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 16일 테렌스 맬릭의 황무지

2월 21일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의 잠입자

2월 25일 크지슈토프 키에슬로프스키의 살인에 관한 짧은 필름


-1. 영화내용 자세하게 다 있습니다~~...


0. 이제부터는 어투를 반말 아닌 존대로 바꿀 예정입니다. 다만 글의 목적 자체는 영화에 대한 단상들을 공유하고, 꼼꼼하게 기록해나가는 것이니까 인상 위주로 편하게 쓰는 것임을 분명히 밝혀둡니다. 하, 근데 지금 2015년 6월 21일인데(이 글 자체는 이때 썼습니다. 업로드는 8월에 올리지만요 ㅡㅡ;), 시험 끝나고서 지금 쓰는 것은 2015년 2월 중반 영화들이네요!! 그 사이에 물론 한 스무편 정도의 영화들이 산적해 있습니다. 바쁘다는 핑계를 대고 게으름을 피우더니, 결국 이렇게 할 일이 쌓인 것이죠... 게으름은 단연 생물체의 적입니다.


1. 테렌스 맬릭의 황무지

  

  아주 흥미로운 영화였습니다. 테렌스 맬릭하면 괴짜 철학도 트리 오브 라이프 이런 연관 단어만 떠오르는데, 이런 영화를 찍었는 줄은 몰랐어요. 이 영화는 상당히 괴이합니다. 제임스 딘 워너비 같은 마틴 쉰이 무지 잘생기게 나와요. 괴짜는 시시 스페이식과 사랑에 빠지고, 그녀의 아버지를 죽여버리기까지 하는데, 시시 스페이식은 그 일로 물론 마틴 쉰을 원망하지만, 그렇다고 둘이 같이 돌아다니지 않는 건 아닙니다. 

  전반적으로 뭐라고 해야 할까, 이상한 영화라는 게 제 총평입니다. 기본적으로 부조리한 영화입니다. 이해하기 힘든 국면이 몇 개가 있어요. 주인공들 성격도, 그 사람들이 그려나가는 무의미한 질주 같은 여로도 그렇고요. 일단 모든 게 싫어서 망아지처럼 뛰쳐나가는 젊은이들의 느낌인데, 어떻게 보면 반항적이기도 하고, 대책 없어 보이기도 합니다. 도망다니는 과정에서 마틴 쉰은 사람들을 죽이고, 협박하는데, 그 와중에 적의라고는 거의 눈곱만치도 없습니다. 그저 그렇게 해야 되는 줄 알고 행동하는 이들 같아요. 시시 스페이식은 마틴 쉰과 연애를 하는데, 그 연애 과정도 그렇게 이성적이지는 않고 그저 잠깐의 충동질에 가깝고요. 식어버리고, 지겨워버리니까 그 둘의 방랑도 끝이 나버립니다.

  황무지라는 영화를 보고 나서 나는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지 갈피를 잡을 수 없었습니다. 재미있게 봤는데, 이 부조리한 영화에서 내가 뭘 재미있게 본 것인지도 모르겠는 그러한 느낌이었어요. 50년대였을까, 제임스 딘이 나왔던 몇 개 안 되는 그 영화들에서 제임스 딘은 무진장 멋있지만 이해 안 되는 광기가 있는 그러한 젊음이었습니다. 황무지는 그런 제임스 딘 류의 청춘을 모사해서 자기만의 작품으로 승화한 느낌인데, 훨씬 부조리하고, 훨씬 초라합니다. 그리고 역설적으로 그 두 가지 특성 때문에 훨씬 현실적입니다. 제임스 딘은 달리는 차에서도 뛰어내리고, 석유억만장자도 되지만, 얘네는 그런 것도 아니고 그냥 벌거벗은 근육과 청춘, 젊음 빼고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치기에 대한 냉정한 분석인 걸까요? 하지만 단순히 치기를 해부했다고 하기에는 영화 전반에 깔려있는 마틴 쉰 캐릭터에 대한 기묘한 애정이 느껴져서, 한심하지만 매력있는 젊은이를 다룬, 그런 영화 같기도 했습니다.


2.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의 잠입자


  공교롭게도 이번 영화일기에 등장하는 영화들은 거진 내가 보고서 이성적으로, 조리있게 말하기 쉽지 않은 영화들입니다. 심지어 잠입자는 보고나서 지금 한 몇 개월이 지났는데도 내가 뭘 본 것인지 잘 와닿지도 않습니다. 그렇지만 그렇다고 해서 내가 이 영화를 재미없게 본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아주 재미있게, 아주 아름답게 잘 보았습니다. 심지어 이 영화 원작인 소설까지 아마존 킨들로 구입해서 보고 있는데, 다른 책들 때문에 살짝 손놓긴 했지만, 원작 분위기와 영화 분위기가 생판 다른 것에 놀라고 있습니다. (소설은 살짝 전형적인 SF 느낌 같던데... 더 읽어봐야 알겠지만, 소설은 다소 읽을 때 마초의 숨결이 느껴집니다. 영화는 원작과 다르게 풀이 죽어서 광기에 시달리는 섬세함의 끝판왕 같고요.)

  잠입자는 일단 너무 장면들이 예쁩니다. 제작비 아끼느라고 최대한 노력한 것 아닐까 싶은 여러 장면들이 꽤나 있는데, 진짜 별 거 아닌 것 같은 그 장면 하나하나가 완전 아름답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니 얀 트로엘의 "마지막 문장"에서 흐르는 물가 잡는 장면이 있는데 이 잠입자 오마주 아닌가 싶네요. 아닐 수도 있는데... 어쨌든, 화면 정지된 것처럼 미친 듯이 긴 호흡 속에 불안한 영혼들의 초조함이 엿보이는 영화입니다.

  영화 자체의 이야기는 신에 대한 질문으로 가득한 느낌입니다. 그 때 같이 본 사람이랑 이건 분명 사제에 관한 이야기가 아닌가 토론했던 기억이 나는데, 확실히 잠입자 역할의 주인공은 미지의 공간에 대한 분명한 믿음을 갖고 있는 자지만, 그를 좇아 간 두 명의 사람들, 학자와 작가는 회의와 이성에 대한 자각만 가득할 뿐입니다. 그런 그들의 불신을 보면서 잠입자도 결국은 무너지지만, 그의 믿음은 그의 딸이 가진 신비한 능력으로 증명됩니다.

  우리가 알지 못하는 미지의 영역, 우리가 가져야 하는 경이감에 대해 강조하는 이 영화는 인간의 보잘것없음을 마구 비웃는 것 같습니다. 그들이 겪어야 하는 과정 안의 고통들은 정적이면서 부드럽고, 아름다우면서 사실 잘 보면 별 거 아닌 그러한 장면들 안에 함축적으로 담겨져 있습니다. 영화를 정말 예술의 경지로 끌어올린 작품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돈 쳐바르면 물론 진짜 감각적으로 쾌를 주는 그런 영화들이 요즘의 경향이고, 그것도 잘 만드는 거 엄청난 능력이지만, 개인적으로는 이런 잠입자 같은 영화들이 좋습니다. 길고, 현실적이면서 동시에 비현실적이고, 무지 깊은데 겉으로 보이기에는 아닌? 모도 아니고 도도 아닌 그 애매함 속을 파고드는 류의 영화만큼 잘 만들었다는 느낌 주는 영화는 저한테 별로 없는 것 같습니다. 취향 차이겠지만요.


3. 크지슈토프 키에슬로프스키의 살인에 관한 짧은 필름에 관해서는 아쉽게도 별로 할 말이 없습니다. 그저 생각했던 것보다 별로였다는 것이지만요. 오프닝 장면과 제목부터는 기대감이 빵빵했는데 가면 갈수록 감흥이 없어졌습니다. 여기서 형상화하는 주제 의식이 나한테 상당히 별 의미가 없습니다. 소년은 사람을 죽였고, 그 대가로 사형을 당합니다. 소년이 사람을 죽이는 데 있어서의 과정을 낱낱이 보여준 다음, 이렇게 큰 죄인인 소년조차 제거해버리는 국가 제도의 폭력성 역시 보여주면서, 사람들로 하여금 감정을 자극하고, 그 자극 속에서도 여전히 살아숨쉬는 폭력에 대한 이야기를, 각기 다른 형태로 자행된 살인을 보여주는 영화입니다. 어떻게 보면 참 제목에 충실한 영화예요. 예리한 첨단을 달려서 논쟁을 불러일으키고자 한 의도가 보이는데, 나는 그러한 결과로 이 영화가 얻을 수 있는 깊이가 있나 의문이 듭니다. 저도 이 영화의 시선에 기본적으로 공감하는 편이지만, 뭐랄까, 저한테는 굉장히 직선적인 느낌의 영화였습니다. 사실, 살인에 관해 그다지 짧지도 않은 필름이었고요.

  취향 차일까요? 제 기분을 들뢰즈 식으로도 표현 가능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저한테는 그다지 낯설음을 주는 영화 기호는 아니었습니다. 한 번, 두 번 여운을 준다기보다는 그냥 슥 지나가버리게 하는, 그런 기호였어요. 해석할 수 없는 연인의 표정을 봤을 때 사람은 그걸 계속 곱씹는다던 들뢰즈 표현이 있는데, 그런 매력적인 얼굴 같은 영화는 아니었다 이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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