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12.16 23:24
[엘리자벳과 나]의 여성영화제 상영 당시 제목은 [시시와 나]였습니다. 그걸 [엘리자벳과 나]로
고친 건 뮤지컬 [엘리자벳]의 관객들을 노렸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하는데 (엘리자베트라고
쓰지 않고 뮤지컬 표기인 엘리자벳을 쓴 것부터가 그렇잖아요) 여러 모로 실수였던 거 같습니다.
일단 엘리자베트는 흔한 이름이잖아요. 이것만으로는 아무 의미가 없죠. 하지만 시시는 단 한 명이고
뮤지컬 [엘리자벳]을 본 연뮤덕이라면 시시가 누구의 별명인지 알 걸요. 다시 말해 굳이
안 해도 되는 짓을 한 겁니다.
네, 시시라는 애칭으로 유명했고 오스트리아 제국의 황후였으며 헝가리 왕국의 왕비였던 엘리자베트
아말리 오이게니에 대한 영화입니다. 얼마 전에 [코르사주]가 나오지 않았냐고요. 네, 또 나왔어요.
그리고 이것만 나온 게 아니에요 21년과 22년에 이 사람을 주인공으로 한 드라마가 각각 만들어졌습니다.
22년 것은 넷플릭스 시리즈라서 들어가 [황후 엘리자베트]를 검색하시면 보실 수 있어요.
(여기서는 당연히 뮤지컬 표기를 안 합니다.) 너무 많은 거 같긴 한데, 영국 사람들이 자기네
왕족들 팔아먹는 걸 생각해 보면, 이 정도는 봐줄만한 거 같기도 해요.
영화의 차별성은 '나'에 있어요. 이 영화의 주인공은 시시가 아니라 시시가 죽기 전까지 몇 년 동안
시녀로 일했던 헝가리 귀족인 이르마 스타라이 백작입니다. 이 사람은 시시가 죽은 뒤에 회고록을
썼고 그게 역덕들 사이에서 아직도 읽히며 창작 소스로 쓰이는 모양입니다.
하지만 이 영화에서 고증에 맞는 이야기를 기대하는 건 부질없습니다. 일단 나이가 안 맞잖아요.
정보 없이 보면 [코르사주]와 [엘리자벳과 나] 사이엔 별 시간 차가 없는 거 같습니다. 하지만
아니에요. 그럴 수 없어요. 영화는 시시의 말년을 그리고 있는데 이 사람은 예순이 넘어서 죽었으니까요.
이르마는 시녀가 되었을 때 30대 초반이었으니 거의 조카나 딸뻘이었겠죠. 하지만 영화는
이 둘을 비슷한 나이로 맞춥니다. 가장 기초적인 나이도 융통성이 있게 그려졌다면
나머지 정보도 의심하는 게 맞지 않을까요.
[코르사주]와 비교해 봤을 때 가장 큰 차별성은 [엘리자벳과 나]가 더 게이스러운 영화라는 것입니다.
얼떨결에 황후의 시중을 드는 일을 하게 되었다가 결국 그 사람을 짝사랑하게 된 여자의 이야기니까요.
그리고 영화는 엘리자베트도 꽤 퀴어로 그립니다. 그리스 섬에서 중성적인 옷을 입힌 젊은 여자들을 가까이 하면서
거의 여자들만의 세계를 살고 있는 사람을 어떻게 그냥 이성애자라고 할 수 있겠어요.
역사 같은 걸 대충 무시하고 본다면 꽤 재미있는 영화입니다. 그리고 완전히 허구라고 할 수는 없겠죠.
영화가 그린 변덕스러운 디바 같은 엘리자베트의 묘사는 나름 사실 기반이 있을 겁니다. 몸매에
대한 집착, 섭식장애 같은 것도 그냥 만들어진 이야기가 아니고요. 실제 이르마는 영화 속 이르마
같은 사람은 전혀 아니었겠지만, 당시의 퀴어 여성이 겪었을 법한 삶의 조건을 꽤 설득력 있게
그립니다. 영화 속 이르마가 하는 몇몇 행동들은 솔직히 아주 심하게 과장되었을 거란 생각이
들지만, 앞에서 말했듯 이 영화에서 사실성을 따지는 건 큰 의미가 없고요. 게다가 전 이런 디바들 주변에서
고생하는 사람들 이야기를 좋아해서, 이 영화의 코미디가 잘 먹혔던 거 같습니다.
단지 이런 왕족 소재 영화들을 볼 때마다 느끼는 '그래서 뭐?'라는 질문은 여전히 남습니다.
전 황실 생활에 적응하지 못하고 자유를 갈망하는 엘리자베트의 고통을 백퍼센트
이해하고 남음이 있습니다. 하지만 자신의 계급이 주는 안락함과 사치를 포기하지 않으면서
특권층의 의무를 방치하는 건 그냥 좀 그렇지 않습니까? 화려한 스타에게 관심이 쏠리는
것 역시 백배 이해하지만 더 관심을 가질 가치가 있는 다른 사람들이 있을
거란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23/12/16)
★★★
기타등등
앞으로 보아야 할 산드라 휠러 영화가 두 편이 더 남았어요.
IMDb https://www.imdb.com/title/tt14040054/
Daum https://movie.daum.net/moviedb/main?movieId=1675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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