다고 하니 정말로 잘 풀렸을 것 같아 다행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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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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