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방지 (1988)

2018.11.09 21:04

DJUNA 조회 수:7429


올해 개봉 30주년을 맞은 송경식의 [사방지]는 뭔가 변태스럽고 잘 팔릴만한 소재가 없을까 고민하며 조선왕조실록을 뒤지던 80년대 충무로 살색 영화 제작자들이 찾아낸 실화에 바탕을 두고 있습니다. 세조 시절 살았던 반음양인간이었던 사람 이야기죠. 김구석의 처인 이씨 부인이 여종인 사방지와 기이한 관계를 맺고 있어서 옷을 벗겨 보니 남자 것과 아주 비슷한 성기를 갖고 있었다고요. 사방지는 성기를 제외하면 여자 같은 모습이었다고 하니, 실화를 핑계로 유사 동성애 영화를 만들 수 있는 핑계가 만들어진 것이죠.

80년대에 만들어진 선정적인 영화들 대부분이 그렇듯, 그렇게 야심있는 작품은 아닙니다. 영화를 이루고 있는 재료들은 대부분 당시 만들어졌던 에로틱한 사극에 나왔던 것들이에요. 성에 굶주린 과부나 목욕신 같은 것들 말이죠. 단지 보통 영화라면 이대근 같은 힘 좋아보이는 남자배우가 맡았을 역할을 이혜영이 하고 있어요.

[사방지]는 당시 만들어졌던 에로틱 사극 중 가장 노골적으로 남근 중심적인 영화입니다. 몇 년 뒤에 만들어진 양병간의 [무엇에 쓰는 물건인고] 정도가 경쟁이 되려나요? 그런데 재미있는 게 있어요. 두 영화의 남자 성기는 진짜 남자와는 별 관계가 없다는 거죠. 여자들을 만족시켜주는 무언가이긴 한데, 굳이 인간 남자 몸에 달려있을 필요는 없는 것이죠. 이혜영의 사방지는 그냥 여자처럼 보이고 여자처럼 행동하기 때문에 우리가 볼 수 없는 성기의 존재감은 더 강렬합니다. 특히 사방지가 사대부 부인들의 서비스를 해주는 영화 후반은요. 이 장면에서 사방지는 남성성을 흉내낼 필요조차 없어요. 그냥 자신의 남근을 보여주기만 하면 됩니다.

사방지와 이씨부인의 관계를 그릴 때 영화는 심지어 남근을 개입시키지도 않습니다. 이씨부인은 사방지의 비밀을 모른 채로 절에서 집으로 데려오고 유혹해요. 그 때문에 영화는 만든 사람들이 의도했던 것보다 더 동성애 영화처럼 보입니다. 두 사람의 로맨스는 굳이 남자 성기가 개입되지 않아도 진행될 수 있습니다. 단지 80년대 관객들은 그게 있어서 더 쉽게 이해할 수 있었겠지요.

이 영화에서 남자들의 존재는 진짜로 하찮습니다. 단지 기계적인 설정과 배경, 도구로만 존재할 뿐이죠. 영화를 끌어가는 건 대부분 여자들의 욕망과 행동입니다. 그게 '남자 성기를 가진 여자'라는 캐릭터를 중심으로 돌아간다는 게 한계이긴 한데, 이씨부인, 사방지, 나중에 사방지를 자신의 복수에 이용하려고 하는 무당 묘화와 같은 인물들은 캐릭터가 생생해서 그냥 변태적인 살색 영화로 보기는 아쉽습니다. 덕택에 당시에 만들어졌던 비슷한 영화들과는 달리 [사방지]는 꾸준히 기억되면서 새로운 세대의 관객들을 모으고 있습니다. 단지 그 동안 관객의 성격이 완전히 달라졌죠. 당시는 퀴어나 페미니스트 관객을 위해 영화를 만든다는 건 상상도 할 수 없었던 때였으니, 종종 작품은 만든 사람들의 의도를 넘어섭니다. (18/11/09)

★★★

기타등등
요새 보면 여러 모로 [벨벳 애무하기]가 떠오르기도 해요. 워터스 소설의 해피 엔딩은 불가능했지만요.


감독: 송경식, 배우: 이혜영, 방희, 곽정희, 박암, 이경희, 이동신, 다른 제목: Sabangji

IMDb https://www.imdb.com/title/tt0396846/
Naver https://movie.naver.com/movie/bi/mi/basic.nhn?code=213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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