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회 전날 금요일 저녁에 영화 [스텔라]를 봤습니다. 영화가 끝난 후 정성일 평론가님은 GV를 하면서 취향에 매진하는 것의 정치성을 이야기했습니다. 내일 채상병 특검법 시위가 열린다는데, 거기에 참여하는 게 영화를 보는 것보다 더 중요한 일이 아닐지 묻더군요. 평론가님은 영화를 영화로만 보는 것, 영화를 미학이나 취향으로만 소비하는 것을 늘 경계합니다. 그러면서 영화 속 투쟁을 조금이라도 현실에서 실천할 수 있기를 이야기해왔습니다.

그 말을 듣고 조금 찔렸습니다. 안그래도 촛불 집회 공지 메시지에 채상병 특검법 촉구 집회에 관한 안내도 딸려있었습니다. 이미 집회가 한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해병대 집회라길래 민간인이 참가해도 되는지 알 수 없어서 망설이고 있었습니다. 그래도 해병대 집회는 또 어떤지 궁금하기도 해서 현장으로 나갔습니다.

해병대 빨간 티셔츠를 입은 사람들이 한 삼사백명 모여있을 줄 알았는데 경기도 오산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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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이 정말 많았습니다. 크리스마스 때 홍대입구역 10번 출구나 명동역을 방불케했습니다. 서울역 4번 출구에서 나가는 것도 힘들었습니다. 채상병 특검법에 사람들이 이렇게 관심이 많았다는 걸 뒤늦게 깨닫고 살짝 반성도 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내가 나갔던 최근의 그 어떤 윤석열 탄핵 집회보다도 사람이 많았습니다. 아무리 사람이 많아도 집회 옆의 인도로 지나가는 게 어려운 적은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인도에도 사람들이 너무 많아서 앞으로 나가는 게 힘들 정도였습니다. 집회를 하는 도로에는 이미 사람들이 꽉 차있었고 통행을 하는 인도에도 구석구석에 깃발을 든 사람들이 차있었습니다. 집회 스크린을 보기 위해서는 행렬 뒤쪽까지 한참 걸어야했습니다. 통제를 하는 경찰이나 집회 인원들도 버거워하는게 눈에 보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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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회 인원은 서울역 4번 출구에서 숭례문까지 꽉 차있었습니다. 인도 역시도 통행 인구가 너무 많아 두번째 블록까지 혼잡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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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 인사들이 차례차례 연설을 했습니다. 그 중 해병대 예비역 김구현 변호사가 해병대 예비역들과 경례를 할 때 정말 이상한 기분이 들었습니다. 군인의 경례 대상은 늘 상급자 혹은 '국가'로 한정지어집니다. 군인의 경례는 상급자나 국가에 '충성'한다는 약속이지 국민은 그 사이에 낀 하나의 대상일 뿐이라는 이미지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 자리에서 해병대 예비역의 경례는 다르게 해석해보고 싶어졌습니다. 그 어떤 계급장도 없는 시민들에게 해병대 군인들이 경례를 하는 모습은, 그 구호가 정확한 대상을 찾아 향하는 것 같기도 했습니다.

해병대라는 집단은 그동안 늘 자기들만의 폐쇄적인 서열의식과 과한 자부심으로 조롱의 대상에 가까웠습니다. 그러나 이 집회현장에서 그런 인식이 많이 허물어졌습니다. 소년만화에나 나오는, '동료를 지킨다'는 그 의식을 현실에서 보니 감정적으로 좀 흔들렸습니다. 이 사람들이야말로 동료를 지키지 못해서 후회하고, 남은 동료들을 지키려는 그런 점프 만화의 주인공스러움을 실천하고 있지 않습니까? 이들이 맞서는 대상은 압수수색과 거부권으로 모든 뜻을 거부하거나 이뤄내는 사실상 정치깡패들이죠. 그런 이들에게 해병대 대원들은 자기 동료의 죽음에 책임을 지라고 이렇게 얼굴과 이름을 까고 대국민 성명을 발표하고 있었습니다. 이야말로 동료를 위해, 강강약약의 투쟁을 한다는 만화적 로망이기도 했습니다.

동시에 짜증이 났습니다. 죽은 사람은 20대 남성입니다. 대한민국의 아주 많은 20대 남자들, 거의 모든 남자들이 군생활의 부조리를 체감합니다. 군대에서 누가 죽는다는 건 그 부조리가 일어날 수 있는 최악의 단계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어디에 있습니까. 현장에는 5060 중년 세대가 다수였고 20대 남성은 거의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 무엇보다도 본인들의 일이고 공감이 쉬운 이 사건에 대해서는 왜 직접 참여해서 권리투쟁을 하지 않을까요. 이들이 사이버 공간에서 가상의 마녀들과 싸우는 그 열정을, 자기 권리를 위해서는 쓰지 못하는 것에 혐오감이 치솟아올랐습니다.

민주주의가 위기가 아닌 적은 없습니다. 그러나 이제 민주주의가 내부에서부터 계속 붕괴되어가고 있는 것 같다는 위기감이 닥쳐왔습니다. 원래 혁명은 10대 청소년, 20대 청년들의 것이지 않았나요...? 신체적으로도 힘이 넘치고 이상주의를 굳건히 믿으며 분노를 밀고 나가는 그 힘이 제일 폭발하는 때가 10대와 20대 아닌가요? 그런데 현장에는 온통 "아저씨"와 "아줌마"들뿐이었습니다. 20세기에 민주주의를 실천하던 이들이 나이를 먹어서도 아직도 그 역할을 수행하고 있었습니다. 광장의 민주주의는 계승되지 않았습니다. 그렇다고 이를 대체할 새로운 민주주의가 나온 것도 아닙니다. 히키코모리들이 모든 경제적 책임을 늙은 부모에게 떠넘기듯, 사이버 공간의 테러에만 중독된 10대 20대 남자들이 아버지 어머니 세대에게 투쟁까지 떠맡겼습니다. 자신들은 여가부 폐지를 외치며 마음 느긋하게 윤석열을 찍어놓고 매일매일 "페미사냥"만 합니다. 하지만 20대 남성이 억울하게 죽은 사건에 윤석열이 얽혀도 부모 세대들이 투쟁하도록 방치합니다.

모든 102030 남자들이 그런 건 당연히 아닐 것입니다. 하지만 특히 온라인에서의 집결과 돌출을 광장에서의 부재와 비교해보면 대표적인 에너지가 어디에 쏠려있는지 실감할 수 밖에 없습니다. 자기들의 안위에도 무관심한채로, 여자들을 욕하거나 희롱할 권력에만 탐닉하는 게 현 102030 남자들의 집단적인 의식 아닌가요? 앞으로도 이런 태세는 쭉 이어지거나 더 나빠질 것입니다. 현실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든, 그걸 직접 몸을 이끌고 나가 시위하는 건 부모 세대일 것이고 102030 남성들은 계속해서 "댓글"과 "비추"로 자신들만의 성전을 펼치겠죠. (혹은 비행선 풍선을 날리고 자기들끼리 대단하다면서 박수를 치거나...)

5060, 그보다 더 나이 들어보이시는 분들이 광장에 나와서 싸우는 것을 보면서 괜히 미안한 마음까지 들었습니다. 우리 세대보다 몸이 더 아프고 힘들었으면 힘들었지 길바닥에 앉아서 소리치는 게 편하고 쉬울 리가 없습니다. 그런데 이런 짓을 계속 이 나이든 사람들만 하게 하는 게 좀 씁쓸했습니다. 어쩌면 켄 로치의 영화처럼 이제 낡고 지친 몸을 가진 이들이 더 싸울 수 밖에 없을지도 모르지만요. 최소한, 이 자리에서 공연을 한 브로콜리 너마저의 음악이 어울리는 세대들이 더 주축이 되어야하지 않았을지요.

각 당대표들이 오는 걸 뒤늦게 알았습니다. 현장에서 중장년층의 최애 여의도 아이돌인 조국의 인기도 실감했고 락페 피날레급으로 등장 전에 이름을 외치게 만드는 이재명의 인기도 경험했습니다. 장혜영 의원이 말하는데 하필 태극기 부대 아주머니가 집회에 난입해서 소동이 생겼고 그 때문에 집중을 잘 못했던 게 아쉽습니다. 이 글을 쓰고 보니 해당 건은 국회에서 부결이 됐네요. 정말 화가 치밀어오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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